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99화
“폐, 폐하… 그런데 무엇을 원하십니까?”
정작 말을 꺼내놓고 자기도 겁이 났는지 파이토스 교단 고위 사제의 목소리가 떨렸다.
설마 아키서스 교단 성지 한가운데에 <파이토스의 위대한 동상>이나 <파이토스의 위대한 성소> 같은 걸 세워두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지만 태현이라면 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아무리 파이토스 교단이라도 그 건물들 제작 비용을 대려면 등골이 휠 것이다.
“훈련장.”
“아…! 저희 교단의 훈련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합니다!”
“개 같은 것으로 악명이 높은 게 아니라?”
뒤에서 케인이 중얼거렸다.
파이토스 교단 훈련장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이걸 깨라고 낸 거냐 XX놈들아!’로 악명이 높았다.
오죽하면 아직도 다 깬 놈이 안 나왔을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이건 지금 상태에서 깰 수 있는 게 아니다’, ‘특별한 스킬이 필요한 게 분명하다’가 정론이었다.
일반적인 공략법으로는 깰 수 없으니, 분명 무언가 스킬이 필요한 것이다!
“쉿. 케인. 상처받잖아.”
“네가 상처란 상처는 이미 다 줘놓고 뭘….”
아탈리 왕국에서 교단이 싹 쫓겨났는데 그게 더 상처 아니냐?
“폐하! 파이토스 교단의 건물은 받아봤자 별로 쓸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파이토스 교단 신자나 좋지, 애초에 아탈리 왕국에 교단 신자도 별로 없을 겁니다!”
아프게 푹푹 찌르는 다른 교단 사람들!
태현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파이토스 교단 고위 사제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을.
‘얘 울겠다!’
“아니다. 파이토스 교단의 제안을 받아주겠다!”
“!”
“!!!!”
“저희 고위 사제단 1년 대여를….”
“교단 상급 보물 창고에서 무작위 보물 하나를…!”
“성기사단장의 비전 스킬을…!”
이 모든 것들이 파이토스의 훈련장 하나에 밀렸다는 것에 모두 믿을 수 없어 했다.
탁-
“?”
태현은 사제들 한 명씩을 잡고 속삭였다.
“내가 자네 교단한테만은 따로 비법을 알려주지.”
“그, 그런…!”
[교단의 친밀도가 크게…]
[사이가 개선됩니다!]
“이건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되는데, 내가 자네 교단을 좋아하니 자네 교단만 추가로 비법을 알려주지.”
“역시! 폐하를 믿고 있었습니다!”
[교단의 친밀도가 크게…]
[……]
경쟁 붙여서 몸값을 올린 다음 전부 받아 챙기기!
카르바노그는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상인의 신 했어도 잘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 * *
태현이 에랑스 왕국을 돌면서 강력한 지원군들을 모으는 동안, 이세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세연은 마법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움직였다.
마법사는 언제나 많을수록 좋았던 것이다.
-죽을래, 아니면 따라와서 도울래?
때로는 힘으로.
-고대 제국 흑마법사의 정당한 후계자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부른다!
때로는 직업으로.
에랑스 왕국 마탑만 해도 마법사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했지만, 판온이 워낙 넓다 보니 그 외에도 마법사 단체나 조직은 많았다.
이세연은 그런 NPC들을 설득하고 협박해서 끌어들였다.
그 과정에서 마법사 플레이어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이세연의 뒤를 쫓았다.
“역시 이세연이다!”
“빛 그 자체…!”
순식간에 마법사 NPC들을 밑으로 끌어들이는 그 과감한 실력에, 마법사 플레이어들은 홀린 표정으로 뒤를 쫓았다.
미다스 길드 랭커들은 절대 보여주지 못하는 솜씨였다.
이것이 실력 차이!
미다스 길드 입장에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에 뛰어든다고 발표는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야, 이거 아무것도 못 하면 망신인데….”
“지금 이쪽으로 온 마법사들도 이세연 쪽으로 빠지려고 하고 있다고.”
“빨리 토벌 시작해야 해. 시간 더 끌면 위험하다.”
이세연의 퀘스트는 알기 쉬웠다. 대륙을 돌면서 마법사 단체들을 팍팍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명성이 높으니 미다스 길드 쪽에 왔던 플레이어들도 ‘저기가 더 재밌어 보인다!’면서 몰려가고 있었다.
“견제를 하면 안 되나? 저쪽에 악재라도 안 터지면 무리일 것 같은데.”
랭커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말했다.
길드 동맹 출신도 아니고, 태현과 만나본 적도 없어서 아직 겁이 없는 랭커였다.
“미쳤냐?!”
“지금 길드 동맹도 옆에 멀쩡히 있는데 적을 늘리면 어떡하려고?!”
길드 동맹 출신들은 기겁해서 들고 일어났다.
길드 동맹 때 몇 번이고 겪은 망하는 패턴!
하지만 랭커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지금 상승세인데 기껏 뛰어든 퀘스트에서 실패하면 어쩌자고?”
“쇠도 뜨거울 때 쳐야지, 지금 우리가 투자에 광고 들어오는 이유가 뭔지 알잖아?”
동맹 탈퇴부터 시작해서 여러 이슈를 만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미다스 길드!
계속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꾸준히 무언가를 보여줘야 했다.
이번 전설 퀘스트에 참가했다가 별다른 실적을 내지 못한다면 위험할 수 있었다.
판온은 냉정했다.
몇 번 실패하면 순식간에 잊혀지고 새로운 랭커, 새로운 길드가 치고 올라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견제는 위험해.”
“맞아. 지금도 이미 충분히 많이 엮인 상태라고.”
‘겁쟁이 같으니….’
‘저 자식들 왜 이렇게 겁이 많아?’
길드 동맹 출신 랭커들의 말에 다른 랭커들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뭔 놈의 랭커가 간이 저렇게 작단 말인가!
길드 동맹 출신 랭커들도 눈이 있었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껴졌다.
‘이 자식들이 당해보지도 않고….’
‘니들이 한 번 당해봐야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깨닫지.’
다행히 아직 미다스 길드는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벌써 견제할 필요는 없지. 먼저 실적을 보여주면 돼.”
역시 태현이나 이세연한테 직접적으로 시비를 거는 건 꺼림칙했던 것이다.
“비밀집단은 찾았나?”
“잔챙이들 몇 개 찾아서 잡았는데 솔직히 임팩트가 너무 없는데요.”
김태현이나 이세연이 하는 것에 비해서 너무 초라한 토벌!
레벨 100~200쯤 되는 네크로맨서들을 토벌해 봤자 사람들은 ‘음… 그렇군요… 제 점수는….’ 하면서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원래 이것도 충분히 잘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의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진 탓이었다.
누구는 레벨 500짜리 보스 몬스터를 맨몸으로 잡는데 누구는 200대 잡으면 누가 만족하겠는가!
“제가 괜찮은 거 하나 찾은 것 같습니다.”
“오… 뭔데?”
“무려 리치입니다.”
“리치? 그거 괜찮은데?”
리치 토벌전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화끈하게 붙잡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리치 같은 고위 몬스터는 찾는 것도 일이었는데 발견했다니.
“누구지? 어디 있는 놈이야?”
“제가 게시판에서 산 정보에 따르면, 우르크 지역에 있나 봅니다. 산맥 하나를 점령하고서 자기 성채로 쓰고 있나 봐요.”
“허. 거기 오크들 동네 아닌가?”
“예전 오크 대족장 사라지고 나서는 플레이어들도 많이 가기 시작했지.”
우르크 지역은 원래 플레이어들이 잘 가지 않는, 개척이 덜 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김태산이 새 오크 대족장이 된 다음부터 바뀌었다.
새로 시작하는 플레이어도 시작 가능한 지역으로 바뀐 것!
다른 왕국처럼 좋은 시설이나 고위 NPC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호쾌하고 자유로운 맛이 있었다.
워낙 빈 땅이 많았고 오크 부족들도 많아 도움받기도 쉬웠던 것이다.
<우르크 지역에서 시작하는 열 가지 팁>
-예전 우르크 지역 이미지 때문에 어렵다는 편견이 많은데, 요즘은 그만큼 아닙니다. 솔직히 잘츠 왕국 같은 변태들이나 하는 곳보다는 훨씬 낫죠. 일단 우르크 지역에서 시작하면 근처에 있는 오크 부족에게 가서 친해져야 합니다. 아참. 종족은 무조건 오크로 하셔야 합니다. 다른 종족 하실 거면 다른 곳이 나아요. 우르크 지역은 무조건 오크입니다. 오크 종족만 하면 반은 먹고 들어가요!
오크 부족들과 친해져서, 수백 오크 전사들과 함께 몬스터를 같이 호쾌하게 때려잡고 다니는 재미!
김태산 길드원들만 오던 우르크 지역도 점점 전체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김태산도 싱글벙글!
“흠. 거기 리치가 있다면 오크 플레이어들도 괴롭겠군.”
“하긴, 거기 수준으로는 리치 못 잡겠지. 게다가 상성도 안 좋을 거 아냐.”
리치는 자고로 성기사단과 사제 같은 신성 계열 공격을 해야 했다.
그런 게 거의 없는 오크들로서는 상대하기 힘들 것이다.
물량?
리치 상대로 물량전을 거는 바보는 없었다.
“괜찮은데? 거기 가서 리치 잡으면 플레이어들이 엄청 고마워하겠지?”
“맞아. 보는 눈도 많을 테니 화려할 거고.”
미다스 길드의 랭커들은 이 계획에 매우 혹했다.
보는 사람들 많아서 퍼뜨리기도 좋고, 생색내기도 좋고, 퀘스트 관해서 사람 모으기도 좋고….
거기에 우르크 지역처럼 판온에서 신규 플레이어들이 많이 몰리는 지역에 미다스 길드의 이름을 알릴 수 있지 않은가.
“근데 거기 <최강지존무쌍>이라고 이미 있는 길드가 있는데.”
“맞아. 거기도 좀 위험해.”
길드 동맹 출신 랭커들은 또 딴지를 걸고 나섰다.
“아. 고만해! 거기 어차피 오크들밖에 없잖아!”
“리치 잡아준다는데 설마 그거 가지고 시비를 걸겠냐?”
“걸면 또 어쩔 건데? 오크들만 있는 길드로 우리한테 어떻게 덤벼?”
“오히려 우리한테 감사해야지. 우리가 잡는 거 보면 우리 길드에 들어오고 싶어 할걸.”
오크 종족 자체가 마법사나 주술사가 적었다.
그런 곳이니만큼 미다스 길드를 보면 혹할 것이 분명!
“우리 위력을 보면 <최강지존무쌍>이 우리 쪽으로 들어오겠다고 신청할지도 모르겠군.”
“협력 길드 하나 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수준은 좀 부족해도 숫자는 꽤 많아 보이니까.”
대형 길드는 그 밑에 협력 길드를 여러 개 두는 게 보통이었다.
밑에 장비를 지원해 주는 대장장이 길드, 아이템을 처리해 주는 상인 길드 등등을 두고 상생하는 것이다.
미다스 길드는 마법사 위주다 보니 저렇게 탱커 역할을 해줄 숫자 많은 전사 길드가 하나쯤 있어도 나쁠 거 없었다.
길드 동맹 출신 랭커들은 황당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저것들 <최강지존무쌍>이 어떤 길드인지 모르나?”
“그 미친놈들이 남 밑으로 들어간다고?”
“저 자식들 오스턴 왕국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던 거야?”
길드 동맹 출신 랭커들이야 오스턴 왕국에서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지만, 에랑스 왕국 랭커들은 자기 퀘스트 하느라 바빴다.
<최강지존무쌍> 같은 촌스러운 이름 들고 길드 동맹한테 밀려서 우르크 지역으로 쫓겨난 길드까지 기억해 주지는 않았던 것!
“좋아! 우르크 지역의 리치를 잡으러 간다!”
“와아아아!”
“너희, 또 반대하지는 않겠지?”
견제하는 질문을 받은 길드 동맹 출신 랭커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씩 웃었다.
“…물론이지!”
“우리가 반대만 하는 사람이 아니야!”
“너희들이 꼭 가자면 가야겠지!”
‘빠져야겠다.’
‘핑계 대고 빠져야지.’
‘잘 생각해 보니 저놈들 개망신당하면 내 위치가 올라가겠는데?’
길드 동맹 출신 랭커들은 정치질의 수준이 몇 단계는 높았다.
길드 동맹이라는 마굴에서 단련된 이들!
그들은 일치단결했다.
이제까지 에랑스 왕국이나 덩글랜드 왕국에서 꿀 빨아온 랭커 놈들….
어디 한번 엿 좀 먹어봐라!
* * *
“으윽. 역시….”
공항에 도착한 태현은 낮게 신음했다.
새벽 비행기를 탔는데도 벌써 인파가 꽉 차 있었다.
에이전트인 빈센트한테서는 이미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김태현 선수. 저런 것까지 통제할 수는 없어서….
선수의 컨디션에 맞춰 활동을 조절해주는 것이 에이전트의 역할.
게임에 바쁠 때에는 게임에 집중하게 해줘야 했다. 지금처럼 전설 퀘스트를 하고 있을 때에는 더더욱.
하지만 광고나 출연 요청은 관리하더라도, 자발적으로 모이는 팬들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지.’
팀을 좋아해서 모인 팬들한테까지 매정할 정도로 태현은 냉정하지 않았다.
“케인. 질서 있게 팬들에게 인사하고 숙소로… 케인?”
옆을 보니 케인이 사라져 있었다. 이다비가 민망한 표정으로 앞을 가리켰다.
케인은 벌써 팬들 사이로 들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래! 그래! 내가 바로 케인 컥! 잠, 잠깐만! 살살 잡아! 찢어져! 진짜 찢어진다악! 스탑! 스탑!”
그걸 본 경호원들이 기겁해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