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91화
태현은 돈이 없는 게 아니었다. 게임에서 돈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 뿐!
‘아니, 내가 왜 변명하는 것처럼 됐지?’
유지수가 ‘선배가 그렇게 쪼들리고 있었다니’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마음이 아팠다.
“…일단 귀국해서 생각해 볼게.”
광고나 방송 관련된 일은 에이전트인 빈센트와 계약하고 나서 전적으로 맡기게 된 상태였다.
빈센트한테 개인 방송을 하겠다고 말하면 알아서 철저하게 준비를 해주겠지만….
‘퀘스트에 방해될 것 같단 말이지.’
이제까지 태현이 방송을 하지 않았던 건 빠르게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였다.
랭커들 중 순위 경쟁을 하는 랭커들은 실시간으로 생방송을 잘 하지 않았다.
공개되는 순간 들어오는 견제!
꼭 견제뿐만이 아니더라도, 구경하려고 온 플레이어들이 많아지면 일이 귀찮아졌다.
당장 이번 에랑스 국왕 퀘스트 때도 플레이어들이 너무 많아 랭커들이 곤란을 겪지 않았던가.
그래서 랭커들은 중요한 퀘스트가 아닐 때만 실시간으로 개인 방송을 했고, 방해를 받아도 상관이 없을 때만 방송을 했다.
게다가 태현은 랭커들 중에서 원수 많은 걸로 따지면 독보적 1위!
판온 게시판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태현이 1위를 할 때가 많았지만, 가끔 올라오는 비공식 <죽이고 싶은 랭커> 투표에도 1위를 독식하는 태현이었다.
그런 만큼 실시간 방송은 최대한 피하고, 가능한 퀘스트가 다 끝난 다음 녹화된 영상을 파워 워리어 길드 계정에 올리는 식으로 해왔었다.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조회수가 쌓였지만!
‘그렇다고 퀘스트를 빼면 내가 재미있게 방송을 진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말전도잖아.’
태현은 생각에 잠겼다.
다른 랭커들처럼 실시간 퀘스트 방송을 하는 게 아니라면 태현의 방송을 누가 재밌다고 보겠는가?
물론 전 세계의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태현이 누워서 잠자는 영상만 틀어줘도 줄을 서서 볼 테지만, 그걸 태현이 알 방법이 없었다.
안 그래도 자기 인기에 무관심했던 게 태현이었다.
“으음… 재밌는 방송… 퀘스트 빼고 재밌는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내가….”
“헉! 나 아이디어 있어!”
케인은 태현이 중얼거리는 걸 듣고 손을 번쩍 들었다.
한때 케인의 꿈이 게임 방송으로 먹고사는 것!
레드존 길마 때의 꿈이었다. 욕이 더 많은 방송이었지만….
“네가?”
태현은 매우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케인을 쳐다보았다.
“왜?! 왜 못 믿는데!?”
“너… 레드존 때 방송했다가 망했다며.”
‘너 때문이었잖아!’
네가 길드를 통째로 갈아버렸는데 어떻게 방송이 안 망하냐!
“그, 그건 과거고. 지금 난 다르다고. 수많은 아이디어를 생각했어.”
‘저놈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하고 뭔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최상윤은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케인이 쉬는 시간에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과 ‘야! 나라면 이거 한다! 아니다! 이 특집이 좋을 거 같아!’ 하면서 떠들길래 뭔가 했더니, 이런 거였나!
그 시간에 그냥 자기 단련을 하는 게 낫지 않나?
팀이 결성되고 나서 거의 올리진 않았지만, 케인도 개인 방송 계정이 있었다.
그다지 재미가 있진 않았지만 케인의 이름값이 있고, 하는 퀘스트가 있어 보는 사람들이 꽤 됐었다.
아이디어가 있으면 네 계정이나 챙겨라!
“일단 첫 번째는 <랭커들 월드컵>이야.”
“…?”
“??”
태현과 최상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이름만 들어도 남들의 원한을 팍팍 살 것 같은 방송은 뭐지?
“그게 뭔데?”
“네가 랭커들을 늘어놓고 누가 센지 말해주는 거지.”
“와….”
최상윤은 감탄했다.
그거, 사람들이 많이 보기는 정말 많이 보겠다!
‘나 같아도 보겠다.’
랭커들은 의외로 몸을 사렸고, 덕분에 랭커 vs 랭커 같은 상황은 언제나 귀했다.
한 번 붙으면 게시판이 며칠 동안 그 이야기만 할 정도로.
그리고 태현은 판온에서 가장 많은 랭커들과 싸워 온 사람!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확실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랭커들 중 누가 세냐’로 떠들었지만, 태현이 말하면 그 무게감이 차원이 다를 것이다.
‘케인 녀석. 대단하군!’
솔직히 얕보고 있었는데 케인도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현은 냉정했다.
“재미없을 것 같은데?”
“아니 왜?!”
“아냐! 재밌을 거야!”
“랭커를 패는 것도 아니고 얘랑 얘 중 누가 세다고 말하는 게 재밌다고?”
“그래! 한 번 믿고 해봐!”
“…할지 안 할지는 그렇다 치고. 다음은? 다른 건 뭐가 있냐?”
“후후. 그뿐만이 아니라고. 다양한 콘텐츠들이 있지. 요리, 상자 까기, 아이템 강화, 아키서스 투기장….”
케인의 말을 들은 태현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거 다 골짜기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이미 한 거잖아.”
표절!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에 이미 저런 걸 하려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괜히 골짜기가 방송의 성지로 불리는 게 아닌 것!
“아, 아니야! 네가 하면 다르다고! 원조는 다른….”
“퍽이나 그렇겠다.”
“크윽… 그러면 이건 어때. 이건 정말 비상수단으로 생각해 놓은 건데.”
“?”
“이세연과 같이 방송을 하는 거야.”
이름값+이름값!
둘이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고 있어도 1위 찍는다!
케인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좋은 아이디어가 언제나 좋은 평가를 받는 건 아니었다.
“…죽고 싶냐?”
“아, 아니. 그렇게 협박하면…! 자유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가 없잖아!”
“자유로운 아이디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괜히 기대했어.”
“흑흑….”
케인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반드시 뜰 텐데!
진짠데!
-정지!
“?”
태현 일행을 막아서는 병사!
현재 태현 일행은 에랑스 왕국을 한 바퀴 돈 다음 보상을 챙기고 수도의 왕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목표는 다시 에랑스 국왕!
기사단도 받고 <에랑스 왕가 컬렉션>도 챙겨서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태현은 아주 살짝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친절한 사람인데 더 주지 않을까?’
만약 국왕의 상태가 아직도 해롱거리는 상태라면 더 받아낼 수 있다!
그런데 가는 길에 병사들이 태현 일행을 막아선 것이다.
“뭐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
태현은 놀랐다.
국왕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한 번도 병사들이 막거나 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러지?
‘헉. 들킨 건가.’
[카르바노그가 그러게 작작 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찔리는 게 너무 많은 태현!
에랑스 국왕의 뺨 때리기부터 시작해서 정신 혼미할 때 보상 뜯어낸 것까지.
어느 하나라도 들통나면 [에랑스 국왕이 당신을 매우 싫어합니다]라고 메시지창이 떠도 이상할 게 없는 일들이었다.
‘아니, 아직 메시지창은 안 떴는데? 뭐지?’
“무슨 일이냐. 나는 에랑스 국왕 폐하에 대한 걱정으로 온 건데!”
-현재 폐하께서는 회복 중이시라 손님을 뵐 수 없습니다.
“아. 그런 건가?”
태현은 안도했다.
들킨 게 아니구나!
‘지금 만나야 하는데….’
태현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아직 회복이 다 안 됐다니, 이 때 가면 보상을 더 받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병사들은 완고했다.
설득이고 뭐고 통하지 않는 완고함!
옆에서 귀족 전사대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대포로 쓸어버리고 돌진….”
“조용히 해 이것들아.”
괜히 오해받겠다!
왕국 기사단들이 5분 거리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도 거리.
여기서 싸움을 일으키는 건 미친 짓이었다. 저번에 랄그갈과 맞붙었던 도시와는 차원이 달랐다.
아무리 태현이라도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면 순식간에 박살 날 수 있었다.
“후. 그러면 폐하의 회복을 기원하지.”
아쉬움을 가득 남긴 채 태현은 뒤로 물러섰다.
회복됐다는 소식 듣는 순간 바로 달려가야지!
* * *
“폐하!”
“?”
뒤에서 부르는 외침에 태현은 멈칫했다.
혹시 국왕이 깨어나서 보상이라도 주려는 것일까?
[카르바노그가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조언합니다.]
‘끙.’
하지만….
너무 보상이 대단한 걸!
급하게 말 몇 마디 나눈 걸로 기사단을 받고, 왕실 보물 컬렉션을 받은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말이 기사단이지 어마어마한 전력이었다. 지금 판온 내에서 기사단을 부하로 갖고 있는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었다.
레벨이 기본으로 400, 500은 훌쩍 넘는 귀족 기사단은 평원에서 말을 타고 돌격할 경우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어지간한 마법은 갑옷과 버프로 튕겨내 버리고 상대를 박살 내버리는 인간흉기들!
플레이어들이 괜히 귀족 NPC들 앞에서 고개 숙이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아직 귀족 기사단을 잡고 다닐 플레이어는 없었던 것이다.
“폐하?”
“아. 미안. 다른 생각을 했다. 누구지?”
“에랑스 왕국 마탑에서 나왔습니다.”
[<흑마법사 학파의 계승자>를 갖고 있습니다.]
[에랑스 왕국 마탑의 흑마법사 학파가 당신을 소환합니다!]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마법사 NPC는 에랑스 왕국 마탑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태현이 예전에 사기를 쳐서, 아니, 노력을 해서 마탑 흑마법사 학파의 시험을 통과하고 계승자 칭호를 딴 적이 있었던 것이다.
[사기 맞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사기 맞아!
‘아니야. 정당한 승부였다고.’
그런데 무슨 일이지?
태현은 의아하다는 듯이 흑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에랑스 왕국 마탑에서 부를 정도면 평범한 퀘스트는 아닐 것이다.
“무슨 일이길래?”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대마법사님께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
흑마법사 NPC는 아는 게 없는지 공손히 대답했다. 그는 태현을 안내하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체세도 님을 리치로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흑마법사 학파 대마법사, 체시자의 오른팔 체세도!
태현을 도와주기 위해 따라 나갔다가 리치로 각성해 버린 흑마법사였다.
지금은 김태산네 영지에서 언데드들 이끌고 잘살고 있는 중!
태현은 일단 발뺌부터 하려고 했다.
“어? 아, 아니. 그건 내 잘못이….”
“정말 부럽습니다!”
“?!”
‘아. 그랬었지.’
흑마법사들에게 리치가 되었다는 건 나쁜 게 아니었다.
다른 학파 마법사들은 ‘으, 리치라니. 언데드 극혐’이런 반응을 보였지만 흑마법사 학파에게는 포상인 것!
한 단계 진화한 존재가 되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저도 폐하를 수행하면서 리치가 되고 싶습니다!”
[카르바노그가 말리려고 합니다.]
“저런 불쌍한 NPC를 봤나….”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는 거지?”
태현 일행은 수군거렸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흑마법사 NPC의 생각!
왜 인생을 저렇게 낭비하려고 하는가?
태현은 일행을 조용히 하게 만든 다음 흐뭇한 얼굴로 흑마법사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알아서 고생을 해주겠다는데 흐뭇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하. 내가 꼭 리치로 만들어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자세가 보기 좋군. 그래. 사람은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애써야지. 저기 케인처럼.”
‘왜 날….’
하필이면 리치랑 비교해서 날 끌고 오냐!
오랜만에 마탑에 도착하자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우글거렸다. 줄이 길어서 들어가려면 한참은 기다려야 하는 수준!
‘뭐,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대마법사의 부름을 받아 왔는데 따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태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렸다.
“여기입니다.”
“…어? 왜 줄이 없지?”
태현은 당황했다.
다른 학파 쪽 구역은 플레이어들이 길게 줄을 서서 꽉꽉 채우고 있었는데, 흑마법사 구역은 왜 이래?
“아무것도 모르는 마법사 놈들이라 그렇지 않겠습니까.”
흑마법사 NPC는 당당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노려보았다.
물론 흑마법사 NPC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자식….’
태현은 흑마법사 NPC의 모습에서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갈락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