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939화
주인 있는 곳은 보통 태현과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주변 확인한 다음 바로 요새부터 짓자.”
“예!”
태현이 이끄는 일행은 이런 면에서 유리했다.
태현 본인부터가 뛰어난 대장장이고, 따라온 NPC들 중에서도 대장장이 실력이 좋은 NPC들이 많다 보니 빠르게 요새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어디에 지으려고?”
“글쎄… 마계는 보통 그 층의 주인이 있는 곳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 대부분이니까… 그냥 지형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곳이면 좋을 텐데.”
풍수지리!
판온에도 풍수지리가 있었다.
언덕을 끼거나 절벽을 끼거나 강을 끼거나….
산맥 위의 동굴 같은 곳도 좋았지만 도망칠 곳이 없는 곳은 또 위험했다.
“가장 좋은 건 요새 안에 들어온 놈들이랑 같이 자폭할 수 있다고 협박할 수 있는 지형이지만 그건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건 풍수지리가 아니라 그냥 협박 아닌가요, 선배?”
“쉿. 태현이가 다 판온 1에서 했던 짓이야.”
“무슨 일을…?!”
“산사태하고 낙석 정도만 말해줄 수 있어. 당한 놈들은 아직 자기가 왜 당했는지 모르거든.”
태현은 용용이와 흑흑이를 풀어 주변을 정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주변 확인을 하기 좋은 둘!
이제 다들 레벨도 사백 넘게 회복된 상태라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 정도였다.
‘보스 몬스터한테 잘못 걸려도 도망은 칠 수 있겠지.’
-골골이. 너도 위에 타라. 혹시 모르니까.
-주인님. 저는 언데드입니다….
골골이는 매우 싫었지만 태현이 그런다고 봐줄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골골이는 흑흑이 위에 탔다.
-아, 냄새나는 언데드 놈.
-시끄럽다! 누군 타고 싶어서 타는 줄 아나!
-갑자기 사디크의 신성한 화염으로 몸을 뒤덮고 싶어지는데….
-하는 순간 날개 찌른다!
“둘 사이가 좋은 거 같아. 그렇지 용용아?”
-???
* * *
랭커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김태현! 우린 뭘 하면 되지!? 역시 가서 사냥인가?!”
신전 앞에 있을 때에는 ‘왜 내가 이 게임을 시작했지? 왜 내가 고통받는 거지? 왜 나만 운이 없는 거지?’ 하며 인생 망한 사람처럼 절망하던 랭커들.
태현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정신이 반쯤 돌아왔다.
빛나던 랭커 때의 모습으로!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번 퀘스트로 다시 부활하고 말겠다!’
‘나는 랭커다! 이런 곳에서 죽지 않아!’
모두 다 굳게 결심하고 눈빛을 반짝였다.
그들도 그들이 참여한 퀘스트가 무슨 퀘스트 정도인지는 알았다.
지금 모든 플레이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마계 토벌 퀘스트!
여기서 활약한다면…!
“음? 사냥은 나중에 하고….”
“그러면 뭐지?! 정찰?!”
“아니. 건설. 짐 날라.”
“…….”
“…….”
랭커들은 눈을 깜박였다.
잘못 들었겠지?
“내… 내가 기도를 하다가 세계수한테 청력도 좀 뺏겼나 봐. 잘못 들은 건가?”
“제대로 말했는데. 짐 나르라고.”
“김태현! 너무하지 않나! 우리를 뭘로 보고!”
랭커 요한손이 분노해서 외쳤다.
야만전사 직업답게 요한손은 화끈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우리를 놀리고 싶었으면 그냥 놀리면 될 것이지, 이렇게 모욕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판온을 대표하는 랭커냐!”
“뭔 개소리야? 놀리긴 누가 놀려. 너희들이 일하면 빠르니까 시키는 거지.”
“그게 모욕이란 거다!”
요한손은 발을 굴렀다. 장비 하나 없었지만 기세만큼은 흉흉했다.
사실 요한손의 말이 맞았다.
세상에 어떤 랭커가 이런 잡일을 하겠는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체면이 있어서 하지 않을 것이다.
건축가 랭커가 아닌 이상 이런 재료를 캐고, 나르고, 땅을 파고, 쌓는 일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물론 태현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뿐!
“이게 모욕이라니. 너희가 모욕이라는 걸 잘 모르는 모양인데… 흠.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지.”
태현의 말에 전(前) 길드 동맹 소속 랭커 수아나가 기겁했다.
“나… 나는 설명 안 해줘도 이해했어.”
“아. 그래? 저기 봐. 쟤는 이해했다잖아.”
‘겁쟁이 같으니!’
‘김태현이 그리 무섭냐!’
물론 수아나 입장에서는 다른 랭커들에게 할 말이 많았다.
‘겪어보지도 않은 자식들이!’
꼬우면 니들도 겪어보던가!
길드 동맹 출신 랭커들, 정확히 태현을 직접 상대한 랭커들에게는 이상한 자부심이 있었다.
-후, 이번 퀘스트 생각지도 못한 놈이 툭 튀어나와서 망했어. 죽을 뻔했다니까.
-그래봤자 김태현보단 아니지. 네가 분노해서 덤벼드는 김태현한테서 튀어봤냐?
-…….
이건 예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저기 산을 점령하고 있는 암석 정령이 꽤 강하거든? 더 지원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야, 쟤가 강해봤자 김태현보다 강하겠냐? 네가 분노해서 덤벼드는 김태현한테서….
-…….
무슨 이야기만 하면 ‘그래서 네가 김태현한테 튀어봤냐?’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마술!
-이 자식은 김태현한테서 도망친 게 인생 최고 업적이냐?
-헉! 말할까 말까 참고 있었는데 정말 말해버리다니!
-뭐… 뭐?! 이 자식들이… 그래서 네가 분노해서 덤벼드는 김태현한테서 튀어봤….
-그만 좀 해 인마!!
그랬다.
태현을 상대하고 나니 이상하게 올라간 콧대!
딱히 자기가 대단한 건 아니지만, 김태현의 평판이 나날이 올라가니 그 김태현을 상대한 자기도 뭔가 대단해지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물론 다른 랭커들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개소리일 뿐이었다.
‘도망친 게 뭐가 대단한 건데?’
‘드디어 미쳐 버린 건가?’
“김태현. 쟤가 OK한다고 우리도 OK하는 건 아니야. 쟤는 애초에 길드 동맹 소속이잖아.”
“길드 동맹 소속 애들은 좀 이상해. 네가 말만 하면 고개를 끄덕인다고.”
수아나는 말 대신 활을 꺼내 쏘려고 했다. 다른 랭커들이 달려들어 말렸다.
“아니,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네. 같이 일하면 빨리 끝나고 좋지 않나?”
태현은 랭커들이 왜 불만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그 모습이 마치 일부러 놀리는 것 같아 요한손은 더 화가 났다.
장비도 다 잃고 거지가 됐다지만 이렇게 모욕을 받으려고 온 건 아니다!
“우리가 장비도 잃고 레벨도 잃고 직업도 잃어서 우리를 무시하는 거잖냐!”
“아닌데? 그냥 시키면 빠르니까 하는 거지.”
“그러면 네 파티 랭커들은 뭘 하고 있는데!”
“걔네는 벌써 작업하고 있지.”
“웃기지 마라! 걔네가 작업하고 있으면 내가 네 노예다!”
“요한손 말이 맞아! 어디서 같잖은 거짓말을…!”
요한손이 말을 꺼내자 다른 랭커들도 아우성을 쳤다.
원래 한 놈이 총대를 메면 뒤에서 따라가기는 쉬운 법!
그때 뒤에서 최상윤과 정수혁이 나타났다.
“야. 너희들 왜 안 돕냐?”
“빨리 좀 도우십쇼. 일손 부족합니다.”
“…….”
“…???”
“어, 너희들, 뭐하는….”
“뭐하기는… 일하잖아. 너희들은 왜 노냐?”
“지금 마법사가 벽돌 나르는 거 안 보이십니까? 원래 전 마법사라 이렇게 짐 안 옮겨도 되는데 여러분이 가만히 있으니까 제가 옮겨야 하잖습니까.”
정수혁은 매우 못마땅한 눈빛으로 랭커들을 쳐다보았다.
태현이 데리고 와서 가만히 있었지만,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왜 자꾸 시간을 끌고 있단 말인가.
“아, 아니. 너희 랭커잖아…?”
“애들아.”
태현은 랭커들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불렀다. 랭커들의 목이 돌아갔다.
“일할래, 아니면 세계수로 돌아갈래?”
“일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랭커들은 분위기 파악을 하고 호다닥 움직였다. 요한손도 허겁지겁 바위를 들어 나르려고 했다.
“요한손 씨?”
“앗, 네. 무슨 일이십니까, 김태현 씨.”
“방금 뭐라고 하셨었죠?”
“아니, 그게, 제가, 죄송합니다, 분노조절장애가 조금 있어서….”
“하하. 괜찮아. 내 밑에 케인이란 친구도 있는데, 걔가 분노조절장애였는데 지금은 분노조절잘해로 바뀌었어.”
“아… 안 돼! 케인만큼은! 안 돼!”
일반인들은 ‘케인? 김태현과 영혼의 듀오 아냐?’로 알고 있었지만 몇몇 랭커들은 진실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케인 그놈이 김태현한테 잡혀서 완전히 인격 개조를 당했다더라!
요한손은 울부짖으며 태현에게 질질 끌려갔다. 끌려가면서 요한손은 반성했다.
앞으로는 분노조절하면서 살게요!
* * *
랭커들은 기본적으로 스탯이 먹고 들어갔다.
즉….
훌륭한 일꾼!
특히 요한손은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양어깨 위에 바윗덩이들을 올리고 몇 번 오가니 순식간에 요새 벽이 생겨났다.
그러나 요한손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었다.
정체불명의 NPC!
“허, 근데 저 팔 여섯 개 달린 기사는 누구냐?”
“4왕자가 데리고 온 기사 같은데 무슨 NPC지?”
“이럴 때를 대비해서 데리고 온 건가? 저거 땅 파는 속도 봐. 장난 아니다.”
“무슨 포크레인도 아니고…!”
무지막지하게 팔을 휘두르자 몇 명이서 할 작업이 순식간에 끝났다.
-주인이여. 주인이여.
“근처에 적 없지?”
-적은 없고, 폐허를 하나 발견했다.
“오… 확인해 봐야겠군.”
태현은 랭커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케인을 쳐다보았다.
‘흠. 케인 데리고 가면 케인이냐고 의심받겠지?’
가능하면 정체를 숨겨줄 생각이었다. 태현은 랭커 중 죽어도 아쉽지 않은 놈들이 누굴까 생각해 봤다.
“요한손, 수아나.”
“앗.”
“?”
“정찰이다. 같이 가자.”
“역… 역시! 내 실력을 믿고 있었던 건가!”
요한손은 감동했다.
잡일만 시키는 줄 알았는데 역시 김태현이야!
보는 눈이 있지!
그에 비해 수아나는 불안에 떨었다.
길드 동맹에서 겪은 세월은 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 나는 잡일이 좋은데.”
“!??!”
평생 처음 듣는 말!
요한손은 수아나를 보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어이! 김태현이 널 좋게 봐준다는데 왜 그래!”
“나, 나는 별로 안 좋은데. 좋게 안 봐줘도 괜찮은데.”
“에에이! 시끄러워. 따라와! 너 때문에 나까지 못 가겠다!”
“이, 이거 놓지 못해?!”
* * *
“김태현. 그런데 케인은 어디 있냐?”
“케인은 지금 자기 퀘스트 하고 있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요한손은 다른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하긴 자기 퀘스트를 하긴 해야지. 그놈은 너무 너한테 붙어 다니는 감이 있었어. 김태현. 걱정하지 마라. 케인 놈이 없어도 내가 있으니까.”
요한손은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카르바노그가 저 야만전사한테서 케인의 냄새가 난다고 불길해합니다.]
‘…그러지 마….’
태현까지 불길하게 만드는 카르바노그의 말!
옆에서 수아나가 빈정거렸다.
“장비도 없는 게 케인보다 뭘… 네가 솔직히 케인하고 커리어를 비빌 수 있냐?”
케인은 세계 최고의 탱커 중 한 명으로 뽑히며,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랭커.
그에 비해 요한손은 자기 나라 팀이 예선에서 탈락하고 자기도 장비를 다 잃고 빌빌대고 있는 상황.
비교 불가의 상황!
수아나는 요한손한테 단단히 빈정이 상해 있었다. 요한손 때문에 억지로 끌려 왔으니 당연했다.
“나… 나는 케인한테 절대 꿀리지 않는다!”
“장비나 갖추고 말하시지. 그리고 솔직히 장비 갖춰도 네가 케인보다 밑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요한손이다! 내가 케인한테 질 거 같나!”
‘흠. 둘 다 떨어뜨려 버리고 싶군.’
죽어도 안 아쉬운 놈들이라 데리고 왔는데, 태현은 벌써부터 후회가 됐다.
두 배로 시끄러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