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85화
“일단 보상 받고 빠진 다음 생각해 보자. 랄그갈을 도저히 못 잡겠으면 왕궁에 던져도 되니까.”
에랑스 국왕이랑 사이도 좋은 편인데, 굳이 여기서 원수 사이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랄그갈을 정말 못 떨치겠다 싶을 때 결정해도 될 것!
‘그러고 보니 랄그갈은 바다로 나가도 따라오려나? 쫓아올 것 같긴 한데.’
“근데 김태현.”
“?”
케인이 입을 열자 태현은 의아해했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에랑스 왕국을 버리는 패로 쓰는 것보다는 이세연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지 않아?”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어, 케인? 걔가 날 왜 도와주겠어?”
“아니, 아까 들어보니까 네가 사과만 하면 도와준다고….”
“그게 헛소리지.”
“그, 그래?”
케인은 이해가 안 갔다.
그게 대체 왜 헛소리?
“그리고 내가 사과할 게 뭐가 있어?”
“속이고 이용해 먹은 거…?”
“그건 정당한 거래였지.”
“…….”
“…….”
“…….”
주변에 있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애들아. 지금 너희들이 타고 있는 건 내 탈것이다.”
“정, 정당한 거래였지!”
“맞아! 맞아! 이세연이 이상한 사람이야!”
일행은 바로 반응했다.
추락하고 싶지 않아!
“근데 이세연이 말한 건….”
“케인. 내리고 싶냐?”
“아, 아니. 말도 못하냐!”
“후. 말해봐라. 말하기 전에 3번은 생각하고 말하는 거 잊지 말고.”
“끄응… 이세연이 사과하라고 한 건 판온 1 때 이야기라고 했잖아… 그때는 뭐했는데?”
판온 2가 아닌 판온 1!
판온 1 때의 일을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흠. 판온 1은 더더욱 사과할 거 없는데?”
내가 졌잖아!
태현은 더욱 더 당당해졌다.
진 건 난데 왜 자기가 저러지?
대화를 듣던 앨콧이 끼어들었다.
“잊고 있는 걸 수도 있어. 김태현.”
“에이. 아닌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 잘 기억해 봐!”
앨콧은 성질을 내며 외쳤다.
판온 1에서 너한테 많이도 죽은 내가 여기 있는데!
“왜 네가 성질이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기억을 잘 해보라고…!”
크로포드는 앨콧을 짠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름 잘나가는 놈인데 왜 김태현만 만나면 저렇게….
“흠… 내가 날려 버리거나 쓸어버린 길드 중에 이세연과 친한 길드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근데 그런 건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나도 먹고살아야지. 자기들이 던전 입구 막고 ‘자리요’ 하는데 해줄 수 있는 말이 ‘그래 네 묫자리’ 말고 또 있나?”
“돈을 내면….”
“걔네가 만들었어? 왜 내?”
“하긴 맞는 말이야.”
크로포드는 공감했다.
김태현이 랭커들을 죄다 줘패면서 악명이 높긴 했지만, 저런 식으로 굽히지 않는 점은 높게 살만했다.
대형 길드면 다냐!
대형 길드가 억지를 부리면, 일반 플레이어들은 더럽고 치사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싸우기에는 너무 불리했으니까.
그렇지만 태현은 달랐다.
정당하지 않으면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약하든 간에 죽빵부터 갈기고 봤다.
네가 그렇게 강해?
던전으로 따라와 이 자식아!
태현의 인기가 괜히 높았던 게 아니었다. 대형 길드의 행패에 당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에게 태현은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이세연은 됐고 아이템 확인부터 하자. 토왕아. 준비됐지?”
-카릉.
토왕이는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속에 온갖 사악한 아이템이란 아이템은 다 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퉷퉷퉷!
“악마들. 분류 작업 들어가라. 독 관련된 거 따로 해놓고, 연금술 관련된 거 따로 해놓고, 하여튼 보기 좋게 정리해놔.”
“예!”
“와! 잡일이라니 너무 신난다!”
악마들은 신이 나서 움직였다.
랄그갈과 비교하니 선녀 같다!
그러는 사이 태현은 새로 얻은 스킬들을 확인했다.
<아키서스의 오염된 토템>
토템에 신성한 기도를 바칩니다. 토템이 당신의 기도에 반응해 아이템을 내려줄 것입니다.
‘음. 근데 카르바노그.’
[?]
‘<오염된 아키서스의 토템>이어야 맞는 말 아닌가? 왜 <아키서스의 오염된 토템>이지? 설마….’
[…!]
‘하하.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일 거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순서야 그렇다 쳐도, <아키서스의 오염된 토템>은 설명만 보고 알기 힘든 스킬이었다.
직접 써봐야 알 수 있는 스킬!
‘그냥 랜덤 아이템 스킬인가? 고블린 제작기가 이미 있는데. 더 좋은 스킬?’
-아키서스의 오염된 토템!
쿵!
태현 앞에 기둥처럼 생긴 묵직한 토템이 쾅하고 생겨났다. 토템에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거 어느 교단 문양이야? 아키서스 교단 문양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처음 보는 기괴한 문양인데.”
“잠깐. 여기 이 부분, 사디크 교단 같지 않아?”
“이 부분은… 파이토스 교단 같은데…?”
“이 부분은 에다오르 님의 문양 같고….”
일행은 의혹의 눈빛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
태현은 무시하고 기도를 올렸다.
[<아키서스의 오염된 토템>에 기도를 바칩니다!]
[토템이 기도에 반응합니다!]
[아이템을 내려줍니다!]
[<시끄러운 침묵>을 얻었습니다!]
‘전설 등급 단검!’
<시끄러운 침묵>은 암살자 직업이 쓸 만한, 무려 전설 등급 단검이었다.
레벨 제한이 백 후반에, 각종 스탯 제한부터 스킬 제한까지. 상위권 랭커들이나 쓸 만한….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비 같은데?’
구체적으로 앨콧 손에서 많이 본 장비 같다!
“내, 내 단검!!”
앨콧은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어지간하면 놀랄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아키서스의 오염된 토템>이 당신의 손에서 아이템을 가져갑니다.]
[미안합니다!]
…란 메시지창이 뜨더니 그냥 장비가 쉭 사라졌다.
이런 미친 스킬은 살다 살다 처음 본다!
뭔 이런 날강도 스킬이 있어!
“내… 내 장비 어떻게 된 거야! 그거 진짜 구하기 힘든….”
“진정해. 진정해. 여기 있으니까.”
태현은 단검을 건넸다. 앨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 고맙….”
‘고마워할 일이 아니지 않나?’
크로포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뺏었다가 돌려준 건데 저렇게 눈물 글썽거리면서 고마워할 일은….
“흠. 설마 이런 스킬이었나. 좀 더 시험해 봐야겠군.”
“…….”
“…….”
눈치 빠른 케인과 크로포드는 슬쩍 일어서더니 자리를 비키려고 했다.
아무리 봐도 좋은 꼴을 볼 것 같지 않다!
“하하. 애들아. 가만히 있어봐. 내가 설마 뺏어가 놓고 돌려주겠니?”
[‘안’이 빠졌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기도! 기도!
시간이 다 되어 토템이 사라지기 전까지, 태현은 계속 기도를 올리며 시험을 해봤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를…]
[<찰진 진흙>을…]
[……]
이걸로 확실해졌다.
근처에 있는 아이템 중 아무거나 하나를 태현에게 쥐어주는 아이템!
‘보통 이런 건 신이 직접 내려줘야 하지 않나? 주변에 있는 걸 뺏어서 주다니….’
점점 아키서스 권능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기분이 들었다.
나오는 아이템이 완전히 랜덤이라는 점이 좀 쓰기 애매해 보였지만, 페널티 하나 없이 남의 아이템을 뺏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약점도 아니었다.
‘남들이 싸움 붙었을 때 근처 가서 토템 깔고 기도하면….’
불구경의 진화형!
‘아. 맞다. 성전도 확인해 봐야지.’
새로 얻은 교단 기능, <성전>!
교단 퀘스트인가?
‘그러면 별로인데.’
남들이라면 교단 기능이 새로 열렸다고 좋아했겠지만 태현은 별로였다.
왜냐하면….
교단이 가난했으니까!
교단이 대륙에 세력을 많이 퍼뜨렸어도 남는 건 별로 없었다.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허덕이는 상황.
‘이름만 들어도 비싸 보이는 기능이고….’
<성전>
아키서스의 이름으로 성전을 엽니다! 성전의 대상으로 지목된 적은 아키서스의 적으로 지목될 것입니다.
‘역시 내가 다 돈을 내야 하나.’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면 교단에서 보상을….
그러나 태현의 판단은 섣부른 것이었다.
-성전은 한 번만 열 수 있습니다.
-신성한 성전의 보상은 아키서스가 직접 내려줄 것입니다.
“!!!”
아니 아키서스가 이런?!
다른 교단이라면 ‘음. 이 정도는 당연히 신이 해줘야지!’ 하는 일이지만 아키서스 교단에서 이런 식으로 해주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원래 이런 교단 아니잖아!
[아키서스도 이런 때가 있는 법이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해줍니다.]
‘너무 감동적인데? 너무 감동적이라서 수상할 정도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현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이런 기회라니!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런데 쓰기가 좀 애매하긴 하군. 길드 동맹하고 한창 싸울 때 얻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길드 동맹도 맛이 가서 쓰기가 아까웠다.
[어차피 곧 적이 또 생길 텐데 그 때를 위해 아껴두라고 카르바노그가 조언합니다.]
맞는 말인데 뭔가 기분 나쁜 조언!
‘하긴 그것도 그래.’
* * *
“우, 우리가 지다니….”
“말도 안 돼…!”
길드 동맹 랭커들은 충격 받은 얼굴로 말했다.
그들이 지다니!
물론 태현한테는 정기적으로 지는 그들이었지만, 그건 예외였다.
김태현 빼면 지는 일이 거의 없었던 그들!
그들이 지금 요새를 버리고 후퇴하고 있었다.
[공성전에서 패배했습니다.]
[요새를 잃습니다.]
[명성이 하락…]
[왕국의 권위가…]
[귀족 NPC들이 이동할 수 있습니다.]
[주민들이…]
신 길드 연합, <미다스> 길드와의 영지전!
오스턴 왕국 서쪽을 차지한 <미다스> 길드와,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는 길드 동맹의 충돌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미다스> 길드는 예상 밖의 저력을 내보였다.
“김태현이면 모를까 저런 떨거지 놈들한테 지다니…!”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길드 동맹 랭커들은 이를 갈며 후퇴했다. 미다스 길드가 저 정도로 사람들을 동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너무 얕본 것이다.
“아탈리 왕국에서 갖고 온 전리품도 일부 뺏겼습니다.”
“크윽…!”
“고개를 들어라! 아직 안 끝났다.”
쑤닝은 소식을 듣고 직접 달려왔다. 길드원들은 쑤닝을 보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던졌다.
“우리가 오늘은 졌다! 그래. 인정한다! 하지만 저놈들은 김태현이 아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단 말이다! 지금 랭커들과 길드원들을 전원 소집하고 있다. 인원이 모이면 저 요새를 다시 공격한다! 길드를 이탈한 저 떨거지 놈들한테 누가 진짜 길드인지 보여주자!”
“…와아아아아아!”
방금 패배로 자칫 분위기가 안 좋아질 수 있는 상황에서, 쑤닝이 직접 복수를 외치자 길드원들은 다시 환호하기 시작했다.
랭커들과 길드원들을 전부 동원하는 복수전!
얼핏 보면 계산이 안 맞는 짓 같았지만, 길드 동맹 입장에서는 이런 일이 필요했다.
길드 운영은 단순히 숫자만으로 되는 게 아닌, 분위기도 있었던 것이다.
<미다스> 길드는 상승세.
길드 동맹은 하락세!
이걸 뒤집기 위해서는 길드 동맹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 * *
“이런 멋진 대장간이라니! 저도 판온을 많이 했지만 이런 멋진 대장간은 처음 봅니다!”
“??”
“????”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은 ‘저놈 뭐야?’ 하는 눈빛으로 손님을 쳐다보았다.
<악마의 대장간>에 오는 손님치고는 특이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보통은….
-으아악! 이게 뭐야!
-저 그냥 가봐도 됩니까?
-여기 대장간 맞습니까?
-아니 대장간인데 왜 무기를 안 만들고….
같은 반응이 나와야 정상!
“너무너무 멋집니다! 이런 대장간이라니. 저희 영지에도 이런 대장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 영지라니. 넌 누구냐?”
“전 <미다스> 길드에서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