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953화
태현 일행이 마계에 온 파티들 중 가장 안정적으로 버티고 있긴 했다.
근처 종족들과 손을 잡고, 요새를 만들어서 근거지까지 꾸린 상태!
요새 안에는 각종 간이 시설들까지 있었으니 이 정도면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다른 파티들은 대장장이 같은 제작 직업을 데리고 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랭커 대장장이는 귀하디귀한 인재. 그런 인재를 어떻게 마계 선봉대에 넣겠는가.
아무도 넣지 않을뿐더러, 본인이 거절할 것이다.
-나보고 마계에 가라고? 미쳤나 길마? 길드 나가라는 건가??
…란 대답이 돌아올 게 분명!
“근데 그건 우리라서 그런 거고 다른 놈들은 아니잖아.”
태현 일행이 안정적으로 버티고 있긴 했지만, 여기가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기후 변화가 극심하고 심심하면 벼락치고 각종 흉악한 몬스터들에 쉐도우 엘프들까지 날뛰는 곳!
악마들은 적지만 다른 의미로 위험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태현 일행도 태현이 없었다면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시시때때로 덤벼드는 쉐도우 엘프들한테서 버텨야 했을 테니….
“그래도 대형 길드니까 무슨 계획이 있겠지?”
“하긴 그렇겠죠?”
태현 일행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대형 길드쯤 되면 다들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고 계산을 하게 마련인데, 설마 아무 계획 없이 마계에 왔겠어?
지금 다들 좀 헤매고 있긴 하지만 그건 마계가 너무 빡세서 그런 거고, 분명 다른 계획이 있겠지!
“설마 와서 우리한테 빌붙으려는 건 아니겠지?”
“하하하!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하겠어?”
모두 다 웃음을 터뜨렸다.
남의 길드나 파티가 만든 마을이나 요새에 공짜로 신세 지려는 건 양심이 없는 짓이었다.
그걸 허락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허락해 주면 호구나 마찬가지였다. 태현 일행도 허락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근처에 요새 지으려는 거 아닌가?”
“아! 그거겠다.”
“요새 그거 아무나 짓는 거 아닌데, 준비 다 해 가지고 왔나? 하긴 대형 길드라면 그 정도 준비는 했겠지.”
대형 길드들을 엄청나게 과대평가하는 그들!
사실 과대평가라기보다는 ‘상식적으로 당연한 거 아니야?’ 수준이었지만….
“앗. 잠깐만요. 생각해 보니까 뭔가 좀 이상해요.”
“?”
“대형 길드들이야 당연히 철저하게 준비했겠지만 저렇게 도중에 로그아웃을 많이 당했으면 분명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 거예요.”
“!”
“그러네?”
“그럴듯해. 아이템 갖고 있는 놈들이 여럿 사라졌을 테니까!”
물론 차질이 생길 계획 같은 건 없었지만….
“그렇다면 분명 부족한 게 있을 테니까….”
“…장사할 기회!”
“바로 그거예요!”
상대가 약해졌을 때 뜯어먹어라!
태현한테 배운 것들을 일행들은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 * *
“요새다! 김태현 파티가 만든 요새야!”
가장 먼저 태현 일행의 요새를 발견한 성기사이즈킹 길드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몇 날 며칠 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휴게소를 발견한 듯한 안도감!
저 멀리 빛나는 요새의 불빛이 그렇게 안도가 될 수 없었다.
저기까지만 가면…!
-손님 왔다. 손님 왔다.
“으헉?!”
“거인이다! 거인… 잠, 잠깐만. 저거 김태현이 데리고 다니는 거인 부족이지?”
“휴… 깜짝이야….”
갑자기 바위 뒤에서 나타난 거인 NPC에 기겁한 성기사들.
다행히 몇 번 본 기억이 있어 그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다.
만약 마계에서 거인 부족까지 적으로 만났다면 정말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손님. 이거 사라.
“???”
“이게 뭔…?”
조잡한 장식품:
내구력 5/5
쓸모없는 전리품들을 대충 이어 붙여 만든 것 같은 조잡한 장식품이다. 이걸 누가 살까?
“…이거 쟤네들이 만든 거냐?”
“그런 거 같지?”
성기사들은 수군거렸다. 아무리 봐도 퀄리티가 너무 구렸던 것이다.
거인들이 대충 굴러다니는 걸 주워서 만든 게 분명했다.
평소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조잡한 물건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안, 안 사면 어떻게 되나?”
-안 사면 안 사는 거다. 손님 바본가?
울컥!
거인들한테 바보 소리 듣는 건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안 사도 된다고? 안 산다고 공격하는 거 없지?”
-그런 거 없다. 그런 거 없다. 사기 싫으면 사지 마라.
“안 사도 된다는데? 사지 말자.”
“뭔가 이상한데? 사야 하는 거 아냐?”
“사지 말라는데 왜? 솔직히 저걸 돈 주고 사고 싶냐?”
-백 골드다. 백 골드.
“백… 백 골드?! 이런 양아치….”
“쉿쉿. 야. 여기서 싸우지 말자.”
아쉬운 사람들이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들은 그냥 참고 지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언제나 특이한 사람은 있는 법.
남들이 A를 고를 때 자기 혼자 B를 고르는 걸로 유명한 아키서스 성기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사볼래!”
“저걸 산다고!?”
“야, 정신 차려! 백 골드야!”
“아냐. 뭔가 있는 거 같아!”
“있긴 뭐가 있어! 후회와 절망?”
“호구 짓도 적당히 해야지! 너 아키서스 성기사로 전직할 때도 다들 말렸던 거 기억 안 나?”
“그래서 지금 대박 났잖아!”
“…그, 그렇긴 한데 그건….”
반박하기가 힘들다!
다른 성기사들이 당황하는 사이 아키서스 성기사 플레이어는 혼자 장식품을 샀다.
뭔가… 뭔가 있을 거야!
아키서스 성기사처럼!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 플레이어를 제외하고 장식품을 산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었다. 성기사이즈킹 파티는 거인들을 지나쳐 요새 정문으로 향했다.
-정지. 정지.
골렘에 탄 아키서스 포병대 드워프가 문을 막았다.
성기사들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김태현이 데리고 다니는 드워프들이다!”
“우리 <성기사이즈킹> 길드야! 김태현한테 말해줘! 우리 알고 있을걸?”
‘별로 좋은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반갑게 손을 흔드는 성기사들의 모습에, 드워프들이 수군거렸다.
-인간 놈들은 어떻게 저렇게 외설적인 이름을 달고 다니는 거지?
-하여간 인간 놈들은 저질스럽다니까.
“?!?!”
작게 말해도 다 들리는 마법!
그러는 사이 보고를 듣고 이다비가 나왔다. 요새 탑 위에 올라간 이다비를 본 성기사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다비 씨! 저희 기억하시죠!”
“그, 모라 시에서도 봤었고! 저희 성기사들!”
“아. 네. 기억나요.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요새에 들어가려고….”
“설마 아무 준비 없이 마계에 왔다가 다른 파티가 만든 요새에 들어오려는 생각은 아니시죠?”
“…….”
“…….”
“…물… 물론 아니죠!”
그제야 성기사들은 깨달았다.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아무 대가 없이 요새를 내주는 호구는 세상에 없다는 걸!
‘아니 그걸 왜 모르고 있었지?’
‘마계에서 너무 정신이 없어서….’
‘길마님, 어떻게 할 거예요?’
‘흥. 그런 거 가지고 당황하기는. 잘 봐라.’
자신만만한 길마의 모습에, 길드원들은 살짝 기대했다.
뭔가 보여주려나 보다!
길마는 위풍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가더니….
넙죽 엎드렸다.
“이다비 님! 저희가 지금 마계에서 조난을 당해 다 죽게 생겼습니다! 이번 한 번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
-…….
-인간 성기사 놈들은 원래 다 저렇게 추잡한가?
드워프들의 중얼거림이 아프게 와닿았다.
이다비도 당황할 정도!
“아, 네. 들어오세요.”
“봤지? 절은 이렇게 하는 거야.”
길마는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성기사들은 어이가 없었다.
‘저걸 말이라고….’
‘야. 방송 껐지? 저거 방송 나가면 길드 망신이다.’
문으로 들어오는 성기사들.
문 옆에 있던 드워프가 손을 내밀었다.
-요새 이용료 내라. 추잡한 놈들아.
편견 가득한 말투!
그러나 안 낼 수는 없었다. 성기사들은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길마님.”
“왜?”
“혹시 깎아달라고 다시 절하면 안 됩니까?”
“…너 길드에서 쫓겨나가고 싶냐??”
우여곡절 끝에 요새 안에 들어온 성기사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해서 들어와야 하나?’ 싶었지만….
안으로 들어오자 ‘들어오길 잘했다!’로 생각이 바뀌었다.
마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안락함!
어찌나 안전한지, 미쳐 날뛰는 날씨도 이 요새는 피해 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와, 마계에 이런 요새를 어떻게 만들었지? 장난 아니었을 텐데.”
“기사들을 시켰을 거 같진 않은데… 저기 김태현 부하들이 한 건가?”
정답은 랭커들이 울면서 만든 것이었지만, 성기사들이 그것까지 맞출 수는 없었다.
“일단 나 대장장이부터 만나고 온다. 장비 수리부터 해야겠어.”
“아! 나도 같이 가자. 여기 대장장이 있었지!”
장비 수리 스크롤이나 수리 포션으로 어떻게든 버텼지만, 원래 대장장이한테 맡겨야 장비가 오래가는 법이었다.
마계에서 마을이고 대장장이 NPC고 못 만난 지 오래된 성기사들!
대장장이가 있다니 급히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어, 드워프다.”
“이런 요새에 드워프 대장장이라니 너무 호화로운 거 아니야?”
성기사들은 기뻐 죽으려고 했다.
드워프 대장장이라면 기본적으로 실력이 보장된 것이다.
게다가 태현을 따라다니는 NPC니 더 신뢰가 갔다.
뭔가 있겠지!
“안녕하십니까! 수리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안 된다.
“?!”
“뭐, 뭐야?”
“왜 안 됩니까?”
-너도 안 되고, 너도 안 되고… 넌 된다.
“????”
성기사들은 이해가 가지 않아 눈만 끔뻑거렸다.
왜 저 아키서스 성기사만 허락해 주는 거지?
“대체 이유가 뭡니까?!”
-요새에서 우리들의 힘을 빌리고 싶으면 <조잡한 장식품>을 갖고 있어야 한다.
“…….”
“…!!!”
성기사들은 경악했다.
설마… 설마…?
“그, 거인들이?”
-그래. 서비스 받고 싶으면 가서 사와라.
당했다!!
성기사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돈보다 거인들에게 속았다는 게 더 자존심이 상했다.
이게 무슨….
“하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야! 너만 받냐?!”
“그러게 아까 제가 사실 때 같이 사시지 그랬어요?”
“…기다려 이 자식아! 지금 사올 테니까!”
더럽게 비싸긴 했지만 백 골드면 못 낼 돈은 아니었다. 성기사들은 밖으로 우르르 달려나가 거인들을 찾았다.
“찾았다! 그 <조잡한 장식품> 하나 다오!”
-오. 손님. 보는 눈 있다. 이백 골드다.
“…잠깐만. 백 골드 아니었어?”
-시간 지나서 물건 줄어들면 가격 오른다. 장사의 법칙이다. 손님 장사 모른다. 쯧쯧.
거인이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차자 성기사들은 뒷목을 잡았다.
이… 이 양아치 거인들이…!?
“안 ㅅ…!”
“잠깐, 잠깐!”
“왜?! 저걸 산다고?!”
“만약 안 산다고 했다가 나중에 다시 사게 되면 저거 가격이 또 2배가 될 수도 있다고!”
“!!!”
“…그냥 사자.”
* * *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요새에 자리를 잡은 성기사이즈킹 길드였지만, 이 길드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요새 이용료로 그만큼이나 내라고?! 우리가 누군지 알아?
-흠. 대포 조준할 테니까 다시 한번 말해봐.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르셔도 됩니다.
길드 명성으로 어떻게 해보려다가 조용히 찌그러진 길드들도 있었고.
-지금 힘으로 밀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적당히 타협하시죠.
-아. 네. <길드 동맹>도 그 소리 하다가 길드 쪼개졌던데 한 번 해보시죠. 혹시 성함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태현한테는 제발 말하지 말아주시길….
힘으로 협박하려다가 깨갱하고 물러선 길드들도 있었다.
그런 길드들의 결말은 비슷했다.
-흥, 지들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위치만 괜찮으면 요새 같은 건 우리도 금방 세워! 근처에 요새 세운다!
파지직, 파지지지직!
번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