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될놈이다-938화 (938/1,826)

§ 나는 될놈이다 938화

그러나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

일행은 당당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 * *

천계와 마계가 이어진 세계수의 평원.

한쪽에는 빛이, 다른 한쪽에는 어둠이 몰려오는, 판온에서 손꼽히는 특이한 장소였다.

심심하면 세계수 근처에서 소환되는 악마들 때문에, 악마 사냥을 해보려는 플레이어들이 꼭 오는 장소!

그리고 그 세계수 앞에 위풍당당하게 설치된 신전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아키서스 교단 신전이었다.

“크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악! 진짜 왜 나만! 왜 나만!!”

“이 쓰레기 게임 접는다!”

“골짜기보다 더 격렬한 것 같은데….”

“쉿. 눈 마주치지 마.”

케인은 세계수 앞에서 절규하는 플레이어들을 짠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케인도 세계수한테 골드를 전부 뺏긴 적이 있었던 것이다.

-세계수가 당신의 기도를 받습니다! 골드가 생깁니다!

-이루어진 기도만큼 불운이 세계수에 쌓입니다!

-세계수가 당신의 기도를 거부합니다!

-불운이 폭발합니다!

-세계수가 당신의 골드를 전부 가져갑니다!

“…….”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미친 기도 시스템!

공짜로 기도할 수 있지만 그때마다 불운이 쌓여서, 한 번 터지면 상상을 초월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덕분에 세계수 근처의 플레이어들은 행복한 99명과 불운한 1명으로 나뉘었다.

원하는 걸 얻은 99명은 행복해하며 떠나갔지만, 꽝을 뽑은 1명은 세계수 앞에서 ‘게임 망해라! 게임 망해라!’ 하며 남게 되는 것이다.

즉 지금 세계수 앞에 있는 건, 불운을 뽑은 사람들!

[세계수가 당신의 도착을 환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불운을 빨아들여 강해진 세계수가 아이템을 제공합니다!]

“??”

[????]

-????

세계수의 거대한 몸통에서 나뭇가지가 피어나더니, 태현에게 손을 내밀듯이 쭉 다가와 아이템을 주었다.

[봉인된 세계수의 씨앗을 얻었습니다.]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얻었습니다.]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얻었습니다.]

[……]

<세계수의 부탁-세계수 퀘스트>

지금 세계수의 상태는 각 세계의 일부에만 가지를 뻗은 불안정한 상태.

세계수는 더 먼 곳까지 제대로 뿌리를 내려 세계를 잇고 싶어 한다.

마계의 층에 될 수 있는 대로 세계수의 씨앗을 심어, 더욱더 튼튼하게 연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라!

보상: ?, ???, ????

태현이 세계수를 심어주긴 했지만, 설마 세계수가 이렇게 부탁까지 해올지는 몰랐다.

“쉬운 퀘스트 아냐?”

“다른 놈이면 모를까 난 아니지….”

태현은 입맛을 다셨다.

세계수 심는 순간 주변 모든 악마들이 ‘헉? 뭐야 저 거대한 나무는?’ 하고 주목할 텐데 쉬울 리가 있겠는가.

나 죽여달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짓이었다.

‘어차피 아키서스 선언하면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끌 테니, 그때 씨앗 심으면 별 상관없긴 하겠군.’

아키서스 선언하는 것과 비하면 새 발의 피!

태현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김… 김태현….”

“힉! 또 키메라냐?!”

케인은 기겁했다. 푸른 금속 광산에서 얻었던 트라우마가 생각보다 컸던 것이다.

물론 키메라가 아니었다.

다가온 건 아까 신전 앞에서 절규하던 플레이어들!

“흑흑… 도와줘…!”

“우리 재산을 되찾아줘…!”

100명 중의 1명꼴로 꽝을 뽑아서 재산 제대로 날린 플레이어들!

세계수를 저주하다가 태현이 온 걸 보고 호다닥 달려온 것이다.

케인은 냉정하게 외쳤다.

“아니, 자기가 좋아서 해놓고 이제 와서 도와달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

케인의 당당한 말에 플레이어들은 반성하고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해서 수군거렸다.

“저 괴물 기사 놈은 뭐지?”

“에랑스 왕자가 데리고 다니는 기사인가 본데… 뭔 종족이야?”

4왕자 옆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거대기사.

케인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이름을 밝히는 건 참았다. 밝혀봤자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꼴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템을 확인한 태현이 입을 열었다.

“나보고 뭐 어떡하라고? 세계수가 가져간 건 내가 돌려줄 수가 없어. 그건 그냥 세계수가 꿀꺽한 거야.”

“으헝헝! 으헝헝헝헝!”

“말도 안 돼…! 저 빌어먹을 나무 놈…!”

‘잠깐. 얘네 레벨이 꽤 높아 보이는데?’

태현은 당황했다.

보통 골짜기에서 잃을 거 없는 도박을 하는 건 저렙 플레이어들!

그런데 지금 여기 있는 놈들은 다 레벨이 높아 보였다. 한두 놈은 장비를 전부 잃었는지 맨몸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장비는 대부분 고렙 이상만이 낄 수 있는 장비였던 것이다.

‘아. 생각해 보니 당연하군.’

안전한 골짜기와는 달리 여기 평원은 기본적으로 레벨이 높아야 악마들을 뚫고 올 수 있었다.

게다가 골짜기의 뽑기와 달리, 여기 세계수는 기도하면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랭커들이 와서 기도하고 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스탯 몇 정도만 보너스로 얻어도 최고였으니까.

…물론 이렇게 패가망신할 수도 있지만….

“저 자식, 랭커 요한손이잖아?!”

최상윤은 얼굴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야만전사 랭커 요한손!

딜러와 탱커 역할 모두 훌륭하게 해내는 유명 전사 랭커였는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그것도 장비 다 잃고 맨몸으로!

“선배님. 저 사람은 길드 동맹 소속 궁수 랭커 수아나 같은데요…?”

유지수는 궁수 랭커를 알아보고 놀랐다.

심지어 전(前) 길드 동맹 소속 랭커도 있다니!

“한동안 방송 안 하길래 길드 동맹 사정 때문인 줄 알았는데!”

“잠깐, 저 사람도 랭커….”

“소식 끊겼던 랭커들 다 여기 있었어!?”

충격과 공포!

생각지도 못했던 랭커들의 모임에 일행은 경악했다.

“와, 저런 뽑기에 당하는 건 잃을 거 없는 저렙 플레이어나 케인 씨 정도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일은 모르는 법입니다.”

“그런데 세계수처럼 구체적인 대신 소소하게 능력 올려주는 곳은 오히려 고렙 플레이어들이 많이 쓰겠죠. 장소도 장소고.”

“쟤네 그래서 뭘 잃은 거지?”

“맨몸인 놈은 보나 마나 장비 다 날렸겠고, 골드 다 잃었거나 레벨이나 스탯 잃었거나….”

“…직업도 잃었다.”

“?!?!?!?”

다시 경악!

세상이 직업도 뺏어가냐!

‘잠깐. 아키서스의 화신도 뺏어갈 수 있나?’

[카르바노그가 코웃음 치며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합니다.]

어디서 세계수 따위가 감히 아키서스를!

‘그래… 고맙다….’

가끔은 스스로가 <아키서스의 화신>인 게 원망스러워지는 태현이었다.

장비, 골드, 레벨, 꿈, 스탯, 희망, 직업, 미래 등 다양하게 잃은 랭커와 고렙 플레이어들.

태현은 그들에게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도와주랴?”

“김, 김태현…!”

랭커들은 자신도 모르게 태현의 손을 붙잡았다.

제정신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 * *

<랭커 김태현, 최초로 마계 진입… 언제나처럼 퀘스트 선봉>

<전문가들 예상 ‘김태현이 이대로 깰 수도 있다’>

<투기장 리그 전 마지막 대형 퀘스트 될 듯…>

<만약 한 번이라도 로그아웃당한다면 투기장 리그 변수 될 수 있어>

<현재 마계 침공 퀘스트에 참가한 길드들을 분석한다>

태현 일행이 세계수를 타고 마계로 떠나버리자, 당연히 뜨거운 반응이 뒤따랐다.

태현이 참가한다는 건 들었지만 이렇게 쿨하게 선봉을 설지는 몰랐던 것이다.

아무 지원도 없이 소수의 NPC만 데리고 훌쩍!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건 자신감으로 보였다.

-나는 김태현이다!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심지어 투기장 리그를 앞두고 저런 위험한 퀘스트에 홀로 뛰어들다니!

정말 자신감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

다른 선수들은 혹시 몰라서 몸을 사리고 있는데 태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짜 김태현은 차원이 다르지 않냐?

-겁이 없음 ㅋㅋㅋㅋㅋ

-다른 선수들 뭐하냐? 투기장 리그 준비하는 건 좋은데 뭐라도 좀 해라. 맨날 방송 보면 안전한 사냥터만 계속 도는 거 질림.

-맞아. 재미 더럽게 없음. 뭐라도 좀 새로운 걸 해야지 맨날 똑같은 던전에서 똑같이 몰이사냥만 하는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해외 게임단 투기장 리그 빡세게 준비하던데. 봤냐? 걔네 시설부터 코치까지 장난 아니더라. 엄청 체계적으로 분석하던데….

-던전 공략 대회에서도 국내 게임단들 전부 다 죽 쑤지 않았었냐?

-한국이 E스포츠 강국인 것도 옛날 일이지. 솔직히 미국이나 중국은 자본으로 때려 박는데 국내 게임단이 따라가기가….

-자본이 짱임.

-그래서 우승 누가 했죠? 소규모 게임단 KL이 했죠? 감독이고 코치고 없는 인디 게임단이죠?

-인디 게임단 ㅋㅋㅋㅋㅋ

-세계 최강의 인디 게임단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진짜 웃기긴 함 ㅋㅋㅋㅋ 다른 대형 게임단들 몇백억씩 투자해서 시설 갖추고 코치진 갖춰서 뭐 과학적 분석으로 엄청난 전략을 짰다느니 하는데 그걸 열 명도 안 되는 팀으로 깨버림 ㅋㅋㅋ

-팀 KL 근데 후보 영입은 안 하나? 인원이 너무 적은 거 같은데.

-지금도 잘 굴러가니까… 불안하긴 하다.

-코치나 감독은 필요할 듯?

-야, 솔직히 김태현 있는 팀에 코치로 어떻게 들어가냐? 김태현 앞에서 분석하려면 심장 떨릴 듯.

-팀 KL 전략은 다 김태현이 짠다던데. 그게 정말임?

-에이, 다 같이 했겠지. 사람이 어떻게 그걸 다 혼자 하냐.

-내가 듣기로는 케인이 많이 도와준대. 케인이 멍청해 보이는 건 컨셉이고 실제로는 엄청 머리 좋다고 하던데.

-오. 진짜?

-?????

-아, 근데 진짜 김태현이 퀘스트에서 다치면 안 되는데. 투기장 리그 우승해야 한다고. 팀 KL 빠지면 투기장 리그에서 활약할 한국 팀이 없다고.

-한국은 어떻게 약팀이 되었나.

-유성 게임단 있잖아.

-아. 맞다. 유성 게임단도 다크호스임. 솔직히 난 유성 게임단이 더 가능성 높아 보임. 던전 공략은 한판 싸움이었지만 투기장 리그는 일정 기간 동안 몇 번씩 계속 싸워야 하잖아. 아무래도 열 명도 안 되는 팀으로 계속 싸워야 하는 팀 KL보다는 지원 빵빵하게 받는 유성 게임단이 유리하지 않냐?

-확실히 그건 그래.

투기장 리그 일정은 살인적이었다.

3개월 정도 되는 기간 동안, 플레이어들이 판온 내 투기장으로 이동해 며칠마다 연속적으로 몇 번씩 싸우는 것이다.

리그에 참가할 선수 정도면 기본적으로 랭커!

즉 자기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시간이 되면 투기장으로 이동해 경기를 뛰어야 했다.

투기장으로 이동하는 건 언제 어디에 있든 바로 이동할 수 있게 판온 측에서 배려를 해준다지만, 아무래도 지원이 많은 팀이 유리했다.

한 경기 끝나고 온갖 기술과 지원을 받으며 분석, 조언을 받는 팀과 아무것도 없이 싸우는 팀.

단발 승부면 몰라도 리그 총 경기가 수십 경기가 넘어가면….

-유성 게임단… 난 진짜 유성 게임단이 강팀이란 게 왜 이렇게 어색하지?

-아재요….

-십 년 전에 ‘유성하다’는 꼴찌하다의 뜻이었지….

-아, 됐고. 한국인이라면 제발 김태현 응원합시다.

-미국인이라면 제발 김태현 응원합시다.

-아니 미국인은 왜…?

* * *

[마계의 중립지대에 도착했습니다!]

[마계의 중립지대는 악마 공작들이 지배하는 층 사이의 공간으로, 주인이 정해지지 않는 무법의 땅입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악마들이 거칠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마계의 사악한 마력으로 인해 전체 능력치가 하락…]

[신성 권능으로 저항에 성공합니다!]

검붉은 하늘.

풀 한 포기 없는 땅.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섬뜩한 악마의 울음소리!

마계에 왔다는 실감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세계수를 탔을 때 도착하는 곳은 랜덤일 텐데… 운이 좋군.”

태현은 안심했다. 차라리 이렇게 주인 없는 곳이 나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