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72화
‘그때 잘 들어뒀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주케넨은 스스로의 기억력에 감사했다.
악마들은 내려오면서 에랑스 왕국에서 뭘 할지 계속 떠들어댔었다.
-크크크. 나는 가서 귀족들을 타락시킬 거다.
-나는 일단 평민 놈들부터 공략하겠어. 그놈들은 아주 속이기 쉽거든.
-멍청한 놈들. 일을 하려면 크게 해야지. 나와 같은 주인님을 모시는 선배 악마가 계시는데, 그분께서 에랑스 왕국은 아주 꽉 잡고 계신다. 그분한테 갈 생각이다.
-오….
-정말로? 얼마나 대단하길래?
-놀라지 마라. 무려 에랑스 왕국의 귀족이시다.
-그런!
-기사단까지 데리고 있을 정도니….
-오오오!
감탄하는 악마들!
결국 다른 곳에 갈 악마들도 그 악마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악마들이 대륙에 내려오는 건 다른 종족들의 감정과 영혼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다른 악마들과 협업도 할 수 있었다.
“주케넨. 왜 말이 없지?”
-아닙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에랑스 왕국… 가깝긴 한데, 그 악마들이 어떤 수준인지가 중요하잖아. 만약 갔는데 하급이나 중급이었어 봐. 인건비도 안 나와.”
중급 악마 정도면 그냥 소환으로 해서 불러내는 게 빠르겠다!
우리에 넣어봤자 바로 죽어서 마계로 역소환 될 게 분명했다.
-아닙니다! 놈들은 다 상급 이상의 악마였고, 들어보니 에랑스 왕국에 또 다른 악마는 더 강한 악마였습니다.
“흠….”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좋아. 네 말을 믿어주지!”
-!
주케넨은 감동해서 이마를 우리 바닥에 박으며 울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뭘 이런 걸 가지고.”
훈훈한 화신과 악마!
구시온은 매우 질투하는 얼굴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 * *
“어쩐지 사람이 좀 적다?”
에랑스 왕국에 들어선 태현은 의아해했다.
원래라면 마을 밖 필드의 인기 사냥터는 사람들로 꽉 차 있어야 했다.
모든 사람들이 태현처럼 대박 퀘스트로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퀘스트를 깰 수 없을 때에는 인기 사냥터에서 레벨업하는 게 보통!
그런데 인기 사냥터에도 자리가 보일 정도로 사람들 숫자가 적었다.
“아. 그거네요. 지금 에랑스 왕국에 퀘스트 떴잖아요.”
전설 등급 퀘스트!
에랑스 왕국 국왕이 쓰러진 초유의 사태에 나온 퀘스트였다.
‘아. 이게 있었지.’
태현은 다시 한번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생각해 보니 귀족들 때려잡느라 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치료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에랑스 국왕의 질병 치료–에랑스 왕실 퀘스트>!
위대한 에랑스 왕국의 국왕이 쓰러졌습니다!
왕국의 사제들과 마법사들이 나섰지만 제대로 된 치료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에랑스 왕국의 국왕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지 알아내는 건 위대한 모험가만이 가능한 일일 겁니다.
에랑스 왕국의 국왕이 걸린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오십시오!
성공한다면 막대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보상: ?, ???, ?????
“한 1개월은 넘은 거 같은데, 다들 슬슬 퀘스트 중반은 넘지 않았을까?”
유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보 공개를 안 해서 그렇지 그럴걸요? 제가 아는 파티들도 깨고 있는데 다들 쉬쉬하면서 깨나 봐요.”
전설 등급, 아니 희귀 등급만 돼도 퀘스트는 원래 정보를 숨기는 게 심했다.
먼저 열심히 깨고 있는데 정보를 보고 온 사람이 뒤늦게 역전해서 깨버리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는 것이다.
아예 대놓고 퀘스트 깨는 걸 공개하면서 방송하는 사람도 몇 명 있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은 별로 이득을 보지 못했다.
귀신같이 견제받거나 뺏기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 * *
<검은 바위단>의 구성욱은 길드원들과 함께 조그만 성의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찾았다! 이놈!”
[역병을 팔아넘긴 마법사 퓨에라스를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찾았어!”
“좋아!”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환호했다. 지금 보니 다른 플레이어들은 이 조그만 성을 아직 찾지 못한 것 같았다.
국왕이 쓰러지고 나서부터 시작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연계 퀘스트.
실낱같은 단서들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다. 왕궁에 들린 적이 있는 수상쩍은 마법사!
펄럭!
“어, 어!!”
“도망치잖아?!”
“말도 안 돼! 스킬 봉인을 다 걸었는데!”
각종 디버프와 저주를 맞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서 도망치는 마법사를 보며 길드원들은 경악했다.
“놓치면 안 돼! 잡아!”
그러나 이미 마법사는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길드원들은 절망했다.
“안 돼…!”
“크흐흑!”
세상이 무너져도 이렇게 슬프게 울지는 않을 것이다.
기껏 다 잡은 단서가 날아가다니!
“아… 이거 진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 * *
“내가 생각하기에 이 퀘스트는 단서가 너무 많은 게 함정이야.”
“그런가요 언니?”
이세연의 말에 김현아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래. 난이도 높은 퀘스트에서 단서가 너무 많다는 건 하나밖에 없어. 대부분이 함정이라는 거지. 따라가 봤자 찾기 힘들거나 가짜거나….”
“그러면 어떻게 깨야 해요?”
“조금 기다릴 필요가 있어. 이런 장기 퀘스트는 아무리 정보를 숨겨도 조금씩 새어 나오게 마련이니까.”
모두가 보는 공개 게시판에는 정보가 나오지 않았지만, 정보를 사고파는 비밀 사이트에서는 이런 정보들이 공유가 됐다.
-XX 파티 지금 아오스 영지에서 발견! 퀘스트 진행 중!
-YY 파티 구성원과 퀘스트 진행도 알고 싶으면 클릭!
-충격! <파워 워리어>가 그럴 수가… 경악!
-위의 파워 워리어 올린 새끼 누구냐? 상도덕도 없는 새끼! 이런 걸로 낚시를 해?! 파워 워리어에서 등산으로 친목회 했다는 걸 누가 궁금해해!
돈을 내고 정보를 얻는 것이다. 판온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완전히 숨기기는 힘들었다.
“기다리다 보면 정보를 모아서 판단할 수 있지. 그때까지 사냥하면서 기다리자.”
지금 이세연은 유성 게임단 단원들을 이끌고, 유성 게임단 방송을 켜놓고 사냥을 진행 중이었다.
덕분에 그 인기는 최고였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개인 방송 중 TOP 3에 드는 시청자 숫자!
이세연의 이름은 원래부터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이번에 유성 게임단이 준우승을 하긴 했지만 그걸로도 충분히 인상이 깊었던 것이다.
-이세연이 퀘스트 깨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너무 오래 아무것도 안 하잖아.
-이세연 님. 오늘은 뭐 하실 거예요?
-이세연 혹시 개인 방송에 김태현 부를 생각은 없음? 그럼 대박일 거 같은데.
-맞아. 맞아. 둘이 같이 방송하는 거 보고 싶다.
심심하면 한 번씩 올라오는, ‘김태현도 방송에 불러주면 안 되냐?’는 질문들.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도 당연했다.
판온에서 가장 유명한 두 랭커였으니까.
만약 여기 태현이 나온다면 시청자 숫자는 하늘을 뚫고 돌파할 것이다.
실제로 유성 게임단의 홍보부 직원들은 조심스럽게 이세연한테 물은 적이 있었다.
-혹시 이벤트로 김태현 선수와 같이 방송할 생각이… 헉. 죄송합니다.
-그러면 사진이라도 같이… 죄송합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물론 다들 이세연의 표정만 보고서 식겁하고 물러섰다. 그렇지만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같이 방송 안 하고 사진만 찍어서 홍보해도 효과가 대단할 텐데!
“언, 언니! 빨리 사냥 가죠!”
김현아는 볼 수 있었다.
이세연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주먹은 불끈 쥐어지는 것을!
채팅창을 안 본 척하고 있었지만 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채팅에 김태현 선수 이야기가….”
“아. 닥쳐요 좀.”
“넵.”
태현의 광팬인 류태수는 뭔가 말하려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말했다가는 진짜 처맞을 거 같다!
* * *
“앨콧 남작님!”
“뭐라고?”
“앨콧 남작님?”
“다시 한번!”
“…….”
[경비병들의 친밀도가 하락합니다.]
[경비병들이 당신을 거만한 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경비병들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돕니다.]
[계속 소문이 퍼져나갈 경우 안 좋은 칭호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한 거 아냐?!’
앨콧은 깜짝 놀랐다.
남작님이란 소리 듣기 좋아서 몇 번 더 했을 뿐인데 이렇게 우르르 페널티가 오다니.
낮은 명성+낮은 화술 스킬+높은 악명의 3단 콤보 때문이었다.
이런 상태면 아무리 귀족이라도 말 몇 마디 하면 경멸을 살 수 있었다.
“크흠. 안으로 들어가 보겠네.”
앨콧은 영주의 내성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일반 플레이어들은 들어갈 수 없지만, 앨콧은 이제 귀족이자 영주.
내성 정도는 들어갈 수 있었다.
“안 됩니다.”
“그래. 고맙… 뭐?! 어째서!?”
“주인님께서 그… 음….”
“…말해라!”
경비병이 망설이자 앨콧은 재촉했다. 여기 영지의 영주가 대체 뭐라고 명령을 내린 걸까?
“…일정 신분 이하의 귀족은 들이지 말라고 하셔서….”
“그러니까 이 앨콧이 신분이 낮아서 못 들어간다?”
“…예.”
“이 자식! 영주 나오라고 해!!”
“멈춰 인마! 뭐하는 거야!”
화염술사 랭커, 크로포드는 앨콧을 붙잡고 말렸다.
-야. 나만 믿어라. 내가 누구냐. 에랑스 왕국의 귀족 아니냐? 내성도 프리패스라 이 말이야.
-오… 좀 존경스러운데?
…란 대화를 나눈 지 10분 전.
앨콧은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저놈만 특이한 거야!”
자신만만한 척했다가 개망신을 당한 앨콧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매달렸다.
내가 반드시 들어가고 만다!
물론 그런다고 닫힌 문이 열리진 않았다. 앨콧처럼 낮은 화술 스킬로 경비병을 설득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크로포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다른 방법으로 들어가자. 몰래 잠입하던가 아니면 공적치 포인트 올려서 만나겠다고 해.”
“안 돼…! 정당하게 들어갈 거야!”
‘이 자식이랑 괜히 같이 왔나?’
크로포드는 살짝 후회됐다.
그래도 판온에서 나름 궂은일을 같이 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놈이긴 한데….
‘실력은 괜찮은데 하는 짓이 뭔가 좀….’
다 좋은데 실수 하나를 이렇게 하는 게 앨콧!
지금도 추하게 굴고 있지 않은가.
“크흑… 으흐흑흑….”
앨콧은 결국 물러섰다. 크로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고 보자…!”
“야. NPC한테 뭘 두고 보자는 거야?”
“용서 못 해! 내가 길드 동맹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아. 길드 동맹. 요즘 잘 돌아가냐?”
크로포드는 궁금해했다.
길드 동맹이 쪼개지고 나서 소문만 무성했었다.
-길드 동맹, 곧 파산 신청? 판온 최대 길드의 종말인가?
-길드 동맹. 아탈리 왕국 약탈…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친 짓 같아요’라고 밝혀….
그런데 용케 안 망하고 굴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앨콧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돌아가긴 돌아가. 일단 한숨 돌리고, 투자자들도 투자한 게 있으니까 지켜보겠다고 하고, 왕국 서쪽 날아간 거 말고는 어떻게든 수습하고 있지.”
“근데 넌 그냥 나오는 게 낫지 않냐? 에랑스 왕국에서 영주면 다른 길드가 나을 텐데?”
“으윽… 그렇긴 하지….”
앨콧은 머뭇거렸다.
길드 동맹에 있는 이유는 두 가지.
길드 동맹의 환대와 태현의 명령 때문이었다.
길드 동맹 입장에서 앨콧은 중국인이 아닌데도 충성을 바치는, 진짜배기 플레이어였다.
오죽하면 ‘넌 중국인이다!’라는 말까지 해줄까.
“나보고 중국인 같다고 하더라고.”
“오….”
“방금 그 ‘오’는 뭐냐?”
“아냐. 좋은 뜻이었어.”
“…어쨌든 길드 동맹도 나름 잘해주고 있으니까… 좋아. 간다.”
“?”
“경비병을 죽이고 들어간다!”
“…….”
크로포드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