§ 나는 될놈이다 986화
뭔섭?
교섭?
[아무래도 저 언데드들이 미친 것 같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온갖 아키서스에 익숙해진 카르바노그도 괴상망측하게 보는 이상현상!
태현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드워프 NPC들과 교섭한다.
이건 말이 됐다.
엘프 NPC들과 교섭한다.
이것도 말이 됐다.
그런데 언데드 몬스터들과 교섭한다?
…이건 말이 안 됐다!
언데드 몬스터들은 보통 의지가 없었다.
리치같이 자기가 직접 언데드가 된 특수한 몬스터들은 목적이 있어서 따로 행동했지만, 다른 언데드 몬스터들은 보통 아니었다.
죽음의 기운을 받아 다시 태어난 언데드 몬스터들은 생명체에 대한 증오만 보여줄 뿐.
네크로맨서들이 언데드들을 불러내고, 돌아다니는 언데드들을 지배해서 부려먹는 건 교섭이 아니라 지배였다.
마법의 힘으로 억누르는 것!
[느부캇네살은 죽음의 신이 되려고 했던 대마법사였습니다. 비록 사악하고 비열한 자에게 당해 패배했지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무거운 생명의 짐을 덜어주려고 했던 그 뜻만큼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
[…….]
태현과 카르바노그는 메시지창에 떨떠름해했다.
느부캇네살 관련 메시지창이라고 너무 편파적인 거 아냐?
살아 있는 것들을 모두 죽여서 자기 밑으로 부리려고 했던 걸 저렇게 포장해 주다니!
‘아키서스도 저렇게 좀 포장해 주면 좋겠군.’
대륙의 영혼들을 마음대로 부리려던 신들과 악마들을 다 같이 몰아내고 평화로운 영혼들의 땅으로 남긴 아키서스의 갸륵한 마음을….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야….’
둘이 떠드는 사이 메시지창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느부캇네살의 힘을 이어받은 당신은 그의 후계자로서 근처 언데드들에게 이성과 의지를 부여합니다.]
[완전한 느부캇네살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언데드들을 굴복시키고 군림할 수 있었지만, 당신은 언데드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느부캇네살은 오로지 군림하려고만 했기에 그를 도와줄 부하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언데드들을 설득해야 하기에 더 나은 부하들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느부캇네살의 뜻을 이어가십시오!]
‘느부캇네살의 뜻을 이어가라는 건 대륙의 모든 놈 다 죽이란 거 아냐?’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그게 뭔 미친 토끼 짓거리냐고 말합니다.]
<느부캇네살을 이어서-전설 등급 퀘스트>
느부캇네살은 소멸했지만 죽음의 신에 등극하려던 그 뜻은 사라지지 않았다.
느부캇네살의 힘의 조각을 이어받은 당신.
느부캇네살과는 달리 언데드들을 설득하고 포섭해야 하지만 그건 오히려 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느부캇네살과는 다른 죽음의 신이 되어서 대륙을 죽음으로 뒤덮어라!
‘절대 깨지 말아야 할 퀘스트군.’
안 그래도 지금 대륙의 공적이 될까 말까 한 아슬아슬한 신분인데 이걸 하면 진짜 확실하게 공적이 된다!
그리고 퀘스트 내용도 매우 수상쩍었다.
느부캇네살처럼 보는 순간 언데드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이 훨씬 좋지, 언데드들을 일일이 대화하고 설득해야 하는 게 뭐가 좋다는 것인가.
심지어 더 어이없는 건 근처 언데드들에게 이성과 의지를 주는 게 패시브 스킬이라는 점이었다.
태현이 선택할 수도 없다!
무조건 근처 언데드들을 더 똑똑하고 영리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일반 몬스터를 정예나 보스 몬스터로 만들어주는 꼴이었다.
만약 설득과 포섭이 실패하면?
그냥 적에게 버프 걸어준 셈이었다.
뭐 이런 개 같은…!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기분인데.’
머리가 있다면 명백히 더 안 좋은 조건인데도 좋다고 사기를 치는 이 퀘스트는….
‘아키서스 교단 수법이잖아!’
아키서스 교단이랑 똑같은 수법!
세상에 교단 놈들은 다 저렇게 약을 판단 말인가?
그냥 ‘안 좋은 조건이지만 어쩔 수 없지! 힘내라!’라고 하면 될 걸 ‘이건 더 좋을 수도 있어~’라고 하니 괜히 더 얄미웠다.
[카르바노그가 신의 체면을 이해해달라고 말합니다.]
‘너무 많이 당해서 이해해 주기 싫어.’
“태현 님.”
뒤에서 이다비가 말을 걸었다.
“?”
“저한테 퀘스트가 떴는데….”
“!”
이다비도 일단은 느부캇네살 레이드 이후 새로 받은 직업이었다.
“느부캇네살의 뜻을 이어받아서 언데드들을 다 매수하라는데 대체 이게 무슨 퀘스트죠?”
“…나도 그걸 고민하고 있었어.”
* * *
사실 지금 직업이 가장 많이 변한 건 이다비였다.
<아키서스 교단의 황금죽음상인사제>!
누구한테 말하면 ‘그딴 직업이 어딨음 ㅡㅡ’ 같은 대답을 듣기 딱 좋은 직업이었다.
케인도 나름 직업 변화가 심했던 케이스였지만, 사실 아키서스의 노예나 케인의 예전 직업이나 하는 일은 비슷했다.
우직한 탱커!
그에 비해 이다비는 워낙 추가된 역할이 많았다.
일단 사제답게 각종 힐 스킬과 버프 스킬이 추가됐다.
골드를 소모해야 했지만.
<아키서스의 황금 치유>나 <아키서스의 황금 축복> 같은 스킬들은 다른 사제 직업들이 알면 놀랄 정도로 효과가 강력한 힐/버프 스킬들이었다.
골드를 소모해야 했지만.
거기에 원래 상인이었기에 상인 직업 스킬들도 있었다.
거래하면서 이득을 보는 스킬, 제한 무게를 올리는 스킬 등 각종 비전투 스킬들은 앞에 <아키서스>가 붙으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일정 확률로 추가 보너스와 여러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더 낮은 확률로 페널티가 나오긴 했지만.
그리고 <녹인 황금의 저주>는 <아키서스의 녹인 황금의 저주>로 변했다.
자신의 발도 묶이지만 상대의 발도 확실하게 묶는 강력한 디버프 스킬이 한층 더 진화한 것이다.
거기에 죽음의 신 특성도 있어 각종 저주 공격도 충실해졌다.
<아키서스의 죽음 저주>나 <아키서스의 정신 파괴> 등등.
물론 이것도 골드를 소모했다.
종합적으로 보면 <아키서스 교단의 황금죽음상인사제>는 매우 강력한 직업이었다.
골드 소모만 감당한다면 온갖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 가능한 만능 직업!
만약 김태산 같은 현질에 가차 없는 아저씨나, 유지수가 이 직업을 잡았다면 정말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다비는 스킬 한 번 쓸 때마다 부들부들 떨면서 쓰는 사람.
유명해지고 랭커가 되어서 수입이 많아져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무X마 대신 안성X면을 사 먹는 사람!
어떻게 보면 직업과 정말 안 맞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다비의 스킬 중, 대(對) 언데드 스킬이 있었다.
신성력으로 언데드를 정화하는 턴 언데드…는 아니고, <아키서스의 언데드 매수>였다.
골드를 소모해서 언데드를 고용하는 미친 스킬!
잡으면 잡았지 이걸 왜 쓰나 했더니 직업 퀘스트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언데드들과 함께 손을 잡고 죽음으로 뒤덮인 세상을 만들자!
“개소리죠?”
“개소리네.”
태현과 이다비는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그냥 느부캇네살 관련 퀘스트는 전부 무시하자!
-아니…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내, 내가 왜 여기에?
그러는 동안 데스 나이트들은 혼란에 빠져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괜히 대화를 나눌 필요 없지. 그대로 쓸어버려야….’
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무기를 들었다.
신성 영역이 깔린 데다가 각종 버프까지 받은 상태.
상대가 데스 나이트라지만 태현은 충분히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전력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필요할 때의 이야기다. 지금 굳이 언데드들을 일일이 설득할 수는 없어. 언데드라서 다른 네크로맨서한테 언제 뺏길지 모르는 데다가 교단 영웅들까지 하늘성에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득보다 실이 크다!
태현은 빠르게 계산을 끝내고 쓸어버리려 했다.
-나는… 분명히 폐하를 모시던 기사였는데…!
-아앗… 그랬다! 난 오스턴 왕가를 섬기던 기사였다!
-그렇군! 나도 그랬던 거 같다!
‘…뭐 오스턴 왕가는 이제 없으니까 상관없겠지.’
더욱더 올라가는 검!
-나는 아탈리 왕국의 기사였던 거 같군!
-자네도 그랬나… 아무래도 나도 그런 것 같네!
“?!”
아탈리 왕국 기사도 있냐?!
자기들끼리 떠들던 데스 나이트는 고개를 돌리더니 태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침입자들은 누구지? 살아 있는 자들 같은데 죽여야 하지 않나?
-아니… 하지만 우리는 원래 명예로운 기사들 아니었나! 아무리 죽음이 우리를 더럽힌다 할지라도 명예롭지 않은 짓을 할 수는 없네!
-이런 광산에 몰래 내려오는 사람은 보통 천박한 도둑 아닌가 싶네만….
-아니야. 저 사람을 보게. 가만히 있어도 신성력이 느껴지고 명예가 느껴지잖나.
-그렇군!
-잠, 잠깐. 저분은… 저분은 아탈리 왕국의 국왕이시다!
-폐… 폐하? 정말 폐하십니까?
태현은 들고 있던 검을 내려치지 못하고 움찔했다.
[카르바노그가 이미 벨 타이밍 놓쳤다고 말합니다.]
‘그냥 벨까?’
[불쌍한데 이야기라도 들어주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이야기 들어주는 순간 발목 묶일 거 같은 불길함!
-폐하! 으흑흑! 저희의 원통함을 들어 주십시오!
-폐하! 죄송합니다! 아탈리 왕가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깨뜨리다니!
아탈리 왕국 출신 기사들은 무릎을 꿇고 엉엉 울었다.
-그런데 폐하… 지금 폐하는 어느 분이십니까?
-혹시 비엘레 3세의 아드님 되시는지?
“…누구?”
태현은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에 당황했다. 태현 이전의 왕은 다미아노 2세였다.
뒤의 랭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한 몇백 년 전 왕 같은데? 예전 역사서에서 한 번 이름 본 거 같은 기분이….”
태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래전 영웅들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얼마 전에 제대로 체험한 태현!
‘저것들도 설마 나이 페널티를….’
[다 죽었는데 그런 게 어딨냐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어쨌든 예전 왕가랑 핏줄이 안 이어졌으니 굳이 충성 맹세 안 받아도 되겠….’
-시간이 지났어도 저희 충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저희의 충성을 받아주십시오!
태현이 교섭 시도도 안 했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교섭이 되어버리는 언데드들!
[교섭에 성공했습니다!]
[언데드들을 지휘할 수 있습니다.]
[악명이 올라갑니다.]
[언데드들을 재소환하거나 역소환시킬 수 없습니다.]
[언데드들이 불만도가 높아질 경우 반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언데드들이…]
[……]
보통 언데드 군대를 이끌고 다닌다는 건, 계속 MP를 소모하면서 언데드 소환을 유지한다는 걸 의미했다.
대신 언데드는 거의 절대적인 충성을 마법사에게 맹세!
그렇지만 이 방법은….
‘NPC 병사들이나 부하들 데리고 다니는 방식.’
MP 소모 없고 관리 못하면 반란 일으키고, 딱 그 방식이었다.
‘차라리 낫긴 하지만….’
지속적인 MP 소모는 절대량이 부족한 태현에게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태현의 마법 스킬 수준은 레벨 낮은 주제에 쓸데없이 높아서, 레벨 높은 소환수들만 나왔다.
그래서 태현도 몇몇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대규모 소환을 유지하진 않았다.
분명 태현에게 좋은 방법이긴 했지만….
‘…애초에 부하를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있는 부하들도 충분한데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들이 자꾸 밑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계산 밖의 요소가 생기니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앞으로 만나는 언데드 놈들도 저럴 거라고 생각하니….
[<아탈리 왕국의 데스나이트> 부대가 자동으로 완성됩니다.]
[이들은 당신을 충성스럽게 따를 것입니다.]
[정예 구울 병사들이 데스나이트의 설득에 따라 부대에 들어갑니다.]
[휘하 NPC들의 숫자가 늘어납니다. 전술 스킬의 한계를 넘을 경우 페널티가 붙습니다.]
[언데드들끼리 싸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악명이 올라갑니다.]
척척척-
-폐하! 저희의 검을 받아주십시오!
-폐하! 저희는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그래. 별로 안 고맙다.”
-폐하! 폐하께서 감사의 말을 해주시니 저희의 멈춘 심장이 다시 뛰는 듯합니다!
“너희는 귀도 죽었냐?”
그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오스턴 왕국 출신 데스 나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혹시 지금 오스턴 왕국을 통치하시는 왕은 누구십니까?
“…어. 너희 국왕… 쫓겨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