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83화
“진짜로?”
“더 안 확인한다고?”
앨콧과 크로포드는 당황했다.
물론 지금 상황이 긴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전설 퀘스트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서 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니!
“기다려봐! 지하실이 있을 수도….”
“숨겨진 공간이 있을 수도 있어!”
“스킬 썼는데 그런 거 안 보였다.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거 찾느라 시간 더 낭비할 수 없어. 움직인다!”
-태현 님! 랄그갈이 지하로 빠졌어요!
“!”
이다비에게 들려온 귓속말.
밖에 남겨진 일행은 그냥 기다리고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바깥 상황 중계도 담당!
-뭐? 이세연이랑 싸우는 게 아니었어?
-정확히는 이세연이 아니라 미다스 길드 랭커를 패고 있었지만… 어쨌든 네! 태현 님을 눈치챈 것 같아요!
‘너무 날뛰었나?’
번개로 그렇게 지져대고 안을 탈탈 털어댔으니 눈치채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알겠어. 지금 빠져나간다.
-맞다. 태현 님.
-?
-나올 때 여유 되면 오염된 물도 좀 담아와 주세요!
-!
태현은 깜짝 놀랐다.
생각해보니 ‘내가 왜 안 챙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왕아. 가다가 다 마시는 거다. 알겠지?”
-카릉….
토왕이는 세상에서 가장 싫은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달려!”
일을 마친 태현 일행은 호다닥 성소를 빠져나가 밖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천장이 열리며 랄그갈이 착지했다.
[랄그갈이 나타납니다!]
[랄그갈이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침입자들을 보고 극도로 분노합니다!]
[랄그갈이 아키서스의 힘을 느끼고 더더욱 분노합니다!]
[랄그갈이 자신의 실험실이 박살 난 걸 보고…]
[……]
더 이상 분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
[쟤는 뭐 저리 화가 많냐며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죽인다! 아키서스! 갈그랄의 원수!
“사람 잘못 본 거 아니냐?”
태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거리를 벌렸다. 랄그갈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래도 이미 통로 쪽으로 몸을 피한 상황!
랄그갈이 아무리 쫓아와봤자 저렇게 커다랗고 뚱뚱한 덩치로는 통로까지 쫓아오지 못할….
-포식의 아가리!
[랄그갈이 <포식의 아가리> 스킬을 사용합니다!]
[주변 모든 것들이 빨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
소형 블랙홀!
마치 블랙홀 같은 효과와 함께, 랄그갈이 쩍 벌린 거대한 주둥이로 주변의 잔해들이 우르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갈그랄처럼 근육질 전사 타입이 아니라서 만만해 보였지만, 랄그갈은 갈그랄보다 더 까다로운 악마였다.
어마어마한 내구력과 마법 저항력으로 버티면서 상대를 짓눌러버리는 보스 몬스터!
태현이 여기서 난리만 치지 않았어도 위에 있던 미다스 랭커 둘은 죽었을 것이다.
“내 <노예의 쇠사슬>보다 좋잖아?!”
“지금 그 소리를 할 때냐?!”
앨콧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외쳤다. 허리케인이라도 부는 것처럼 온몸이 저쪽으로 끌려가고 있는데 케인 저놈은 자기 스킬이랑 비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노예의 쇠사슬>은 내 긍지….”
“너 스킬 이름 말하면서 위화감 안 들디?!”
“으아악! 살려주십시오! 아키서스님!”
가장 뒤에서 미적거리던 악마 하나가 랄그갈의 입으로 쑥 들어갔다.
검게 이글거리는 <포식의 아가리>에 들어간 악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저 스킬 탐나는군.’
[카르바노그가 조심하라고 외칩니다! 저기 들어갔다가는 아무리 아키서스의 화신이라도 뼈도 추리지 못한다고…]
‘나도 알고 있어.’
태현은 고민했다. 저 스킬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크로포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크로포드는 태현이 왜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여기서 원거리 딜이 가장 높은 건 마법사인 그였으니까.
그렇지만 랄그갈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랄그갈의 마법 저항력이 너무 높습니다! <신화 시대의 화염 창>이 데미지가 크게 감소합니다!]
[랄그갈의 화염 저항력이 너무 높습니다! …]
[……]
한 대 때리면 데미지가 미친 듯이 깎여나갔다는 메시지창이 우르르 떴다.
그만큼 랄그갈이 단단하고 튼튼했던 것이다.
“우습게 생긴 놈이 뭐 이렇게 단단해…!”
크로포드는 이를 갈며 닥치는 대로 화염 마법을 퍼부었다. 뚱뚱한 공처럼 생긴 랄그갈이 슬슬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MP를 너무 많이 사용했습니다!]
[MP가 회복되는 속도가 느려집니다!]
[MP 고갈…]
[MP 드레인 상태에…]
‘큰일났다!’
크로포드는 절망했다.
랄그갈은 꿈쩍도 안하는데 MP는 벌써 고갈 나고 있었다. 너무 급하게 쓴 탓에 디버프까지 걸리는 상태.
여기까지인가?
‘김태현한테 아까 마법 난사 스킬을… 아니, 그래도 크게 의미 없겠군.’
크로포드의 마법이 막힌다면 태현의 마법도 크게 효과를 보진 못하리라.
바로 그때 랄그갈의 입이 터져나갔다.
-쿠아아아아아악!
“?!?!?”
“뭐, 뭘 한 거야?”
“아. 폭탄 목걸이.”
태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잡아먹힌 악마들은 목에 폭탄 목걸이를 차고 있었던 것이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랄그갈에게 처음으로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입혔습니다! 칭호: 폭군 악마의 타도자를 얻었습니다!]
[랄그갈의 <포식의 아가리>가 취소됩니다!]
[랄그갈이 비틀거립니다!]
“지금 들어가?!”
케인은 태현을 보며 물었다.
“뭘 들어가?!”
그걸 들은 앨콧은 기겁해서 물었다.
“아니. 자폭할 필요 없어! 빠진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폭탄이 터진 덕분에 운 좋게 데미지가 들어가긴 했지만, 태현은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퀘스트!
랄그갈을 잡는 건 최우선 목표가 아니었다.
‘반응 보니 해독제 챙긴 거 맞는 거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없었다. 태현도 아까 <포식의 아가리> 같은 스킬은 좀 섬뜩했었다.
회피고 뭐고 간에 그냥 꿀꺽해 버리는 미친 사기 스킬!
차라리 갈그랄이 그리웠다. 갈그랄이 더럽게 세긴 했어도 저런 특수 스킬로 싸우는 타입이 아닌 전사 타입이었으니까.
-크아아! 크아아아아!
정신을 찾은 랄그갈이 울부짖었다.
“깼다!”
“걱정 마! 어차피 <포식의 아가리>는 다시 못 쓸 거다.”
폭탄 목걸이 맛을 본 랄그갈이 바로 스킬을 쓰지는 못하리라.
태현의 예상은 사실이었다.
대신 랄그갈은….
와그작와그작와그작!
“!!!”
“!!!!!”
비좁은 통로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며 따라붙기 시작했다.
“미, 미친놈!”
[지하통로의 구조가 약해집니다!]
[현재 무너질 확률이…]
[……]
눈이 돌아간 악마는 이 지하가 무너지든 말든 미친 듯이 몸을 요동치며 쫓아왔다.
케인은 거의 울상이 되어 몸을 놀렸다.
가상현실게임이지만 정말로 무서웠던 것이다.
“김, 김태현…!”
“걱정 마라. 멈출 테니까.”
태현은 말과 함께 악마 하나를 뻥 찼다.
“?!?!?!?”
밀려난 악마는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랄그갈한테 날아갔다.
랄그갈은 그걸 보고 악마를 꿀꺽 삼키지….
못했다.
호다다닥!
미친듯이 쫓아오던 랄그갈이 멈추더니 뒤로 후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봐라. 멈췄지?”
“…!!”
[악명이 크게 오릅…]
* * *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은 태현이 올라오면 바로 빠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이세연이 오기 전까지는.
“으아아! 이세연 씨다!”
이다비는 깜짝 놀라 외쳤다.
“으헉! 이세연 씨잖아!”
정수혁도 깜짝 놀라 외쳤다.
“…….”
유지수는 일단 화살부터 장전하고 조준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아무리 봐도 위험!
“저기 싸울 생각은 없….”
“다가오지 마십시오!”
“손에 아무것도 안 들고 있….”
“투명 지팡이가 분명합니다!”
“…….”
이세연은 할 말을 잃었다.
경계심 100%!
“…내 말 안 들으면 전부 다 쓸어버린다!”
“말, 말하십시오.”
정수혁은 겁을 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세연은 한숨을 푹 쉬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현아가 속삭였다.
“언니. 그냥 다 쓸어버리죠.”
“그건 화풀이잖아….”
김태현한테 당한 걸 김태현 친구들한테 풀어야 한다니.
“화풀이가 얼마나 좋은데요!”
복수는 나의 것!
김현아는 복수를 매우 좋아했다. 하면 얼마나 속이 시원한가.
태현이 들었다면 ‘뭘 좀 아는군!’ 하고 감탄했을 사상!
“추하거든? 아까 이미 충분히 추하게 굴어서 더 추하고 싶지 않다구. 그리고 내가 파워 워리어 길마를 잡으면 좀 질투하는 것 같….”
“네?”
“…아냐. 됐어.”
“??”
이세연은 말을 돌렸다.
김현아를 설득하려면 차라리 다른 말이 나을 것 같았다.
“저기 보여?”
“네. 보이는데요.”
이세연은 유지수를 가리켰다.
“쟤가 회장님 손녀야.”
“…네?”
“유성 그룹 회장님 손녀라구.”
“충….”
“?”
“충성충성충성…?”
김현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언, 언니. 그런 애였으면 미리 말해줬어야죠!”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랬지….”
“저 쟤한테 싸가지 없이 굴지 않았죠?”
“넌 안 그랬어. 김태현한테만 그랬지.”
“다, 다행이다.”
자본주의 판온!
아무리 세상 무서운 게 없는 김현아라도 고용주 손녀는 무섭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쟤 그렇게 나쁜 애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분명 캡슐에서 나오면 회장님한테 가서 제 이름을 말해서 방출하라고 할 거에요! 언니랑 더 이상 같이 있지 못할 거라구요!”
“그럴 애 아니라니까….”
이세연이 직접 상대한 유지수는 놀라울 정도로 착한 애였다.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데도 저렇게 착한 애는 흔치 않았다.
“음. 저기.”
이세연은 다시 태현 일행을 쳐다보았다. 유지수는 경계하듯이 쳐다보았다.
김현아는 억지로 웃으면서 유지수를 쳐다보았다.
유지수는 더욱 경계!
“어… 어째서?!”
“너무 수상하게 웃잖아 너…! 잠깐 기다리고 있어.”
김현아는 시무룩해져서 물러섰다.
정말 잘리진 않겠지?
머릿속에서는 ‘회장과의 식사를 거절한 선수… 괘씸죄로 방출’ 같은 예전에 본 기사들이 아른거렸다.
그러는 사이 이세연은 할 말을 했다.
“김태현한테 랄그갈을 상대하고 싶으면 나한테 찾아오라고 해.”
“…?”
“그, 그게 다입니까?”
“그게 단데.”
“저희를 죽이거나… 저희를 죽인 다음 언데드로 부활시킨 다음 다시 죽이거나… 쫓아가서 또 죽이거나… 안 합니까?”
묘하게 구체적인 보복 방법!
이세연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짓 안 해. …잠깐. 그 묘하게 구체적인 방법들은 누가 말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구체적이었다. 이런 걸 말할 사람은….
“…….”
일행은 모두 입을 다물었지만 이세연은 바로 눈치챘다.
이세연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다.
‘무서워!’
‘무서워요!’
‘진짜 무섭다!’
화사하고 산뜻한 미소인데 주변 온도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김태현한테 이것도 전해줘.”
“?”
“나하고 손 잡고 랄그갈 상대하고 싶으면 아주 제대로 빌어야 할 거라고.”
그 말과 함께 이세연은 돌아섰다. 남은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다다다-
“!”
갑자기 김현아가 달려오자 일행은 모두 긴장했다.
뭐지?
“저… 여기 포션. 이거 쓰세요! 궁수한테 좋아요!”
“…감, 감사합니다?”
유지수는 당황한 표정으로 포션을 받았다.
“이 화살도 받아주세요! 오리하르콘이 아주 조금 섞인 순은 화살이에요!”
“…?”
와르르-
김현아는 한 보따리 정도 유지수한테 넘겨주고서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파이팅!”
“파… 파이팅?”
“다음에 봐요!”
“…???”
“저 사람 왜 저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