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53화
사신들이 물러선 사이 태현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그런데 굳이 아닌 척할 필요가 있었나요?”
“…그러게?”
습관이란 건 참 무서웠다.
굳이 아닌 척할 필요가 없는데도 습관적으로 ‘나 김태현 아닌데?’라고 한 것!
적이 많은 탓에 생긴 슬픈 습관이었다.
‘내가 사신들 앞에서 약한 척을 할 필요가 없었잖아?’
태현은 국왕.
사신들은 귀족 NPC 하수인.
게다가 귀족들이 아쉬운 입장.
“사실 내가 김태현 국왕이다.”
“…….”
“…….”
[볼로네 백작가 친밀도가…]
[보나조 백작가 친밀도가…]
[평판이…]
싸늘해지는 사신들의 분위기!
“폐하! 폐하께서 이렇게 거짓말을 하셔도 되는 겁니까?”
“맞습니다! 명예롭지 못한 짓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사신들은 조목조목 태현을 가리키며 따졌다.
안 그래도 불만이 많았던 걸 터뜨리려는 기색!
귀족들에게 태현은 운 좋게 왕위를 얻은 놈에 불과했다.
그리고 태현은 쿨하게 대응했다.
“아. 어쩌라고.”
“???”
“???”
“내가 거짓말하는데 보태줬냐? 내가 왕인데 거짓말 좀 할 수 있지. 네가 왕이냐? 야. 아스비안 제국 가봤냐? 거기 신하들이 황제를 얼마나 잘 모시는 줄 알아? 죽어서도 모시더라. 근데 넌 지금 내가 농담 한 번 했다고 시비냐? 농담했다고 명예가 깎여? 야. 네가 명예가 높냐 내가 명예가 높냐? 너 대륙 위기 몇 번이나 막았어?”
“아… 아니. 그게 무슨….”
[볼로네 백작가 친밀도…]
[……]
태현의 폭언에 해당 세력 친밀도와 평판이 쭉쭉 내려갔다.
그러나 태현은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안 친했던 놈들!
만약 누군가가 널 이유 없이 싫어한다면, 그 이유를 만들어줘라!
“야, 너. 다시 말해봐. 내가 지금 불명예스러운, 왕위를 뺏은 반역자라고 하는 거냐? 사디크, 살라비안 교단 같은 놈이라고 하는 거냐고.”
하지도 않았던 말까지 뒤집어씌우기!
원래라면 턱도 없는 시도였지만 태현은 왕이고 앞에 있는 사신들은 그저 사신일 뿐이었다.
꼬우면 네가 왕 해보던가!
“저,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뭐? 그럼 내가 틀리고 네가 맞았다는 거냐? 하. 왕 진짜 우습게보네.”
저거 저거 판온 1 때 성질 나온다!
최상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오라….”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냐. 나 기분 상했어. 만남은 전부 취소다. 모두 돌아가도록!”
“!!”
“!!!!”
다른 사신들이 기겁해서 태현을 쳐다보았다.
아니, 영지 관련해서 지원을…!
“폐하! 볼로네 백작의 사신과 저희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폐하! 그렇습니다! 저는 폐하께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던 사신들은 다급히 꼬리 잘라내기에 나섰다.
같이 죽을 순 없다!
“흠. 그래? 그런데 아까 날 욕할 때는 가만히 있었던 것 같은데?”
“…!”
“그, 그것이….”
“비켜라!”
태현은 사신들을 밀치고 왕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신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해했다.
* * *
“아. 속이 다 시원하군.”
왕관 쓴 뒤 국왕이란 작위의 힘을 처음으로 좀 써본 것 같았다.
다른 왕국 국왕들은 세금도 많이 거둔다던데 태현은 귀족들 눈치나 보고 있고….
“쟤네 안 가고 서 있는데?”
“그렇겠지. 계속 서 있으라고 해.”
태현은 기세를 꺾어버릴 생각이었다. 저대로 계속 서 있게 하면 좀 기가 죽어서 들어오겠지!
[볼로네 백작의 사신이 계속 대기합니다.]
[보나조 백작의 사신이 계속 대기합니다.]
[……]
[마르체티 백작의 사신이 분노해서 떠납니다.]
[에르네스토 백작의 사신이 분노해서 떠납니다.]
‘오호.’
사신들은 둘로 나뉘었다.
그래도 기다리는 쪽과, 못 해먹겠다고 돌아가는 쪽!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전자가 아쉬운 놈들이군.’
지금 영지가 습격당하고 있는 놈들!
그에 비해 아직 습격당하고 있지 않은 마르체티 백작과 에르네스토 백작은 그냥 돌아가 버렸다.
마르체티 백작은 서북부 밑.
에르네스토 백작은 동북부 밑.
둘 다 아직 습격을 받지 않은 곳이었다.
그에 비해 볼로네, 보나조 백작은 서북부 지역의 영주들이라 길드 동맹과 미친 대장장이들 공격을 직격으로 받고 있었다.
아쉬운 소리를 할 법했다.
“자. 그러면….”
태현은 일행을 왕궁에 불러놓고 말했다.
“이번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응? 지금 모인 플레이어들 많으니까 추가로 더 모아서 길드 동맹 잡으러 가면 되는 거 아냐?”
“맞아. 고민할 게 있나?”
태현은 지금 쓸 수 있는 패들이 많았다.
태현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여서 ‘길드 동맹 타도! 태현의 영지(태현 영지는 아니지만)를 지킵시다!’라고 외치는 플레이어들.
원래 갖고 있던 왕국 병사들, 악마 전사들, 새로 추가된 거인 부족들 등등….
이 정도면 그냥 다 데리고 가서 길드 동맹과 붙으면 되지 않나?
“아니. 길드 동맹이 만만해 보이고 실제로 만만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만만하진 않지.”
“?”
“???”
저게 뭔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급의 소리?
“원래 궁지에 몰리면 서로 단결해서 잘 싸우는 법이잖아. 길드 동맹이 쪼개지고 박살 나고 해도 랭커 숫자는 압도적이고.”
지금 길드 동맹은 궁지에 몰린 쥐였다.
여기서 태현이 나타난다면?
일제히 도망치거나 일제히 단결해서 덤벼들 수도 있었다. 수십 명이 넘는 랭커와 싸우는 건 사양이었다.
그리고 태현 쪽으로 모인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많아 보여도, 어느 정도 거품이 끼어 있었다.
‘고렙 이상 랭커 숫자는 비교할 수가 없겠지.’
단체 정면 승부는 피해야 했다.
평원에서 있었던 전투는 그 많은 오크 부족들을 데리고 있는 김태산이니까 정면으로 붙을 수 있었던 거였다.
게다가 그때 이세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김태산도 위험했다.
그렇게 많은 오크들을 밀어낼 수 있는 강력한 저력!
태현은 상대를 우습게보지 않았다. 아니, 우습게보긴 했지만 얕보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야 맨날 태현한테 털리니 ‘길드 동맹 거품 아님?’이라고 놀렸지만, 실제로 만나서 그런 소리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눠서 패는 게 좋겠지… 괜히 경계하게 하지 말고.”
상대가 김태현이라면?
-랭커 비상! 전원 모여라!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
그렇지만 상대가 만만해 보이는 놈이라면?
-뭐… 굳이 뭉칠 것까지 있나. 그냥 싸우지 뭐.
이렇게 될 것이다.
길드 동맹은 강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태현은 얼마든지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다음!
“귀족 NPC들이 문제야.”
태현은 이번 기회에 자기 말 안 듣는 영주들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다른 나라 왕 좀 봐라!
걔네들은 귀족들이 국왕 말을 그렇게 잘 듣는다더라!
남부 귀족들은 무리더라도 북부 귀족들은 이번에 꼭 굴복시킨다!
“뭐가? 도와준다고 하면서 뜯어내면 되지 않나?”
“아. 지금 남아 있는 놈들은 그렇게 할 건데, 돌아간 놈들이 문제라는 거였어.”
아쉬운 놈들은 괜찮았다.
덜 아쉬운 놈들이 문제!
길드 동맹이 좀 과감하게 치고 들어오면 될 텐데 그러지 않았다.
태현이 무서웠고, 웬 미친놈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마르체티, 에르네스토 백작 영지를 좀 털리게 만들고 싶은데.”
“길드 동맹을 유인하면?”
케인은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구박했다.
“에이, 그건 오바지.”
“맞습니다. 그리고 길드 동맹이 유인하는 대로 따라주겠습니까? 음. 따라주긴 할 것 같은데 나중에 역효과 나면 어떡합니까. 더 치고 들어올 수도 있잖습니까.”
“흠… 좋은 생각 같아.”
“?”
“????”
일행들은 모두 놀랐다. 저게 좋은 생각 같다고!?
“어, 어떻게? 어떻게 유인하려고?”
“김태현이 장비 다 벗고 몸에 꿀 바른 다음 도발이라도 하나?”
“…케인. 네 생각은 잘 알겠고… 물론 유인은 힘들겠지. 길드 동맹 놈들이 그렇게 당했는데.”
길드 동맹은 하도 많이 당해서 경계심과 겁이 매우 많아진 상태였다.
마르체티 백작 영지에 금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더라!
이런 소문을 들어도 ‘그걸 어떻게 믿어! 함정이야!’라고 의심할 가능성이 컸다.
굳이 믿게 하려면 랭커인 앨콧을 쓰든가 해야 하는데….
‘지금 쓰기는 아깝지.’
유인 말고 다른 방법이 좋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흠. 협상해 보려고.”
“?!?!?!?!!”
태현 입에서는 나올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단어!!
* * *
‘어라. 건물란에 이게 뭐지?’
태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건설창을 확인했다.
건설 가능한 건물에 새로운 게 생겨났던 것이다.
<아키서스 허기의 던전>
제작비용: 0골드
불가능한 허기의 던전을 뚫고 나온 화신만이 그 저주를 불어넣을 수 있는 던전입니다.
이 던전에는 특별한 제작비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깊고 깊게 파고 들어갈 노동력뿐입니다.
“!!!”
생전 처음 보는 0골드 건물!
심지어 헛간도 1골드는 넘었다.
그런데 영지에 건설하는 던전이 0골드라니!
어머! 이건 사야 해…!
‘잠깐만.’
순간 돌아온 이성이 태현을 멈췄다.
‘잘 생각해 보자.’
세상에 공짜는 없다!
왜 0골드지?
‘이건… 그 <모래의 심장> 같은 던전이겠지? 움직이면 허기지는.’
그거 말고는 없었다.
이 던전을 영지에 설치하면?
‘…이득이 있…나?’
던전이 영지에 있으면, 많은 플레이어들이 찾아왔다.
그 던전에서 아이템과 골드를 파내고 상인들에게 쓰고, 영지의 경제가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키서스 허기의 던전은?
‘일반 플레이어들은 들어가지도 않겠다!’
너무 특이한 던전이라 어지간하면 들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보상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등장하는 몬스터들을 봤을 때 더 약하면 약했지.
괜히 0골드가 아니었다.
‘아… 그래도 아까운데. 어떻게 써먹을 곳이 없나… 에이. 일단 만들어놓자.’
태현은 결심했다.
0골드니까!
일단 만들어놓으면 나중에 언젠가 쓸 일이 올 거야!
‘싫어하는 놈 저기에 가둘 일이 생겼으면 좋겠군.’
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펠마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던전 건설 퀘스트>!
그 퀘스트가 떨어지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 * *
“그런데 폐하.”
“?”
“<용암의 의식>은 언제 합니까? 사람들이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응? 아… 그걸 기대해?”
태현은 펠마스의 말에 당황했다.
용암의 의식이 뭔가 했네!
근데 그걸 왜 기대하지?
“그걸 왜 기대하지?”
“당연히 기대하지요!”
“????”
요즘 이상한 유행이 도나?
‘하긴. 예전에도 매운맛 유행이 돌았었지.’
매운맛의 극한을 원하는 유행!
그때는 이해가 잘 안 갔지만 원래 유행이란 건 그런 법이었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기 전에 의식 한 번 해주고 가지 뭐. 사람들 모이라고 해.”
“예!”
펠마스는 싱글벙글하며 떠났다.
이걸로 크게 한 탕 할 수 있겠구나!
“다들 들어라! 위대한 아탈리 왕국의 국왕이시자 위대한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이신….”
5분 후.
“…태현 님께서!”
“지금 칭호를 대체 몇 개 말한 거야?”
“몰라. 난 중간부터 기억도 안 난다.”
플레이어들은 수군거렸다. 저렇게 칭호가 많을 수가 있나? 그냥 대충 말한 거 아냐?
“용암의 의식을 거행하신다!”
“!!!”
“드, 드디어!”
“저… 저요! 저요!”
열렬한 반응!
펠마스는 흡족했다. 이제 말만 잘하면 골드를 미친 듯이 긁어낼 수 있겠지?
“폐하. 어떤 순서대로 할까요? 역시 공적치?”
“음? 아니. 어차피 여기 모인 사람들 다 한 국자씩 떠먹일 수 있을 텐데 뭘. 줄 선 대로 오라고 해. 빠르게 하자.”
“…한 국자? 어… 뭔 의식이길래요?”
펠마스는 불안해했다.
용암의 의식이라길래 용암을 뛰어넘거나 용암 관련 몬스터를 잡거나 용암 관련 던전을 깨는 건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