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958화
-걱정 마. 별로 어려운 거 아니니까.
이어지는 태현의 말에 랭커들은 안심했다.
아, 우리가 뭔가 오해했나 보다!
김태현이 제대로 설명하려나 봐!
-푸르네우스랑 직접 싸울 필요 없이 시선만 끌면 돼. 무슨 소리인지 알겠지? 직접 싸우지 말고 살짝살짝 화만 돋우란 거야.
-…???
-아니 별로 쉬워진 게 없잖아?
저렇게 입을 열길래 ‘아 뭔가 우리가 오해했나 보다, 사실은 쉬운 일인가?’ 했었는데….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태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어? 쉽지 않나? 아니… 잡으란 것도 아니고 그냥 어그로만 끌면서 시간 끌라는 건데?
태현 기준에서는 충분히 쉬운 일!
랭커들이 단체로 저렇게 반응하자 오히려 태현이 당황스러워했다.
-으음. 너희들이 그것도 못 할 줄이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할 수 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물론!
“야 미쳤냐?!”
“생각 안 하고 말하냐?!”
랭커들은 귓속말을 멈추고 방금 말한 놈의 멱살을 붙잡았다.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하, 하지만… 김태현이 저렇게 무시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냐고…!”
“맞아! 쟤 진짜 우리 무시하고 있었다고!”
랭커들 중에 자존심 없는 랭커는 없었다.
케인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그런 랭커들 입장에서는 태현이 ‘어? 너희 진짜 이거 못해? 와…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같은 반응을 보이자 환장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도발이나 유도가 아닌 진심 100%의 반응이라니.
굴욕 중의 굴욕!
-아냐! 할 수 있다고!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은 알지만….”
“어쩌냐?”
“지금 다시 김태현한테 못하겠다고 말해.”
“싫… 싫어. 그 말을 어떻게 한다고. 너희들이 하던가.”
“우리가 말 안 했는데 왜 우리가 해야 하는데!”
“그럼 너희는 할 자신 있다 이거야?”
“…그건 아니지만….”
랭커들이 침묵하는 사이 태현은 귓속말을 마저 했다.
-역시 할 수 있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그러면 시간 좀 끌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할 테니까.
“…….”
“…야. 주사위 굴리자.”
“설, 설마….”
랭커 중 눈치 빠른 랭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닫고 경악했다.
일명 ‘산 제물 뽑기’!
판온의 수많은 파티들이 던전과 사냥터에 들어가지만, 모두가 자기 수준에 맞는 곳에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당연히 잘못 파악하거나 실수로 더 높은 등급의 던전에 들어가는 파티들도 많았다.
그걸 늦게 깨달으면 당연히 전멸이었지만, 좀 일찍 깨달으면?
어떻게든 파티는 머리를 맞대고 빠져나갈 방법을 짜내기 마련.
그때 쓰는 방법이 바로 이 산 제물 뽑기였다.
산 제물로 뽑힌 놈이 던전 안의 어그로 다 끄는 사이 나머지는 튄다!
단순무식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미해결 던전 공략 파티 같은 플레이어도 쓸 정도로.
“…와. 내가 이걸 할 줄이야.”
“위험한 곳에는 가지도 않았는데….”
“세계수 근처에 간 것부터가 잘못이었지.”
랭커들의 중얼거림이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싸늘한 공기가 맴도는 푸르네우스의 영역이라 그런지 더더욱 춥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도적 직업이 유리하지 않을까?”
“개수작 부리지 맙시다.”
“맞아. 그렇게 따지면 다 유리할 이유 만들 수 있지. 넌 생긴 게 못생겼으니까 악마 공작 유인하기 좋을 거 같아.”
“뭐… 뭐?! 말 다 했냐?!”
“아. 시끄럽고 주사위나 굴려. 이러다가 푸르네우스 가까이 오면 주사위도 못 굴린다.”
랭커들은 울적한 마음으로 주사위를 준비했다.
제발!
나만 아니면…!
“헉헉… 도와주러 왔다!”
“후후. 우리의 도움이 필요했겠지?”
“????”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랭커들은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급히 달려온 것 같은 파티 몇 개. 그리고 거기 파티장들이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고 있었다.
“요한손! 오랜만이야!”
“수아나. 길드 동맹에 있을 때 한 번 봤었는데….”
“케쉔! 한 번 안아보자, 친구야!”
“…….”
‘이 새끼들 뭐야?’
‘이렇게 친하게 굴 리가 없는데?’
당연히 랭커들은 경계부터 하고 봤다. 복장을 보아하니 제법 규모 되는 길드에서 나온 파티 같았다.
그런 길드는 뻔뻔하기가 0.1김태현 정도는 되는 놈들이었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며 뒤통수를 치는 놈들이었다.
괜히 대형 길드들이 ‘이득에 미친 새끼’들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랭커들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파티장들은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그래? 그렇게 쳐다보고.”
“…무슨 일로 왔냐?”
“무슨 일이냐니. 지금 대륙에서 마계 토벌 퀘스트 중이잖아? 같이 하려고 왔지.”
“…!!”
랭커들은 깨달았다.
이 자식들…!
‘퀘스트 끼어들려고 왔구나!’
퀘스트 끼어들기!
판온에서 어지간히 양심 없는 놈들 아니면 안 한다는 그 짓!
하지만 대형 길드들만큼 이걸 좋아하는 곳도 없었다.
파워 워리어 정도 말고는 말이다.
파워 워리어는 할 능력이 안 돼서지만….
남이 하는 퀘스트가 좋아 보이면 가서 끼어들고, 심하면 먼저 깨버려서 보상까지 뺏는 짓거리는 PK를 유도하는 판온의 비매너 중 하나였다.
그러나 언제나 주먹은 가까이 있는 법.
대형 길드들이 그런 걸 신경 썼으면 왜 욕을 먹었겠는가.
* * *
요새에 와서 골드 좀 내고 배가 불러지자 길드들은 슬슬 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계까지 왔으니 퀘스트를 하긴 해야 하는데….”
“에랑스 왕국 본대 올 때까지 버텨야 하지 않습니까? 밖의 난이도 보니까 미쳤던데. 이건 우리가 지원 없이 뭘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그냥 나가면….”
“나도 안다. 하지만 한 가지 할 수 있는 퀘스트가 있지.”
“혹, 혹시….”
“그래. 바로 그거다.”
“거인들이 시키는 요새 보수 퀘스트를 말하는 겁니까? <조잡한 장식품>을 보상으로 주는?”
“…누가 이 새끼 밖에 던지고 와라.”
“으아악! 길마님! 잘못했습니다!”
눈치 없는 길드원을 내보내고 길마는 다시 말을 이었다.
“김태현이 랭커들 데리고 한다는 퀘스트 있잖냐.”
“아, 그거…!”
“그게 있었죠!”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지만, 그들이 이렇게 급하게 온 이유는 김태현 때문이었다.
태현이 랭커들을 데리고 마계로 가니 ‘헉 얼마나 좋은 퀘스트길래’ 하고 따라온 것 아닌가.
“지금 그 많은 랭커들이 전부 다 방송 끄고 퀘스트를 하고 있다. 이게 무슨 소리겠냐?”
“퀘스트가… 정말 엄청나게 좋은 퀘스트…!”
“그래. 그 욕심 많은 랭커 놈들이 전부 다 동의한 거다. 방송으로 이득 좀 못 봐도, 퀘스트 경쟁자 줄이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한 거지!”
“그렇군요!”
길드원들은 모두 동의했다.
그 랭커들이 전부 다 방송을 끄고 퀘스트에 집중하고 있다?
이건 말이 안 됐다.
랭커 한 명 정도는 ‘야 이거 지금 나 혼자 방송하면 대박 아닌가?’ 하고 방송을 몰래 켜야 말이 됐다.
그런데도 방송을 안 켠다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정말 아무한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대박 퀘스트!
“하지만 어디로 간 지 모르잖습니까?”
“내가 누구냐? 너희들 길마 아니냐? 내가 다 찾아놨지. 거인 놈들을 설득하니까 다 말을 털어놓더라.”
“역시 길마님…! 화술 스킬 초급 9는 대단합니다!”
“내 컨트롤이 있다면 중급이나 마찬가지지.”
거인들한테 다가가서 은근슬쩍 ‘걔네 어디로 갔냐?’라고 물어보니, 거인들은 친절하게 ‘저기로 갔다!’라고 알려준 것이다.
대형 길드 <황금사자>.
에랑스 왕국에서 판온 2 초기부터 세력을 꾸준히 유지해 온 강호였지만, 이번 퀘스트에서 자칫하면 길드 주력을 다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대형 길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다가 판온의 대형 길드들이 쫙 갈려 나가고 세력 개편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김태현 코인만 보고 탔던 이들의 나비효과였다.
* * *
“저 자식들, 생각보다 끈질긴데요?”
“쉽게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후. 걱정 마라. 그럴 줄 알고 이렇게 온 거잖냐.”
파티장들은 수군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랭커들도 욕심 하나만큼은 판온에서 뒤처지지 않는 놈들.
대형 길드에서 퀘스트 끼어들기 하러 왔다고 해서 ‘아 예 그러십니까 같이 하시죠’라고 물러설 이들이 아니었다.
왜 대형 길드의 파티들이 이렇게 우르르 왔을까?
당연히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대형 길드의 이름값과 함께 여차하면 실력으로 밀고 들어갈 수 있다는 위협!
“…김태현 자리에 없지?”
“없네요. 다행이다.”
“다행히… 아니, 크흠. 김태현 있었어도 상관없었지. 있길 바랐는데 말이야.”
‘재수 없게 무슨 개소리야?’
‘오기 전까지 침 꼴깍꼴깍 삼키던 거 다 봤는데.’
길드 간부의 허세에 길드원들은 투덜거렸다.
랭커들이 대답하지 않자 각 길드에서 나온 파티장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할 거야? 설마 우리 도움을 안 받겠다는 거 아니지?”
“수아나. 실망이야. 네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맞아! 케쉔! 우리 사이가 그것밖에 안 됐어?”
뻔뻔한 목소리에 랭커들은 서로 한 번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환영한다, 친구들아!”
“너희들밖에 없다!”
“????”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길드원들이었다. 너무 시원스러운 환영이었던 것이다.
“뭐… 뭐야?”
“걱정 마. 거절할 수 없으니까 저렇게라도 해서 체면을 지키려는 거지. 저렇게 수락하면 적어도 랭커들이 허락해 줬다는 게 남잖아.”
“아. 그런 거군요.”
“근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진심 같은데?”
“저기 랭커 중 한 명이 감동해서 눈물 흘리는 것 같은데….”
“…에이, 설마.”
* * *
-침입자여… 여긴 악마 공작의 성이다! 네가 감히 어디에 발을 디뎠는지 아느냐!
-흥. 정령 놈! 여긴 아키서스의 화신이다. 네가 지금 누구한테 말 걸고 있는지 아느냐!
-힉!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한테 말 걸지 말아주십시오!
“…….”
태현은 포갈로와 냉기 정령의 대화를 듣고 침묵했다.
“아니….”
태현은 오해를 풀려고 냉기 정령한테 다가갔다.
악마들한테는 오해를 많이 사도 상관없었지만, 정령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앞으로 정령들의 힘을 빌릴 때를 대비해 친하게 지내고 싶다!
-으아아악! 안 돼! 아키서스당해 버린다! 정령계로 못 돌아가게 되어버려!
[냉기 정령이 공포에 정신을 잃습니다!]
빠른 탈출!
다른 붙잡힌 냉기 정령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공사나 하자.”
태현은 포기하고 명령을 바꿨다. 고블린들과 키메라들은 그야말로 열정적으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하 연합 고블린들의 의욕이 최고 상태입니다! 작업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지하 연합 고블린들이 <아키서스의 키메라>에게 추가 장비를 장착시켜줍니다! 작업에…]
[……]
뚝딱뚝딱-
공사 진행에 보너스밖에 없는 상황!
순식간에 성 지하에 부스터가 달아지고 옆에는 날개가 달렸으며 이동형 다리와 추진력 유지 장치가 붙기 시작했다.
-저… 화신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뭐 하는지 여쭤 봐도 됩니까? 그, 귀찮으시면 대답 안 해주셔도 됩니다만….
극도로 공손한 냉기 정령의 말!
정신을 차린 냉기 정령이 말을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힉! 죄송합니다! 말 안 해주셔도 됩니다!
“…아니, 좀 들어보라고. 난 해를 끼칠 생각이 없어. 난 악마들한테나 그러지 정령들한텐 친절하다고.”
-그… 그렇습니까?
정령은 긴가민가 한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여차하면 바로 기절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이 작업은 악마 공작의 성을 탈취할 작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