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60화
솔직히 그 동상들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만들란 소리도 안 했는데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이 만들어서 뿌려놓은 동상들!
좋은 의도로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바로 고소를 했을 것이다.
‘이 자식들은 왜 남의 얼굴을 세계 곳곳에…!’
더 무서운 것은 기계공학 대장장이들 사이에서 유행이 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 이번에 폭탄 재료 구하려고 <마력이 흐르는 흑철의 산> 갔다 왔다.
-거기? 거기 올라가기 힘들었을 텐데.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 도움을 받아서 올라갈 수 있었지. 산이 진짜 험하더라. 간신히 정상에서 재료 캐왔어.
-와. 그냥 오기 아까웠겠군.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상에 김태현 님 동상 하나 남겨놓고 왔어.
-뭐?
-그게 뭔….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은 동료의 말에 놀랐다.
저런 짓을 하다니.
저게 무슨….
-…굉장한 아이디어야!
-그런 걸 혼자 하다니!
-미안. 미안. 나도 즉석에서 떠오른 생각이었거든. 험난한 산 정상에서 폭탄 동상을 만들면 꽤나 뿌듯할 것 같았어.
-뭐 보상 나오디?
-어. 아키서스가 내 정성에 감탄하면서 엄청 챙겨줬어.
-우오옷…!
-나도… 나도 만들 거야!
다른 영지 광장에 몰래 동상 만들어 놓고 튀는 것도 민폐인데 이제 각종 던전이나 높은 산 위에도 도전하는 기계공학 대장장이들!
한 번 만들면 기계공학 스킬이 쭉쭉 오르는데 안 할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태현만 쪽팔린 상황이었다.
그만 만들어 미친놈들아!
최상윤은 태현이 넘어가자 의아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뭐? 동상도 나름 비싸잖아.”
“넘겨, 넘겨. 그냥 기념으로 가져가라고 해.”
“쟤가 안 하던 짓을 하네.”
“죽을 때가 된 거 아냐?”
케인의 말에 최상윤은 케인의 뒤통수를 때렸다.
“쟤 죽으면 우리 다 같이 망하거든? 죽을 거면 너 혼자 죽어라.”
“아, 아차. 그렇… 너무 말이 심하지 않아?!”
* * *
[볼로네 백작령에서 약탈이 사라집니다.]
[보나조 백작령에서 약탈이 사라집니다.]
[볼로네 백작이 크게 감사합니다.]
[보나조 백작이 크게 감사합니다.]
[영지의….]
[…]
[레벨업하셨습니다!]
‘국왕 퀘스트도 할만하군.’
물론 이 퀘스트만으로 레벨업한 건 아니고, 랭커들을 썰거나 다른 퀘스트들을 해서 미리 꽤 올린 상태긴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
‘이제 레벨 151… 200만 찍으면 소원이 없겠군.’
[카르바노그가 말도 안 된다며 웃습니다.]
‘시꺼.’
길드 동맹을 싹 보내고 나니 태현은 다른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제 뭘 한다?’
원래라면 직업 퀘스트를 위해 다음 권능을 찾으러 가야 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길드 동맹 쪽이 이렇게 있는 상황에서는 왕국에서 떠날 수 없었다.
아키서스 직업 퀘스트는 점점 난이도가 올라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괴상한 게 너무 많아!’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한 번 갇히면 나오기 힘든 던전도 수두룩!
그런 던전에 갇히면 비상시에 빠르게 대응할 수가 없었다.
‘음. 그러면 국왕 퀘스트나 마저 깰까.’
보아하니 국왕으로서 나오는 퀘스트도 꽤 쏠쏠한 느낌이었다.
“폐하. 저놈들을 속여서 보냈으니 이제 오스턴 왕국으로 올라가서 왕관을 찾으실 생각이십니까?”
“음? 아니. 쟤네들이 내 왕국에 있는데 어떻게 안심하고 올라가겠어?”
아스비안 제국 귀족 전사대는 태현의 말에 실망했다.
왕국 좀 불타더라도 패기롭게 치고 올라가는 걸 원했던 것!
[귀족 전사대의 친밀도가….]
[평판이 떨어집니다.]
‘참자. 나중에 폭탄으로 쓸 수도 있는 놈들이니까.’
귀족 전사대들은 한 명, 한 명의 레벨이 높아 폭탄으로 쓰기 적합한 재질이었다.
[카르바노그가 당황합니다.]
“좋아. 그러면 두 백작 영지에 악마들이 나타난다는데 악마들이나 처리하자.”
영지 그늘에 숨어서 치고 빠지는 악마들은 원래 잡기 힘든 곰팡이 같은 존재였다.
이런 악마들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연계 퀘스트가 필수적!
악마들이 자주 가는 곳을 공격하고, 교단의 힘을 빌려 정화하고, 최종적으로는 궁지에 몰린 우두머리 악마를 잡는 식이었다.
“시간 너무 걸리지 않아?”
“괜히 시작했다가 못 끝내면 귀찮아질 것 같은데.”
그걸 잘 아는 일행들은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 힘을 빌리려고.”
지금 태현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모인 수많은 플레이어들!
태현은 물량으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마을 곳곳을 뒤지면서 찾아대면 아무리 악마라고 해도 못 버티겠지!
“어. 플레이어들이 길드 동맹 말고 그냥 영지 악마 토벌인데 나서주나?”
“그건 다 생각이 있단다.”
“?”
* * *
“길드 동맹 놈들이 영지에 악마를 풀었다!”
“허억! 어떻게 이렇게 사악할 수가!”
“생각해 보니 악마들이 나오는 세계수도 오스턴 왕국에 있잖아?!”
“악마를 데리고 다른 영지를 공격하다니 정말 사악하다!”
물론 태현도 한 적 있는 짓이었지만 사람들은 원래 이미지로 기억하는 법이었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소문을 다 퍼뜨리자 태현이 나서서 외쳤다.
“모두들 악마를 잡자! 레벨이 낮아도 상관없다! 있을 법한 곳을 닥치는 대로 뒤진 다음 다른 플레이어한테 말해주면 도와줄 거다!”
“와아아아!”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지구 반대편에서는 태풍이 일어난다는 말이 있었다.
태현의 한마디에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단체로 열광했다.
<왕국의 악마 토벌–아탈리 왕국 국왕 퀘스트>
끔찍한 사실이 밝혀졌다!
오스턴 왕국의 첩자들이 아탈리 왕국에 악마들을 퍼뜨린 것이다.
최근 일어난 영지의 흉작이나 사고, 세금 인상과 이용료 인상 모두 이 악마가 사주한 것이 분명하다.
골짜기나 수도에서 일어난 수상쩍은 폭발도 악마가 사주한 것이 분명하다.
아탈리 왕국의 국왕은 이 모든 악마들을 토벌할 것을 명령한다!
보상 : ?, ????, 아탈리 왕국 공적치 포인트, 아키서스 교단 공적치 포인트.
국경까지 올라왔던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목표는 두 백작의 영지!
플레이어들은 마을, 요새, 도시, 성 등 닥치는 대로 몰려갔다.
백작들이 당황할 정도로!
[영지가 너무 혼잡합니다!]
[질서가 하락….]
[…]
“저기 골목에 있는 집이 수상합니다!”
“거긴 내 집이다, 이 모험가 놈들아!”
경비대장의 집도.
“앗. 저 저택, 뭔가 음침한 게 수상하지 않습니까?”
“저기는 남작님 저택이잖아! 미친놈들아!”
퀘스트에 눈이 돌아간 플레이어들은 무서웠다.
원래 혼자서 퀘스트를 할 때면 귀족 NPC가 ‘어디서 감히 천한 놈이! 꺼져라!’하면 ‘흑흑… 너무해!’하면서 물러났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수십, 수백 명이 같이 움직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국왕 폐하께서 명령하신 거다! 네가 비켜라!”
“아, 아니, 이런 천한 놈들이… 미친 것…. 으아악!”
플레이어들은 우르르 달려가 남작의 멱살을 움켜쥐고 번쩍 들어 옆으로 던졌다.
“와아아! 들어가자! 악마가 있을 것 같다!”
[악마 숭배자 데라켄을 발견했습니다!]
[악마 숭배자 데라켄의 사교도 양성소를 발견했습니다!]
“와!!! 발견했다!”
“역시 수상했다고 내가 말했잖아!”
심지어 이런 거친 시도가 효과적으로 먹혀들어갔다.
물량 앞에는 장사 없다고, 철저하게 숨겨놨던 악마들의 비밀 장소도 탈탈 털리기 시작한 것이다.
포섭한 귀족, 상인, 장교 등 각종 NPC들 발각!
“악마다! 태워 죽이자!”
“악마가 있던 집이다! 태우자!”
“아, 아니… 진정해라!”
한창 악마들과 싸우던, 볼로네 백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돌아다니다가 급히 귀환했다.
영지에 무슨 혁명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밤인데도 거리 곳곳에 횃불이 가득!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두 멈춰라! 모험가들아! 이게 뭐하는 짓이냐!”
거리를 보니 몇몇 집은 이미 활활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악마를 찾고 있다!”
“맞다!”
“세상에 이렇게 악마를 찾는 방법이 어디 있단 말이냐! 병사들에게 명령해서 너희들을 전부 잡아 가둘 수도 있지만, 한 번만 용서해줄 테니 당장 멈추도록 해라!”
원래 한두 명이면 그냥 바로 감옥에 가뒀겠지만, 이렇게 모험가가 많으니 가둘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단한 귀족 NPC라도 질릴 정도의 숫자!
플레이어들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우리가 악마를 잡고 있는 걸 방해하다니! 국왕 폐하의 명령인데!”
“저거 국왕 폐하의 명령을 어기는 거 보니까 악마한테 홀린 거 같다!”
“맞다! 악마를 잡는 걸 방해하는 놈은 악마에게 홀린 거다!”
“???!”
볼로네 백작은 기가 막혔다.
지금 기사단을 이끌고 악마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였다.
귀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자신!
그런데 저런 천한 놈들이 그를 악마에게 홀렸다고 모욕하다니!
“어떤 놈이냐! 당장 나와라!”
“백, 백작님! 피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뭐… 뭐라? 저기가 내 성인데 어디로 피하라는 거냐?”
볼로네 백작령은 가장 가운데에 있는 백작의 성, 그 성을 둘러싸고 있는 번화한 도시, 그리고 그 도시 주변에 퍼진 마을들로 이뤄져 있었다.
당연히 여기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백작의 성과 도시!
그리고 지금은 근처 마을은 물론이고 도시까지 플레이어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기사들이여! 뚫고 들어간다!”
“아니… 백작님!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저 안에 싸움이 일어나면 피해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정예 귀족 기사들이야 레벨이 300, 400을 넘나드는 강력한 NPC였다.
그렇지만 숫자가 너무 적었다. 좁은 도시 안에서 싸우다가 백작이 끌려가기라도 한다면….
게다가 저기는 백작의 땅!
저기서 싸움이라도 벌어졌다가는 지금 불타고 있는 저택의 수십 배는 더 박살 날 수 있었다.
“그러면 어쩌란 거냐!”
“국왕 폐하께 가서 도움을 요청합시다!”
“뭐라?!”
볼로네 백작은 진심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억지로 충성을 맹세하고 아키서스 교단 입교한 것 때문에 불만과 원한이 쌓여 있는 그였다.
그런데 다시 태현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부탁을 해야 한다니!
“폐하께서도 충성 맹세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도움 요청을 거절하진 못하실 겁니다!”
“맞습니다. 김태현 국왕 폐하께서는 명예를 아는 영웅입니다. 충성 맹세를 받았으니 백작님을 도우려 전력을 다하실 것입니다!”
“…크으윽. 알겠다.”
볼로네 백작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기사들이 하라는 대로 할 생각이었다.
* * *
“싫은데?”
“감사합니다. 폐하. 지금 당장… 아니, 잠깐. 뭐라고 하셨습니까?”
“싫다고 했는데.”
“…….”
“…….”
“아, 아니. 폐하. 충성 맹세를….”
볼로네 백작은 당황했다.
세상에는 상도덕이라는 게 있었다.
백작이 충성 맹세를 했으면 왕은 일이 생겼을 때 지켜줘야 하지 않나?
“했지. 잘 받았네. 세금도 잘 받았고, 잘 쓰고 있다네.”
“그런데 왜 안 도와주시는 겁니까?!”
“도와줄 일이 아니니까 그렇지. 내가 정당한 일에는 열심히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야. 오스턴 왕국 쪽에서 약탈하러 온 놈들 어떻게 됐지? 내가 다 몰아냈잖아.”
“그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천한 것들이 저를 막고….”
“악마를 토벌하려는데 방해하니까 그런 거지. 백작이 모험가들의 진심을 몰라주고 섭섭하게 대해서 그래. 나는 언제나 진심을 알아주고 친절하게 대하지. 보고 좀 배우게.”
“…….”
볼로네 백작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아니… 악마를 잡더라도 도시를 그렇게 뒤집으면….”
“효과적인 방법이지. 음음. 이런 말을 알고 있나, 백작? 빈대를 잡기 위해서는 초가삼간이라도 다 태워야 한다.”
“…그런 말이 있습니까? 처음 듣습니다만.”
“언제나 희생이 필요하다, 이 말이야.”
태현은 느긋하게 앉아서 볼로네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악마 퇴치 퀘스트의 진행 방향!
설마 플레이어들이 도시를 점령하고 백작을 쫓아낼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숫자가 많아지니 이런 짓도 가능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