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84화
“약간 이상한 사람 같은데….”
졸지에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 김현아!
나름 이세연 길드에서 손꼽히는 실력자 랭커였지만 태현 일행 사이에서는 그런 거 없었다.
“그런데 제대로 빌어야 한다는 게 뭐죠?”
“그러게 말입니다. 기준이 애매한 것 같은데.”
탁-
일행의 목소리에 쿨하게 떠나던 이세연이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돌아왔다.
“???”
“판온 1에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A4 3장 이상 분량으로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말하고 진심을 담아서 사과하는 걸 시작으로….”
이세연은 차분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구체적이고 세세한 지시문에 일행은 모두 경악했다.
이 사람…!
이걸 평소부터 담아두고 있었어…!
* * *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아. 어쩔 수가 없었다니까.”
악마들은 눈물을 흘리며 태현에게 따졌다.
살다 살다 악마를 미끼로 쓰는 인간이 있다니!
“랄그갈을 막았어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안 막았으면 랄그갈이 다 죽였을 텐데. 그걸 원해?”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오히려 더 화를 내는 태현!
악마들은 서러워하며 물러섰다.
“덕분에 살았잖아. 너도 안 죽었고.”
발로 차인 악마는 황당해서 따졌다.
“아니 그게 운 좋게 산 거지 잘못했으면 바로 마계로 퇴출….”
“어쨌든 살았잖아! 죽었냐? 살았잖아!”
“…….”
“…….”
진짜 아키서스 같은 놈!
어쨌든 랄그갈을 밀어내고 지하통로를 탈출하긴 했다.
그렇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일행들은 빠져나오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악마들은 태현에게 말했다.
“헉헉. 아키서스 님. 그런데 약속은….”
“약속?”
“약속 말입니다! 서로가 믿음을 가지고 말했으면 지켜야 하는 거 말입니다!”
악마들은 펄펄 뛰며 외쳤다.
설마 아키서스는 ‘약속’이란 걸 모르는 건가?
역시 인성이….
“아니. 약속이 뭔지는 알거든? 무슨 약속이냐고 물은 거잖아.”
“아….”
“그, 저희 풀어주신다고… 랄그갈을 바쳤으니….”
“아. 그랬지. 오냐. 풀어주마.”
태현은 선선하게 악마들의 목에 있던 폭탄 목걸이들을 풀어줬다.
착착착-
“!!!!”
“정, 정말 풀어주시는 겁니까?”
풀어주니 더 놀라는 악마들!
앨콧과 크로포드는 미친놈들 보듯이 악마를 쳐다보았다.
‘저것들은 뭐 잘못 먹었나? 풀어줘도 난리네.’
“그래. 나는 약속을 지킨다.”
“오오…!”
“감사합니다!”
“다시는 대륙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크흑. 난 마계로 돌아갈 거야!”
눈물을 흘리며 서로 얼싸안는 악마들!
각자 모시는 악마 공작도 다르고 사는 마계의 층도 다르지만, 대륙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은 그들이었다.
“<아키서스 피해자 모임>을 만들어서 마계에서도 만나자!”
“그래…! 우리들 우정은 절대….”
콰콰콰콰쾅!
그러는 사이 뒤에서 굉음과 함께 랄그갈이 통로를 뚫고 빠져나왔다.
-아키서스! 이 더러운… 도둑놈!
“자식. 은근히 빠르네.”
랄그갈은 덩치치고는 속도도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태현은 걱정하지 않았다. 아까 물이 가득 찬 지하통로면 모를까, 밖에 나온 이상 랄그갈이 태현을 잡을 순 없었다.
도망칠 곳도 너무 많고 탈것 수단도 너무 많다!
-이다비! 남은 애들 데리고 도시에서 벗어나! 랄그갈 따돌린 다음에 합류할 테니까!
-태현 님!
-응?
-이세연 씨가 와서 협박하고 갔어요!
-걔가 협박할 게 있나?
태현은 의아해했다.
-랄그갈 잡고 싶으면 자기한테 와서 사과하래요!
-내가 잘못한 게 있나?
-…그, 그건 그렇다 치고….
-이다비? 거기선 내 편을 들어줘야지?
-지금 사람들 데리고 움직일게요!
-이다비? 이다비??
귓속말은 끊겼다. 사실 지금 그렇게 놀 시간은 아니었다.
뒤에서 랄그갈이 쫓아오고 있었으니까!
태현이나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 케인, 앨콧, 크로포드는 얼굴에 긴장이 가득했다.
‘얘는 근데 뭘 믿고 협박하는 거지?’
랄그갈 잡고 싶으면 사과하라니.
태현이 랄그갈을 안 잡으면 그만 아닌가?
물론 랄그갈은 잡을 수만 있다면 모두가 행복한, 어마어마한 전설 몬스터였지만….
태현은 그거 말고도 잡을 보스 몬스터들이 많았다.
안 그래도 마계 한 번 가야 하는데 거기 가는 순간 공작들 얼굴을 돌아가면서 면담하게 될 수도 있었고….
[카르바노그가 마계 갈 때 자기는 여기 있으면 안 되냐고 묻습니다.]
‘하하. 왜 그러세요 신님. 신도랑 같이 가셔야죠.’
[카르바노그가 고개를 저으며 땅에 파묻습니다.]
“김태현! 언제까지 뛸 거야!?”
“알겠어. 용용아, 나와라!”
태현은 용용이를 불러냈다. 그제야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례대로 따라 탔다.
태현의 탈것, 용용이와 흑흑이는 랭커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튼튼하고 빠르고 마법에 광역기까지 다 쓸 수 있는 희귀 탈것!
사람들 사이에서는 ‘야 저거 너무 센데 진짜 드래곤 아니냐?’ 하는 소문도 있었다.
태현이 드래곤을 불러내서 브레스를 쏜 적도 있으니 당연한 소문이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이 진짜 드래곤이겠어? 드래곤 계열 몬스터겠지’라고 생각했다.
드레이크나 와이번 같은, 진짜 드래곤은 아니고 드래곤의 먼 친척 같은 몬스터!
“이거 근데 뭔 몬스터일까?”
“변종 드레이크겠지.”
“아냐. 특수 와이번일지도….”
“키메라일 수도 있어. 저번에 김태현 보니까 키메라도 쓰더라.”
움찔!
케인은 옆에서 움찔했다. 설마 그 키메라가 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키서스, 이 도둑놈! 내가 널 놓칠 것 같으냐!
“놓칠 것 같은데? 네가 어쩔 건데?”
-대륙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널 죽여주마!
“…잠깐. 그건 좀 무서운데.”
해야 할 퀘스트 많은데 랄그갈이 계속 쫓아오면 그건 그거대로 무서울 것 같았다.
“랄그갈! 화해하지 않겠나?”
대답 대신 밑에서 거대한 흑마법의 창이 날아왔다. 용용이는 기겁하며 피했다.
-도발 좀 그만해라, 주인이여!
‘화해하자고 한 건데.’
태현 일행이 공중에서 도주하는 사이, 밑에 남은 악마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랄그갈을 보니 확실히 태현을 쫓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아키서스를 두고 그들 같은 하찮은(?) 악마를 쫓아오진 않겠지!
“휴. 살았군….”
“랄그갈이 우리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
“아키서스 때문에 우리는 이미 잊어버렸을 거야.”
랄그갈은 미친 듯이 마법을 날리면서 쫓아왔다.
뚱뚱한 덩치라 쫓아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몸을 둥그렇게 공처럼 말더니 데구루루 굴면서 쫓아오는 랄그갈!
기겁한 케인은 외쳤다.
“이 악마 놈아! 저기 널 배신한 놈도 있는데 왜 우리만 쫓아오는 거야!”
다급해진 케인은 억울한 목소리로 악마들을 가리켰다.
다 같이 랄그갈을 털었고, 심지어 저놈들은 랄그갈을 배신하고 뒤통수까지 쳤는데도 그들만 쫓아오는 게 억울했던 것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주동자는 아키서스였으니까!
그러나 랄그갈한테는 의외로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굴러오던 랄그갈이 퍼뜩 멈췄다.
악마들은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아키서스도 두려웠지만 랄그갈도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구체적으로 0.5 아키서스 정도로 두려웠다.
“이런 미친 아키서스의 노예 놈아! 우리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네 주인을 닮아서 인성이 정말 아키서스 같구나!”
악마들은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랄그갈이 멈춰서 섬뜩하게 노려보는데 보통 무서운 게 아니었다.
“잠… 잠깐, 지금 도와달라고 해야 하지 않나?”
주케넨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외쳤다.
지금 날아가려고 하고 있는 태현 일행한테 빌지 않으면 그들은 랄그갈한테 꼼짝없이 죽을 상황!
“…진,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다른 악마들은 경악한 얼굴로 주케넨을 쳐다보았다.
저놈이 아키서스와 손을 잡고 우리를 팔아먹더니 드디어 개소리까지 하는구나!
“진짜고 뭐고 간에 안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 그냥 랄그갈한테 죽을 거냐?”
“사정을 잘 말해서 설득을….”
-배신자 놈들…! 먹는다! 영원히! 가둔다! 너희 같은 쓰레기 놈들은 마계에도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가둬주마!
콰직콰직!
랄그갈은 몸을 쭉 펴더니 주변 나무와 돌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그러자 공간이 드러나며 악마 일행들이 그대로 나타났다.
“히이익!”
“저게 설득될 것 같냐!”
분노 100%인 랄그갈!
배신을 당했는데 당연히 열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키서스 님! 제발 구해주십시오!”
상황 파악을 끝낸 악마들은 태현 일행을 보며 애타게 외쳤다.
랄그갈에게 죽기 vs 아키서스 밑에서 살기!
정말 짜증 나는 선택이었지만 후자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태현은 못 들은 척 용용이한테 말했다.
“빨리 가자.”
“아키서스 니이이임! 일생을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개처럼 부려주십시오!”
“진짜?”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저도 제 이름을 걸고….”
“흠.”
이름까지 걸고 일생을 바쳐 충성한다고 하자 태현은 솔깃했다.
악마 우리에 넣어서 뽑아먹을 정도로 강력한 놈들은 아니지만, 악마 종족은 언제나 써먹기 좋은 인재였다.
천사 종족 NPC는 어디에 가져다 둬도 평균 이상을 하는 만능 종족이라면, 악마 종족 NPC는 전문 분야를 맡겨 놓으면 능력을 보여주는 종족!
“그렇게 말한다면야 한번 생각해 볼까….”
“으아악! 먹힌다! 먹힌다고!”
“아키서스! 살려놓고 생각해! 이 개자식아! 죽으면 평생 원망할….”
“넌 탈락이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으헝헝!”
악마들은 울며불며 빌었다.
깔끔하게 마계로 퇴장당하면 모를까 랄그갈은 마계로 보내주지도 않을 것 같은 기세였다.
“케인. 태워줘라.”
촤르르륵!
노예의 쇠사슬이 뻗어져 날아오자 악마들은 감사히 그걸 붙잡았다.
노예의 쇠사슬이지만 지금은 생명줄처럼 느껴질 정도!
“크흑… 살았어! 살았다고!”
“이게 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았어!”
-놓칠 것 같으냐…!
[랄그갈이 <랄그갈의 추적>을 사용합니다!]
[랄그갈은 당신의 냄새를 완벽하게 기억합니다!]
[랄그갈은 대륙 끝까지 당신의 냄새를 기억할 것입니다!]
“…….”
빠르게 날아가던 태현은 메시지창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아니… 뭐 이런….”
이런 상도덕도 없는 스킬을 봤나!
저주가 아니라서 떠넘기기도 안 되고….
‘가면으로 변신해 볼까?’
[랄그갈은 당신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랄그갈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아. 젠장.”
거리는 벌써 안 보일 정도로 멀어졌지만, 메시지창은 계속 보였다.
[랄그갈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랄그갈이 가까워졌…]
[카르바노그가 X된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래. 그런 거 같다.”
한 지역에 일정 시간 있으면 무조건 랄그갈을 만날 수밖에 없다!
태현은 한숨을 쉬었다. 전설 퀘스트를 쉽게 깬다 했더니….
“어떡하지?!”
“뭘 어떡해. 침착하게 해. 어차피 오려면 시간 좀 있을 테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태현은 적응하기로 했다.
아이템 확인하고 스킬 확인하고 이동.
퀘스트 보상 받고 이동.
랄그갈 잡기 전에 에랑스 국왕 전설 퀘스트는 완료해야지!
“국왕한테 치료제 갖다 주고 생각하자고.”
“국왕이랑 기사한테 싸움 맡기면 안 되나?”
“나도 그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태현은 망설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박이었다.
예전 오크 대족장 때와 달리 이번에는 떠넘기기가 불가능한 상황!
만약 에랑스 국왕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랄그갈이 성문 깨고 들어와서 ‘아키서스 나와 개자식아!’이러기라도 한다면….
물론 랄그갈도 두들겨 맞겠지만, 태현도 뒷감당할 게 너무 많았다.
악마를 왕궁에 끌고 왔다고 전설 퀘스트 보상을 못 받으면 피눈물이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