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908화
물론 둘 앞에서 그런 건방진 시도는 통하지 않았다.
“뒤지고 싶니?”
“미쳤냐, 체시자? 네가 드디어 보이는 게 없나 보구나. 마탑 마스터면 다냐? 마탑 마스터면 왕족들 눈치도 안 봐도 된다 이거냐?”
“농… 농담한 겁니다.”
체시자는 허겁지겁 변명했다.
둘의 눈빛이 정말 찢어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서늘했던 것이다.
“자. 받으십시오. 폐하.”
“오냐.”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
태현이 아이템을 받은 사이, 체시자는 조촐하게 제단을 꾸미기 시작했다.
별거 없었다.
모래바닥 위에 석판을 깔고, 그 위에 느부캇네살의 표식을 새겼다.
“이게 끝이야?”
“예.”
“뭐… 내 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물이나 좀 더 바치긴 해야 하지 않나?”
태현은 매우 불쌍한 눈빛으로 느부캇네살을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교단을 다뤄오다 보니,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소환하는 게 좀 불쌍했던 것이다.
마치….
아키서스 교단 같잖아!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완전 거지 교단이라고 합니다.]
체시자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니… 어차피 믿음을 버리시기 위해 소환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 자식. 넌 신의 마음을 몰라.”
“?!”
“불쌍하니까 뭐라도 하나 더 올려줘야지.”
태현은 석판 위에 모래로 만든 떡을 올려놓았다. 그걸 보며 이세연은 생각했다.
‘저게 더 화나지 않을까?’
음식이긴 한데, 아무리 봐도 더 화날 것 같은 음식!
“다음은? 마법 필요한가?”
“진심을 담아 기도만 하시면 됩니다.”
“마법도 필요 없이? 너무 쉬운데.”
“사실 조건이 있긴 한데… 그, 악명이 높고 흑마법도 높고….”
[현재 악명이 매우 높습니다.]
[고급 흑마법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흑마법사 학파의…]
[위대한 파괴자 칭호를 갖고 있습니다.]
[왕족 살해자…]
[귀족 살해자…]
[수많은 자들을 죽음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
[느부캇네살을 부를 수 있습니다!]
“…폐하는 너무 조건에 확실하셔서 괜찮습니다.”
대륙에서 느부캇네살을 소환하기 가장 좋은 사람!
“흠. 역시 열심히 살아오면 보답을 받는군.”
[카르바노그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
“…….”
“좋아. 얼마나 남았지? 건설 완료되고 준비 다 되면 기도한다.”
* * *
[<아키서스 만신전의 요새>가 완료되었습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신성이 크게 오릅니다!]
십만을 돌파한 명성!
[<명성의 갑옷> 스킬을 얻습니다.]
<명성의 갑옷>
대륙에서 가장 높은 명성을 얻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스킬입니다. 이제까지 쌓은 명성이 모든 공격을 막는 절대적인 갑옷으로 변합니다.
‘으음. 좋긴 한데 좀 아깝군.’
절대방어스킬!
다른 직업이었다면 어떤 공격이든 한 번 막아주는 이 스킬은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었지만, 태현에게는 가치가 좀 떨어졌다.
태현은 원래 막는 것보단 피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그보다 카르바노그가 왜 이름이 만신전의 요새로 바뀌었냐고 묻습니다.]
‘글쎄? 너무 배려해 줘서 그런가?’
다른 교단들을 너무 배려해 주다 보니 저렇게 된 걸까?
[그건 배려가 아니라 강제로…]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느부캇네살과의 결전을 앞두고 기분 좋은 2 레벨 업.
레벨 162.
처음에는 언제 레벨업하냐고 생각했었지만, 의외로 조금씩 따라잡고 있었다.
‘이제 내 레벨을 말하면 고렙 취급 정도는 받겠군.’
이제 막 고렙에 들어선 레벨 수준!
최상급 랭커들은 200대 중후반을 달려가고 있었지만….
태현은 이걸로 충분했다.
[아키서스 만신전의 요새는 당신의 소유입니다.]
[이 요새는 모든 적들에게서 믿음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것입니다!]
[특수 기능, 징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요새에서 특수 직업, <아키서스 만신전의 기사>를 징발할 수 있습니다.]
[요새에서 특수 직업, <아키서스 만신전의 사제>를 징발할 수 있습니다.]
[……]
“?”
보통은 <고용>인데 <징발>이었다.
둘의 차이점은….
<고용>은 돈 주고 사람 불러야 하는 거지만, <징발>은 돈 안 주고 사람 부르는 것!
‘좋은 거 같긴 한데, 어디까지 되나 모르겠군. 나중에 가서 해봐야지.’
[요새 관련으로 <만신의 가호>를 쓸 수 있습니다.]
[다른 교단에서 분노할 수 있습니다.]
“…….”
[…….]
어떤 스킬인지 바로 알겠다!
남의 힘을 강제로 뺏어 쓰는 건 분명했다.
“좋아. 다 됐으니… 이제 기도한다.”
밖에는 준비가 끝난 상황.
다들 ‘느부캇네살 언제 나와?’, ‘느부캇네살 나오는 거 맞지?’ 하면서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안 나오면 그건 그거대로 더 큰일 나는 상황이었다.
[느부캇네살에게 기도합니다.]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입니다. 페널티가 없습니다.]
“…….”
[느부캇네살의 영혼이 담긴 조각이 공명합니다!]
[당신은 자격이 충분합니다.]
[……]
[……]
[세계에 흩어진 죽음의 반신, 느부캇네살이 강림합니다!]
[흑마법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흑마법 스킬도 몇 개 안 되는데 스킬 레벨만 높은 기분이군.’
[느부캇네살이 곧 부활합니다!]
휘이이이익-
바람 한 점 없던 던전 안에, 미친 듯이 광풍이 몰아치더니 제단 중심으로 검은 힘이 모이기 시작했다.
태현은 그걸 보고 말했다.
“준비 다 했으니까 우린 밖에 나가 있을까?”
“…좋은 생각이야!”
태현도, 이세연도 죽음 한 번 정도는 막을 방법이 있는 최상위권 랭커들이었다.
그렇지만 괜히 느부캇네살한테 첫 번째로 얻어맞을 생각은 없었던 것!
셋은 허겁지겁 던전 밖으로 뛰쳐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셋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느부캇네살이 곧 부활하나요?”
“그래! 모두 준비해라!”
“오오! 부활한대!”
“드디어!”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긴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태현과 이세연. 둘의 이름값이 너무 대단했던 것이다.
이 둘이 준비한 퀘스트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만약 사람들이, 둘이 어떤 방식으로 퀘스트를 깨는지 안다면 뒤집어질 것이다.
현장뿐만 아닌, 이 장면을 방송으로 보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제 시작한다…!
-망해라. 망해라. 망해라.
-관리자님. 얘 자꾸 헛소리만 하는데 쫓아내면 안 됨?
-솔직히 둘이라고 해도 느부캇네살은 못 잡을 거 같다. 너희들이 느부캇네살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느부캇네살은 정말 개쩌는 보스 몬스터야.
-아! 느부캇네살 아시는구나!
-느부캇네살은 그냥 리치가 아니라 신적인 존재라니까? 솔직히 이렇게 모은 건 인정하는데 플레이어 잡을 수준이 아니라고.
-아. 예. 네가 김태현보다 더 똑똑하시겠지.
-그래서 님 레벨이?
나름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욕만 먹어야 했다.
그만큼 굳건한 믿음!
* * *
[약해진 세계의 틈을 뚫고, 느부캇네살이 부활합니다!]
쿠오오오오!
유적 위로 검은색 힘의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장관이었지만 태현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저 약해진 세계의 틈이 나 때문은 아니겠지….’
[느부캇네살이 주변 모든 것을 흡수합니다.]
[느부캇네살이 허기의 던전을 흡수합니다!]
[느부캇네살이 영원한 허기의 저주에 걸립니다.]
“어? 김태현. 지금 저것도 계산한 거 맞아?”
이세연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허기의 던전이 폭싹 무너지더니 주변이 검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 물론이지.”
“계산 안 했네!”
“아니거든. 했거든.”
[죽음의 반신, 느부캇네살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느부캇네살의 목표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죽음! 맞서지 않으면 희망은 없습니다.]
[압도적인 공포가 주변을 짓누릅니다!]
[<죽음의 길>이 펼쳐집니다!]
느부캇네살은 평범한 리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뼈로 된 몸에, 시퍼렇게 빛나는 안광.
손과 몸에는 아무런 장비도 없었다.
그런데도 강렬하게 느껴지는 압박감! 태현과 이세연은 서로 쳐다보았다.
‘무섭지 않냐?’
‘진짜 무서운데….’
이제까지 했던 보스 몬스터 중 최악의 상대가 될 거 같다!
느부캇네살은 오만하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태현을 가리켰다.
-네게 기회를 주겠다.
“?”
-내 부관이 되어 같이 죽음을 지배하라. 영광스러운 기회니, 두 번은 없을 것이다.
“헉. 저런 부러운… 아차.”
체시자는 중얼거리다가 멈칫했다. 보는 눈이 많았던 것이다.
“으음. 거절한다.”
“거절하면 거절이지 왜 망설여?”
솔직히 좀 끌렸다!
뒤에서 보는 눈이 많아 수작질을 부리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이 많은 사람들을 두고 느부캇네살 진영에 스파이로 들어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지휘도 해야 하고.’
-그런가.
느부캇네살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착한 사람인가?’
[카르바노그가 정신 차리라고 합니다! 그럴 리 없다고 합니다! 저 싸가지는 진짜 개싸가지라고…]
-내게 굴복하지 않는다면… 죽음으로서 나를 섬기리라.
말과 함께, 느부캇네살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 *
네크로맨서의 위력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주변에 강력한 시체가 많다면, 그걸 사용해 소환하는 네크로맨서도 버프를 받았다.
이 주변은 시체가 없었다.
기껏해야 있는 건 거인족 시체 정도가 전부!
워낙 황량하고 외진 곳이었고 거인족이 있어서 다른 종족들이 잘 오지 않았던 것이다.
태현도 그걸 계산하고 있었던 건데….
느부캇네살은 그 예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었다.
-영원한 죽음의 길. 전설적인 지휘관 소환. 위대한 언데드의 파도.
아무 장비 없이 손만 쉭쉭 휘두르는데, 그때마다 경천동지할 위력의 스킬들이 튀어나왔다.
이미 어두워진 하늘. 그 하늘을 찢고 스켈레톤 와이번이 나타났다.
그 와이번 위에는 온몸을 칠흑으로 뒤덮은 전설 등급의 데스 나이트들이 타고 있었다.
랭커 네크로맨서쯤 되면 시체 없이도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다지만….
저렇게 많이, 저렇게 강한 언데드 몬스터를 한 번에 불러내다니.
하늘뿐만이 아니었다. 땅에서도 어마어마한 숫자의 스켈레톤 전사들이 일어나 달려가고 있었다.
전원 상급 이상이라는 미친 규모!
“전투 준비!!”
“저 리치를 죽음으로 돌려보내고 말겠다!”
‘느부캇네살이 과묵해서 다행이군.’
태현은 안심했다.
느부캇네살이 수다스러운 성격이었다면 ‘너희 왜 날 소환해놓고 날 거부하느냐’ 같은 헛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리치는 근접전이면 한 방이야!”
“가자!”
준비하고 있던 암살자, 도적 직업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나섰다.
한 방이면 인생 역전이다!
마법사 직업은 전통적으로 방어력이 낮고 HP가 낮았다. 그건 느부캇네살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각 교단에게서 잔뜩 버프를 받은 플레이어들은 결사의 각오를 하고 달려나갔다.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말린다고 듣지도 않을뿐더러, 한번 보고 싶긴 하군.”
태현은 뒤에서 지켜보았다.
과연 느부캇네살은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이미 암살자들은 완전히 은신해서 보이지도 않았다.
[죽음의 반신이 당신의 은신을 잡아냅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느부캇네살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커억!”
“미친!”
‘장판이군.’
범위 안에 들어오면 무조건 효과를 보는 스킬.
‘아키서스의 영역으로 뚫을 수 있을까? 있을 것 같은데.’
계산 판단이 끝난 태현은 뛰어들었다.
“김, 김태현!”
“아무리 그래도 걔네 도와주려고 목숨을 걸면 안 되지!”
오해한 사람들이 뒤에서 소리쳤다. 다들 목숨 걸고 간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