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945화
“쉐도우 엘프 감시 요새인가.”
“탱커들이 진입해서 시선을 끈 다음 딜러들이 뒤에서 들어가 포위하는 방법이겠지?”
“아니. 땅 파서 들어간다. 화장실 쪽이 침입하기 좋으니까 화장실 쪽으로 파.”
“…….”
“…….”
랭커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뭐 저런 더러운 방법이 다 있냐?
“우우! 꼭 그런 방법을 써야 하나?”
“방송도 이제 다시 킬 건데!”
잡일도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냥을 할 거 같자, 랭커들은 잔뜩 기대한 상태였다.
태현의 이름을 빌려 명성을 알릴 기회!
한동안 방송을 안 해서 잊혀졌다?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김태현>, <마계>, <선봉대> 이 3개 키워드가 제목에 들어가는 순간 전 세계 방송 순위 20위, 아니 10위 권 안에 든다!
이 장밋빛 미래에 모두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싸움!
쉐도우 엘프 화장실에서 땅 파고 나오는 모습을 생중계하고 싶진 않았다.
시청자 숫자는 어마어마하게 모을 수 있긴 하겠지만….
그걸 위해 존엄성과 이런저런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
“흠. 그럼 내가 케인과 같이 했던 것처럼 해볼래?”
“오. 그런 방법이….”
“좋지! 나 요한손이 케인이 한 걸 못 할 리가 있나!”
케인에게 경쟁의식 넘치는 요한손이 호기롭게 외쳤다.
그걸 들은 수아나가 기겁해서 외쳤다.
“바보 같기는… 조용히 해!”
“왜 그러지? 내가 못할 거 같나?”
“자폭시키려는 거잖아!”
“…….”
“…….”
“…….”
갑자기 싸늘해지는 분위기!
랭커 중 한 명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못 믿겠다는 듯이 물었다.
“거짓말이지? 다른 거 말하는 거지?”
“아니. 맞는데.”
“…화장실에 침입하고 싶습니다!”
“제 취미가 땅 파는 거였습니다!”
랭커들 중 개인방송 시작 버튼에 손 가져다댔던 플레이어들은 손을 뗐다.
도저히 방송으로는 못 보여주겠다!
* * *
“대체 이유가 뭐지? 왜 랭커들이 방송을 안 하는 거지?”
“김태현이 퀘스트 정보 새어나갈까 봐 통제하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길드에서나 먹히는 거지, 자기 길드 소속도 아닌 외부 랭커한테 방송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어떻게 통해?”
“김태현이니까 협박한 거 아닐까요? 방송 키다 걸리면 게임 접을 때까지 죽인다고 하거나….”
“…그럴듯한데?”
설득력 100%의 가설!
태현 따라온 랭커들이 마계 도착했다는 방송만 틀고 나서 그 이후부터 틀지 않으니, 사람들의 궁금증은 몇 배로 커졌다.
대체 왜 방송을 안 하는 걸까?
“김태현… 무서운 놈! 아무리 그래도 랭커들인데 그런 놈들을 통제하다니.”
“김태현이 괜히 김태현이겠습니까?”
[마계에 처음으로 발을…]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태현 일행이 선봉대에 서는 걸 보고 ‘김태현이 가는 걸 보니 뭔가 있겠지!’ 하고 급하게 뛰어든 후발주자들.
그 파티들이 차례대로 세계수를 타고 마계에 도착했다.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레벨업을 할 정도의 보상!
과연 악마들의 땅, 마계였다.
“바로 주변 지형을 확인한 다음 확보한 지도와 비교해서 김태현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지도가 너무 오래되고 틀린 곳이 많아 참고가 불가능합니다. 추가 보너스를 얻는 데에 실패합니다.]
[상인에게 속았습니다. 명성이 하락합니다.]
“…….”
마계에 관한 정보는 대륙에서도 희귀했다.
당연히 지도가 멀쩡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고….
대부분의 파티들은 오자마자 사기당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런 개 같은…!”
“상도덕도 없는 놈들!”
이를 갈았지만 지금 마계에서 돌아갈 수는 없는 법.
파티들은 태현 일행의 정보를 비교해 보고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깨닫게 되었다.
마계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것을!
태현이니까 마계를 휘젓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거였지, 아직 플레이어들이 태현을 따라하긴 무리였다.
까놓고 말해서 <아키서스의 화신>이니까 돌아온 거지 다른 직업들이라면….
-하!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쥐새끼 같은 인간들의 영혼 냄새다!
[굉음의 악마, 카네닌이 당신들의 영혼을 맡고 달려듭니다!]
“악마다! 전투 준비!”
대형 길드에서 온 파티답게, 준비는 덜 됐어도 강력한 저력을 보여줬다.
바로 신성 버프 걸린 무기를 꺼낸 다음 진형을 잡고 악마를 집중적으로 포격하기 시작!
[광음의 악마, 카네닌의 지옥 마력이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킵니다!]
[<지옥의 함성> 스킬을 사용합니다!]
[모든 신성력이 일시적으로 소멸합니다!]
신성력이 아니면 데미지가 거의 들어가지도 않는데 전부 다 막아버리는 사기적인 영역 스킬!
순식간에 전차처럼 돌진해 파티를 박살 내버린 다음 디버프를 걸어 하나씩 사냥하는 악마의 위엄에 플레이어들은 전율했다.
마계에 간 탐험가 플레이어들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숨어 다녔고, 악마들에게서 자신을 숨길 방법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형 길드들은 악마의 능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대륙에 소환되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 능력!
운이 나빠 최상급 악마들을 만난 파티들은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판온에서도 보기 드문 고렙 이상 파티들의 연속 전멸 현상!
고렙 파티들이 최소한 귀환할 방법을 갖고 도전한다는 점을 봤을 때 정말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 결과에 방송을 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경악했다.
-저렇게 쉽게 죽는다고?
-안 돼! 일어나! 시겔!
-무슨 종잇장 찢듯이 찢어버리는데??
-장르가 공포영화인가요?
-아직 마계 갈 수준 아닌 거 아님?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마계에 온 파티들이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파티들이 악마들한테 아작 나는 걸 본 파티들은 기겁해서 방향을 바꿨다.
“숨어! 숨어!”
“김태현 파티에 들어간 랭커한테 귓말 보내봐! 어떻게든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러다가 다 죽게 생겼어!”
* * *
쉐도우 엘프 요새 세 군데를 털어먹고 순찰대들을 보이는 족족 박살 내자, 쉐도우 엘프들도 다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반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태현 일행의 요새를 습격하는 건 물론이고 순찰대의 숫자가 대폭 늘었다.
“이거 너무 빡센데?”
“징글징글한 엘프 놈들 같으니.”
랭커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난이도!
순찰대 하나를 건드리면 바로 호각을 불어댔고, 그러면 주변 순찰대 여럿이 덤벼들었다.
태현 일행도 아슬아슬했을 때가 몇 번 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
“안 되겠다. 한동안 수비만 하자.”
‘이대로면 영역 장악이 힘들 정도겠는데.’
태현 혼자 살아남고 나머지 일행이 다 박살 나면 의미가 없었다.
그런 싸움은 피하는 게 답!
버려진 땅을 점령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태현은 욕심부리다가 망하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포기해야 할 때는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
“수비하면서 상황을 보다가… 지원이 오면 합류하고, 지원이 너무 안 오면 아예 후퇴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어.”
평소라면 ‘우릴 뭘로 보고! 우린 랭커다!’라고 했을 랭커들도 잠잠했다.
방금 순찰대 여섯에게 둘러싸여서 미친 혈투를 벌였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이다비가 각종 버프를 걸어주고 태현이 권능 쓰지 않았다면 랭커들 절반이 날아갔을 정도의 혈투!
쉭-
“!”
“공격이다!”
소리만 듣고도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태현은 이다비와 정수혁을 잡고 자세를 낮췄다. 이런 공격에는 둘이 가장 위험했으니까.
케인은 4왕자 옆에서 방패를 여럿 들어 올리며 철벽 방비를 시작했다.
팔 6개는 폼으로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최상윤은 검으로 화살을 쳐낼 준비를 했다.
그리고 유지수는 옆에 있던 수아나의 발을 걸어 방패로 삼았다.
‘훌륭하군!’
태현은 그 수법에 감탄했다.
많이 컸구나, 유지수!
“야! 너!”
“네? 뭐가요?”
“발 걸었잖아!”
“무슨 소리세요? 피하다가 발이 걸리신 게 아니라요?”
“크으으읏…!”
“잠깐, 왜 공격이 안 날아오지?”
랭커들이 당황하는 사이 태현이 상황을 알아차렸다.
“공격이 아니라 메시지군.”
화살 끝에 편지가 묶여 있었다. 쉐도우 엘프가 보낸 편지가 분명했다.
“엘프어? 나 엘프어 스킬 있어!”
“엘프어가 아니라 악마들이 쓰는 문자 같은데. 읽을 줄 아는 사람?”
엘프 문자면 모를까, 악마들이 쓰는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판온에서 한 번 만나기도 힘든 게 악마인데 악마 문자를 어디서 배우겠는가.
[카르바노그가 번쩍 손을 듭니다!]
‘그, 그래.’
하지만 태현에게는 카르바노그가 있었다. 악마 문자든 누구 문자든 팍팍 해석해 줄 수 있는 현명한 토끼 신!
‘뭐라고 쓰여 있어?’
[침입자 놈. 네 능력을 인정한다. 대화하고 싶으니 혼자서 번개 치는 언덕으로 와라! 라고 적혀 있다고 말해줍니다.]
‘단지 그거뿐?’
[카르바노그가 그거 외에는 안 적혀 있다고 말합니다.]
‘흠. 매우 수상한데.’
[카르바노그가 나가지 말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안 나갈 순 없지.’
-주인이여….
“그냥 넘기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다고. 뭐라도 얻을 수 있다면 나가봐야지. 혹시 협상이 가능하면 횡재하는 거고.”
판온에서 협상 불가능한 존재는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가능성은 0%가 아니었던 것이다.
독보적인 화술 스킬을 가진 태현이야말로 산증인!
‘솔직히 나 혼자면 빠져나가기도 쉽고.’
근거 있는 자신감!
쉐도우 엘프가 어떤 함정을 파고 있다 하더라도 태현은 거기서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다.
[카르바노그가 걱정합니다. 쉐도우 엘프들이 악마들을 불렀으면 어쩌냐고 말합니다.]
‘…그건 좀 무섭지만, 쉐도우 엘프들은 악마들도 사냥하는 놈들이니까 그건 아닐 거야.’
태현은 확신이 있었다.
보통 저렇게 외골수에 융통성 없는 종족들은 타협을 하지 않았다.
악마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하는 종족들이 설마 악마를 부를까!
“내 말이 맞지?”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화신님의 말씀이 맞습니다요!
-흥. 내가 네 말에 대답해 줄 것 같은가! 하지만 쉐도우 엘프는 악마와 타협할 놈들이 아니다!
악마들도 줄줄이 태현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크큭… 아키서스의 화신 놈. 쉐도우 엘프를 싹 쓸어버려라.’
‘마계에는 아키서스에게 원한을 가진 악마들이 수두룩하지! 화신 놈이 쉐도우 엘프를 쓸어버리고, 소문을 듣고 몰려온 악마들이 화신을 처리해 주면… 이 버려진 땅은 우리 손아귀에 들어오겠지!’
쉐도우 엘프와 태현이 같이 죽어주기를 바라는 악마들!
그들의 얄팍한 속셈이 태현에게 느껴지지 않을 리 없었다.
“드워프들. 한 번 뽑아버려.”
-크아아아아악!
-우아아아아앙!
악마들의 비명!
* * *
“아무리 김태현이라지만 이건 너무 과감한 거 아니야?”
“이번은 좀 실수 같군.”
불안해하며 지켜보고 있는 랭커들.
그 모습에 케인은 그들의 어깨를 퍽 치고 지나갔다.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다른 놈이 태현을 욕하면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당해보지도 않은 놈들이 뭘 안다고 그러는 건데!
랭커들은 당황했지만 의외로 분노를 조절했다.
케인이 누군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놈 대체 누구지?”
“4왕자가 NPC도 얼마 안 데리고 왔는데 호위기사로 데리고 온 거 보니까 분명 대단한 NPC가 분명해.”
4왕자를 따라다니는 정체불명의 호위기사!
랭커들 사이에서는 ‘4왕자가 숨겨놓은 히든 카드’나 ‘에랑스 왕국의 검술 마스터 중 하나 아님?’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추측이었지만 케인의 겉모습은 그런 추측이 오갈 만한 값어치를 했다.
얼굴을 가린 흑기사!
게다가 팔이 여섯 개!
대체 뭐하는 NPC일까?!
답이 나오지 않을수록 상상력이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