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61화
‘이게 바로 단결의 힘인가!’
혼자 하면 할 수 없지만 여럿이서는 할 수 있다.
이것이 함께한다는 것인가!
판온 1 때는 대부분 혼자 플레이를 했던 태현이었기에 이런 기분은 알지 못했었다.
사람들이 이래서 우정, 단결을….
[카르바노그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도시를 점령한 플레이어들과 단결, 우정은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광기!
실제로 악마들이 발견되고 있으니 플레이어들은 더더욱 신이 나서 도시를 헤집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태현이 그렇게 흐뭇해하는 동안 볼로네 백작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외쳤다.
“폐하! 제 영지입니다!”
“알아. 알아. 누가 모른다고 했나?”
“어떤 정당한 이유를 붙이더라도 저 사악한 무리가 제 영지를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장 저들을 토벌해 주십시오!”
“오. 말 잘하는데?”
“그러게. 백작 자리는 그냥 딴 게 아니구나.”
태현 일행은 수군거렸다. 의외로 볼로네 백작이 물러서지 않고 잘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더럽고 치사해서 그냥 물러설 줄 알았는데!
그만큼 볼로네 백작이 곤란한 상황이기도 했다.
기사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왔다가 졸지에 자기 성을 잃어버리게 생긴 것이다.
판온 역사상 전례가 없던 희귀한 일!
그러나 볼로네 백작은 눈앞의 왕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현도 판온 역사상 전례가 없던 양심 없는 왕!
명성이 높고 업적이 많다고 모두가 고귀한 양심을 가진 건 아니었다.
“듣기 싫다! 볼로네 백작! 자기 영지에 날뛰는 도적도 해치우지 못해 내가 해결해 줬거늘, 자기 영지의 백성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이런 일을 만들다니! 그대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자기 영지의 일은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라! 만약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백작 작위를 회수하겠다!”
“!!!”
[영주 귀족의 백작 작위를 회수할 경우 다른 귀족 NPC들이 격렬하게 반발할 수 있습니다!]
[반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최고급 화술 스킬을…]
[현재 왕의 권위가 높습니다.]
[현재 왕국의 치안이…]
[현재 왕국의 평판이…]
[……]
[반란의 확률이 줄어듭니다.]
‘됐군.’
태현은 안심했다. 지르면서도 살짝 걱정했던 것이다.
아탈리 왕국은 각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영주 귀족들과, 그들 위에 있는 국왕 태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왕이라고 해도 직접 다스리는 곳은 수도와 골짜기뿐!
다른 영주보다 좀 더 권한이 많고 강력한 영주일 뿐,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태현 같은 경우는 왕관을 썼을 때 살라비안 교단 습격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군대를 만들고 도시를 관리해야 했다.
‘아키서스 교단 때부터 그랬던 거 같은데….’
생각해 보니 서러워진다!
남들은 완성된 걸 먹는데 태현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스스로 해야 했다.
어쨌든 국왕이라고 해도 귀족들이 단체로 반란을 일으키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다른 귀족들이 태현을 무시해도 태현이 참았던 이유기도 했고.
이번 난리를 기회로 귀족들을 하나씩 때려잡고 있는 지금 상황.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간다!
태현은 내친김에 백작 작위도 뺏어볼 생각이었다.
다행히 생각했던 것처럼 반란 확률이 높게 나오진 않았다.
“폐하! 폐하!”
볼로네 백작이 애타게 외쳤지만 태현은 못 들은 척하고서 재빨리 움직였다.
원래 이런 건 자기 할 말만 하고 빠르게 빠져야 했다. 아무리 태현이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오래 이야기하다 보면 말꼬리를 잡힐 수 있었다.
“와. 지금 볼로네 백작 더 아쉽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백작이 급하게 성 찾으려고 하면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케인은 감탄했다.
볼로네 백작에게서 골드를 더 뜯어내려고 저러는 거구나!
“무슨 소리야? 볼로네 백작이 성 못 찾게 할 건데. 다들 모여. 지금 볼로네 백작령으로 가서 공성전 준비할 거니까.”
“…?!?!?”
볼로네 백작이 성을 못 찾도록 확실히 방해해 줄 생각!
* * *
“야, 야! 아무리 생각해도 오바야!”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선배.”
“들키면 뒷감당이 불가능하지 않나? 게다가 막아내서 점령한다 치면 어떻게 하려고?”
태현이 날름 새 영주가 되어버리면 볼로네 백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는 귀족들을 총동원해서 ‘아이고 저 국왕 놈이 죄 없는 귀족들의 영지를 뺏는다!’라고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걱정 마라. 내가 먹을 생각은 없거든.”
지금 있는 수도와 골짜기도 골드 잡아먹는 괴물이었다.
영지에 건설할 골드만 아꼈어도 진짜 현실에서 건물 하나를 샀겠다!
“??”
“그러면 왜 막는 건데? 누가 영주를 하려고?”
“누가 먹든 지금 볼로네 백작보다는 나한테 협조적일 테니까. 수도 때처럼 똑같이 할 거야.”
태현은 수도를 점령했을 때 유지비와 수리비를 충당하기 위해 플레이어들을 끌어들였다.
물론 왕궁 주변 내성은 태현이 갖고, 나머지 인원들에 태현 일행을 앉혀놔서 실질적으로 태현이 통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교훈을 얻은 태현이었다.
볼로네 백작령은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볼 생각!
태현이 손을 떼고, 거기 모인 플레이어들이 정말 알아서 통치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어차피 태현이 먹어봤자 뒤탈만 날 영지, 선심 크게 쓰는 게 좋았다.
[카르바노그가 역시 선심은 남의 재산으로 해야 한다고 감탄합니다.]
“들어라!”
“??”
웅성웅성-
곳곳을 뒤지며 ‘너 악마지!’, ‘여기 악마 숨겼지!’ 하던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태현이 광장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이렇게 악마 토벌에 열심히 하는 것에 감동했다!”
“와아아아!”
“우리가 열심히 하긴 했지!”
“악마 많이 잡았어요!”
“그래서 나는 결정을 내렸다.”
“…?”
플레이어들은 숨을 죽이고 태현의 입만 쳐다보았다. 태현이 대체 무슨 결정을 내린 것일까?
“악마를 몰아내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너희들에게 이 도시를 주겠다고!”
“…….”
“…!!!”
너무 충격적인 말이어서 반응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세상에 플레이어들한테 그냥 영지를 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작은 마을이나 요새라도 플레이어들은 영지를 갖고 싶어했다.
에스파 왕국, 오스턴 왕국에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치고받고 영지전을 펼쳤는가.
그저 영지 하나가 갖고 싶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이득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득을 떠나서 영지는 플레이어들의 로망이었다.
“열심히 퀘스트를 한 너희들에게 줄 만한 보상이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이 영지는 너희들의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광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광장에 동상을 세우자!”
‘어떤 놈이야?’
태현은 홱 고개를 돌려 노려보았다. 생김새가 어째 기계공학 대장장이 같았다.
“이 영지는 너희들의 영지다!”
“와아아아아!”
“최선을 다해서 지켜라! 다시 찾으러 오는 놈이 있어도 상관하지 말고 말려라!”
지금 볼로네 백작이 듣는다면 뒷목을 잡을 소리!
때마침 메시지창이 떴다.
[볼로네 백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공성전을 시도합니다!]
[내성을 일정 시간 이상 점령당하면 공성전에서 패배합니다.]
<볼로네 백작령을 지켜라!–공성전 퀘스트>
사악하고 비열한 악마에게 점령당한 볼로네 백작령!
악마의 마수는 일반 NPC뿐만 아니라 영주한테까지 미쳤다.
볼로네 백작은 악마에게 홀려 악마를 퇴치하는 당신을 쫓아내려고 했다.
이에 영웅인 아탈리 국왕은 당신들에게 볼로네 백작령을 맡겼으니, 백작령의 미래는 당신에게 달렸다!
악마와 볼로네 백작을 퇴치하고 볼로네 백작령을 정화하라!
보통 영지전이나 공성전에서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길드 단위로 붙는 영지전이면 그나마 길드원들이 열심히 싸웠지만, 귀족 NPC들끼리 붙는 거라면 다들 끼길 꺼려 했다.
괜히 불리한 싸움에 꼈다가 손해 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볼로네 백작령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전원 집합!
그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있던 플레이어들도 도와주러 달려왔다.
-김태현이 볼로네 백작령을 풀었다고??
-와. 그게 말이 됨? 영지를 그냥 공짜로??
-정말 욕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건가? 김태현 정말….
모든 사람들이 태현을 칭송했다.
다들 욕심을 부리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 지금 영지를 그냥 뿌리다니!
-김태현은 욕심 좀 부려야 한다. 착한 짓만 해서는 계속 이길 수 없어.
-맞아. 다른 랭커들 보라고. 진짜 욕심 더럽게 많다니까. 김태현도 욕심 좀 부려야 한다.
* * *
“아키서스 십자군! 아키서스 십자군에 가입하시오!”
태현 일행은 변장하고서 공성전을 준비하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볼로네 백작과 마주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건….”
“갈락파드잖아?!”
생각해 보니 두 백작의 충성 맹세를 받으면서, 아키서스 신전을 짓기 위해 갈락파드를 감시로 보냈었다.
여기 있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하라는 건물 건설은 안 하고 깃발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지!
“아키서스 십자군에 가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소!”
갈락파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하고 다녔다.
원래 겉모습 하나는 되게 그럴듯한 갈락파드라, 거대한 아키서스 교단 깃발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뒤를 보니 벌써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헉. 악명 스탯도 사라지나요?”
“그렇소!”
“제가 지금 PK 때문에 붉은 상태인데….”
“그 죄도 사해지오!”
“다른 교단인데….”
“아키서스 교단에 들어오시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있소!”
“안 들어가면 어떻게 되죠?”
“저 이단 놈을 당장 잡아 죽여라!”
갈락파드가 호령하자 뒤에 따라다니던 <아키서스 십자군> 소속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달려들려고 했다.
“으아아악! 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 들어갈게요! 들어갈게요!”
“아주 좋소! 들어오시오! 악마를 토벌하는 <아키서스 십자군>에 가입하시오! 모든 죄를 용서받고….”
“…….”
“…….”
태현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저 저 미친놈…!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
케인은 겁을 먹고 말했다. 아무리 봐도 <아키서스 십자군>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한 군데가 맛이 간 것 같은 서늘함!
‘기계공학 대장장이들 같아!’
약간 다른 방향으로 미쳤지만 미친 건 똑같았다.
“그런데 저걸 어떻게 말리냐?”
“그러게. 말렸다가는 너까지 매달릴 거 같은데.”
수군거리는 일행들의 대화를 들으며 태현은 고개를 돌렸다.
약간 이상하긴 하지만 일단 지금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저렇게 열심히 싸운다는데!
“자. 쟤네들은 알아서 잘 싸우라고 하고. 우리는 우리끼리 알아서 잘하면 돼. 다들 명심해. 볼로네 백작한테 들키지 마라. 들키면 모르는 척할 거야.”
“…….”
“…….”
참된 리더!
들키면 쿨하게 버린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복면을 썼다. 사람들이 많아서 들키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길드 동맹은 뭐 하고 있을까?”
“걔네가 골드 털고 있을 거 생각하니까 되게 배가 아픈데….”
“나중에 다시 털 거지? 그렇지?”
“물론이지.”
“역시!”
태현의 말에 모두 기뻐했다. 태현이 그걸 그냥 보고 있을 리가 없지!
* * *
“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쑤닝과 길드원들은 경악했다.
영지에….
털 게 없었던 것이다.
텅텅 빈 마을!
빵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텅 빈 마을이었다.
“우, 우연 아닐까요? 어쩌다가 폐허가 된 마을일 겁니다.”
“맞습니다. 더 들어가면….”
그러나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