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940화
‘그래도 뭐… 레벨은 높을 테니까 인간 폭탄으로 쓰기 좋겠지….’
태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랭커들이란 족속들은 실력은 없어도 레벨은 높으니 어떻게든 쓸모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렇게 시끄러워도 좀 참아줄 만했다. 태현은 두 랭커를 보며 싱긋 웃었다.
“저거 봐라. 김태현도 날 믿고 있잖나.”
“아니… 저 웃음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어?”
수아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요한손이 길드 동맹에서 한 반년만 굴러봤어야 저딴 개소리가 안 나오지!
“근데 너 말투가 왜 그러냐?”
“뭐… 뭐가.”
“방송에서는 좀 달랐던 것 같은데….”
요한손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분명 길드 동맹 광고에서 랭커들이 잠깐 나와서 인터뷰할 때 봤었는데….
그때는 훨씬 더 산뜻하고 청순한 이미지 아니었었나?
“그건 광고해야 하니까 그런 거지.”
“뭐? 사기였어?”
“사기라니. 원래 그 정도 포장은 당연한 거거든. 그러면 길드 동맹에 들어오면 모두가 다 똑같이 대접받는다는 것도 진짜겠니?”
“뭐!? 중국 쪽 길드라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
‘쟤네는 폭탄이다, 쟤네는 폭탄이다….’
태현은 속으로 생각을 반복했다. 폭탄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짜증 나지가 않았다.
-저기가 폐허다. 주인이여.
“그래. 보인다.”
태현은 폐허를 확인했다. 마계도 다 사람, 아니 악마 사는 곳이라 건물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악마 공작들의 취향에 맞게 도시도 있고 궁전도 있고….
그렇지만 여기는 아무 주인도 없는 중립지대. 멀쩡한 건물이 있을 리 없었다.
‘폐허에서 딱히 건질 건 없어 보이지만… 지하 던전이 있을 거 같지는 않고. 괜찮으면 요새 하나 더 짓지 뭐.’
폐허에 따라 거기 위에 요새를 새로 지을 수도 있었다.
과연 어떤 폐허일까?
“그런데 너희, 싸울 수는 있지?”
“나는 장비는 멀쩡해서 괜찮아.”
“크하하. 나도 장비가 없지만 싸울 수 있다.”
“그건 싸울 수 있는 게 아닌데… 어쨌든 알겠다.”
태현은 그렇게 말하고서 발을 내디뎠다.
[잊혀진 폐허를 발견했습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마계 토벌 퀘스트에 공적치 포인트가 생깁니다.]
[……]
[마계의 악마들이 당신을 눈치챌 확률이 올라갑니다.]
불길해!
태현은 입맛을 다셨지만 불길하다고 안 할 수는 없었다. 하나 할 때마다 저런다고 탐색을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오… 신전 건물 같은데.”
“야. 장비도 없으면 뒤로 좀 빠져.”
“흥! 이 요한손은 장비 없어도 악마 놈 목 정도는 부술 수 있다!”
“김태현. 이런 놈이랑 꼭 같이 움직여야 해?”
“그래도 파티원(폭탄) 없이 혼자 움직일 수는 없잖아.”
“그러면 더 많이 데려와야 하지 않나?”
“파티원(폭탄)은 두 명이면 충분하지 뭐.”
“?”
수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김태현이라 그런 건가?’
고수의 품격!
남들이 파티원 6, 7명 데리고 다녀도 불안해할 때 1, 2명만 데리고 다녀도 쿨하다!
‘아. 맞다! 방송 켜야지!’
길드 동맹이 망하고 아이템 날린 충격에 잊고 있었지만, 이런 기회에 방송을 안 할 수는 없었다.
“흠흠.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랜만에 뵙네요. 수아나에요.”
-!
-!!!
-!!!!!!
‘이세연보다 한 수 아래군.’
태현은 코웃음을 쳤다.
수아나는 나름 관리가 철저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세연에 비하면 한 수 아래!
“지금 제가 어디에 와있는지 다들 궁금해하시겠죠? 한동안 왜 연락이 끊겼는지.”
-세계수 코인 탔다가 망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시청자를 차단했습니다.]
“저는 바로 마계에 와 있습니다! 랭커 김태현, 랭커 요한손과 함께 말이죠.”
-뭐?!?!
-아니 어떻게 갑자기?
-무슨 사이인데?
-잠깐만, 길드 동맹 소속인데 김태현하고 같이 움직일 수 있나? 나 같으면 못할 것 같….
[시청자를 차단했습니다.]
-김태현 보여줘요!!! 김태현!!
-얼굴 치워봐!
“…….”
수아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견뎠다. 오랜만에 방송을 켰으니 이런 반응도 이해가 갔다.
-지금 뭐하고 있는지 궁금한데 설명 좀.
-맞아! 지금 뭐하고 있어!?
모두가 궁금해하는 퀘스트 진행 상황!
수아나는 자신만만하게 진행 상황을 말하려고….
하다가 멈췄다.
‘…잡일만 하고 있었는데.’
“…지금 마계의 숨겨진 비밀을 찾고 있었죠!”
-오오오!
-역시…!
-마계의 숨겨진 비밀이 뭐지?! 제발 좀만 더 말해줘!!
-대체 무슨 퀘스트를 깨고 있는 거야!
시청자들은 대폭발!
태현의 이름값에 다른 랭커들까지 있다고 말하자 모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퀘스트길래 최근 소식 없던 랭커들까지 다 저기 있는 걸까?!
* * *
“저… 저 배신자!!”
“길, 길마님!”
오스턴 왕가의 깃발을 들고 당당히 에랑스 왕국으로 나아가고 있던 길드 동맹.
쑤닝은 수아나의 방송을 보고 뒷목을 잡았다.
길드 나가고 연락 끊겼을 때는 뭐하나 했는데 설마 김태현한테 붙어?!
“절대 용서하지 않겠….”
“지금 수아나 욕할 때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지금 랭커들 중 몇 명이 더 김태현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
“김태현이 몰래 랭커들을 모을 정도라면 분명…!”
길드원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그럴 만한 퀘스트가 있기 때문인가!”
“맞습니다!”
김태현은 원래 혼자 독식을 즐겨 하는 플레이어.
그런 김태현이 NPC를 모으고 사람을 모을 때는 그럴 만한 대규모 퀘스트이기 때문이었다.
길드원들의 머릿속에 느부캇네살 퀘스트가 스치고 지나갔다.
사막을 꽉 채울 정도로 모인 플레이어들과, 느부캇네살의 군세와 우이포아틀의 습격.
‘그리고 시청률 대박!’
‘우리 영지전을 묻어버린 개 같은 퀘스트!’
‘한 달은 그 퀘스트 이야기만 하더라!’
“김태현이 서둘러서 마계의 선봉에 선 이유가 뭐겠습니까? 분명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전 길드원들에게 연락을 내려라! 최대한 빨리 에랑스 왕국으로 가 마계로 출발해야 한다!”
길드 동맹의 결정.
그리고 다른 대형 길드들도 비슷하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 김태현이 진짜 뭐 하고 있나 본데??
-어?? 다른 길드들이 달리는데??
-어??? 이러다가 우리만 늦겠는데???
아직 성기사단과 사제단은 모이지도 않았는데, 대형 길드들이 먼저 세계수로 떠나기 시작했다.
“길마님. 그래도 마계를 너무 얕보는 거 아닙니까? 마계 가서 무사히 돌아온 플레이어들이 손에 꼽히잖습니까. 이렇게 준비를 안 하면….”
“확실히 지금 준비가 너무 없긴 합니다.”
손꼽히는 탐험가 플레이어도 마계에 들어갈 때는 온갖 준비를 했다.
각종 축복을 받은 장비부터, 최대한 구한 마계의 지도. 소환한 악마한테 뜯어낸 현재 마계의 상황. 악마한테 바칠 뇌물 등등.
그래도 생존 확률이 10% 미만!
현재 판온의 미답지 중 가장 악명 높은 곳 중 하나가 마계였다.
그런데 이런 곳을 아무리 랭커라지만 수십 명 가까이 들어간다니.
너무 무모한 거 아닌가?
“하하. 그렇게 보이긴 하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뭡니까?”
“김태현한테 합류하면 되니까!”
“…?”
“오… 그런 방법이…!”
“김태현이 설마 쳐내진 않겠죠.”
“그랬다가는 사람도 아니다 정말.”
“쳐내면 얼굴에 철판 깔고 그냥 옆에 자리 잡으면 돼. 설마 PK라도 하겠어?”
“길마님. 김태현은 판온 1 때 광산에서 자기가 곡괭이질 하려던 광석 뺏겼다는 이유만으로 PK를 한 적이….”
“아, 그건 판온 1 때 이야기고! 언제 때 이야기를 하는 거냐? 김태현도 이미지 관리를 한다 이거야.”
“제가 김태현한테 당해봤….”
“아 그래서 그거 언제까지 물고 늘어질 건데!”
‘길마님이 8연속 PK를 당해봐야 그런 소리를 못 하실 텐데.’
길드원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잘 생각해 봐라. 남들한테 뻔뻔하다고 욕먹거나 비매너라고 욕을 먹을 수는 있겠지만, 그딴 건 어차피 몇 명만 시끄럽게 떠들고 끝날 거다. 중요한 건 퀘스트다. 김태현이 하는 퀘스트에 비비고 들어가는 거란 말이다. 그냥 옆에 버티고만 있어도 되는데 이게 날로 먹는 퀘스트지!”
대형 길드를 이끄는 길마는 폼이 아니었다. 길마의 판단은 정확했다.
옆에서 얼쩡거린다고 보통 공격하진 않았다. 막 나가는 길드가 아닌 이상 이미지 신경을 좀 썼던 것이다.
물론 태현은 그냥 때렸지만….
어쨌든 김태현 쪽에 합류해서 퀘스트를 경쟁한다는 계획은 매우 그럴듯했다.
‘근데 대체 뭔 퀘스트인데?’
‘진짜 대박 맞나? 구체적인 정보가 하나도 없으니….’
‘에이, 그래도 김태현이 아무 생각 없이 저랬겠어.’
…그 대박 퀘스트가 진짜 있다면 말이다.
* * *
[악마들의 문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다.]
[읽을 수 없습니다.]
“요한손?”
“크흠. 내가 언어에는 좀 약하다.”
“수아나?”
“내가 활만 쏘다 보니까 원시가 좀 있어서….”
“…….”
-…….
태현과 용용이가 두 랭커를 보는 눈빛이 변했다.
랭커(폭탄)→쓰레기(폭탄)!
[카르바노그가 자기 악마 문자 읽을 줄 안다고 말합니다.]
‘역시 카르바노그! 뭐라고 쓰여 있지?’
[아키서스 저주받아라!]
‘…카르바노그.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니?’
[아, 아니. 그렇게 쓰여 있다고 카르바노그가 당황해서 말합니다.]
‘…진짜지?’
[진짜라고 말합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폐허에 아키서스 욕이 쓰여 있는 건 좀 안 믿기는데. 뭐지?’
우연의 일치도 정도가 있지, 마계의 중립지대에서 발견한 폐허에 태현, 아니 아키서스 욕이 쓰여 있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물론 악마들 중 나이 많은 악마들은 ‘아키서스에게 잡혀갈 놈’, ‘아키서스에게 호구 잡힐 놈’ 같은 욕을 쓴다지만….
[‘아키서스 저주받아라’, ‘아키서스 놈이 다시 마계에 발을 디딘다면 놈의 최후가 될 것’, ‘이 신전에 저주 있으라’ 등등 쓰여 있다고 합니다.]
“…?!”
태현은 카르바노그의 말을 듣다가 깨달았다.
그렇다는 건 여기가….
‘아키서스 신전이었다고?!’
세계수가 보내주는 곳은 기본적으로 고정이 되어 있지 않았다. 마계는 마계지만 어느 정도 랜덤인 것이다.
아키서스의 화신인 태현이 신전과 가까운 곳에 떨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마계에 아키서스 신전이 있는 건 매우 이상한 일이지.’
[카르바노그도 동감합니다.]
악마들이 저렇게 질색해서 부숴놓고 저주의 글씨까지 놓고 간 게 이해가 갔다.
나 같아도 그랬겠다!
“일단 잔해들 좀 치워야겠군.”
“음. 그래야겠지.”
“맞아. 그래야 할 거 같네.”
“뭐해? 둘 다. 움직여.”
“…….”
태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두 랭커는 깨달았다.
아…!
지금은 우리가 잡일꾼이었지…!
* * *
전사는 힘이 좋고 궁수는 재빨랐다.
즉 이런 잡일을 할 때 궁합이 잘 맞는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
“김태현 죽어, 김태현 죽어.”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 같군.”
요한손은 삐졌는지 대답을 안 하고, 수아나는 투덜거렸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잡일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잊혀진 폐허에 숨겨진 아키서스 신전의 잔해를 발견했습니다!]
[아키서스 신전의 지하실 입구를 발견했습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
[‘악마 절대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해줍니다.]
‘그렇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