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34화
처음 들어 보지만 학계의 정설이 그렇다면 그런 건가?
태현은 이런 면에서 은근히 약했다. 동생들이 그런 거라고 하자 ‘그런 건가?’ 하고 넘어갔다.
“어쨌든 받는다 치고… 그냥 받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뭐라도 선물해 주고 싶어서.”
“그냥 본인을 선물로 주면 된… 으아악…!”
말하던 이다샘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엎드렸다. 이다솔이 진짜로 밟았던 것이다.
‘진짜 아파!’
“쟤는 아까부터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같이 선물해 주시는 건 정말 좋은 생각 같아요. 언니가 정말 정말 정말 기뻐할 거예요!”
“아니. 뭘 선물할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얘네는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하지?
케인한테 옮았나?
태현은 그런 실례되는 생각을 하며 의아해했다.
“뭘 선물하고 싶으신데요?”
“원래는 게임 아이템을 생각했는데….”
“…….”
“…….”
두 동생들의 표정이 순간 미묘해졌다.
원래라면 ‘아니 그건 좀’이라고 말했겠지만, 이다비의 경우에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좋아할 것 같았으니까!
솔직히 현실에서 어중간한 선물 주는 것보다는 판온에서 장비를 받는 걸 더 기뻐할 사람이 이다비였다.
그래도 이다솔은 뭔가 다른 거라도 주게 하고 싶어서 고민했다.
게임 아이템 말고 뭔가 다른 거!
뭐라도!
그러나 이다솔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태현은 이어서 말했다.
“…게임 아이템은 지금 마땅히 줄 게 없더라고.”
그랬다.
이다비는 사실 지금 장비가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아키서스의 갑옷도 상인이 입고 다니기에는 아까운 아이템!
게다가 그렇다고 다른 장비가 약한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더 좋은 장비를 만들려면 태현도 그만큼 투자를 해야 했다.
마땅한 재료도 없는 상황에서 그럴 순 없었던 것이다.
“그렇죠! 게임 아이템을 줄 게 없다면 억지로 줄 수는 없죠!”
“너 기뻐 보인다?”
“착각 아닐까요?!”
“어쨌든 그래서 고민이야. 흠…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는데. 이세연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
“!!!!”
“…얘가 날 차단한 거 같더라.”
이다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다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전에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너무 궁금해서 무심코 물었다.
“대,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내가 이겨서 삐진 거지 뭐.”
태현은 잘 알 수 있었다.
만약 결승에서 태현이 졌다면 태현은 바로 스마트폰부터 꺼내서 이세연의 연락처를 차단했을 것이다.
도발 방지!
“한 한 달쯤 지나면 풀리겠지.”
“왜 한 달…?”
“내가 한 달쯤 지나면 풀 테니까?”
“…….”
이세연과 태현의 이야기에 혼란에 빠졌던 두 동생이었지만 금방 정신을 차렸다.
지금 중요한 건 이다비!
“작고 반짝이는 건… 아니, 너무 과하네요.”
말하던 동생들은 멈칫했다. 이런 거 하라고 추천했다가 언니한테 들켰다가는 멱살 잡힌다!
“작고 반짝이는 거라면 혹시….”
“LED 아닙니다!”
이다샘은 선수를 쳤다. 왠지 모르게 태현이 눈치를 못 챘을 것 같았던 것이다.
작고 반짝이는 걸 선물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그걸 추천하는 의미를 이해해 주세요!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 집 열쇠겠지.”
“…….”
“…….”
누가 부동산 재벌 집안 아니랄까봐!
“이다비가 집은 괜찮대.”
‘심지어 말했었어!’
“걔야 뭐 나갈 준비까지 하고 있으니….”
태현 팀의 숙소 위층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이다비는 차곡차곡 돈을 모아가며 다른 집을 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계속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으니까!
태현의 태도에 이다솔이 슬며시 물었다.
“혹… 혹시 섭섭하세요?”
“응? 섭섭하지. 가까이 있어서 이런저런 이야기하기 편했는데 거리가 멀어지면… 그보다 왜 자꾸 다른 이야기를 하냐? 선물 추천해달라니까.”
“음….”
“어….”
“…혹시 너희도 모르니?”
순간 태현의 눈빛에 불신이 번뜩였다.
케인을 볼 때 많이 보여주던 눈빛!
그걸 깨달은 두 동생들은 당황했다. 태현 앞에서 케인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순 없어!
“옷… 옷 어떨까요?!”
“옷?”
이다샘은 별 생각 없이 다급하게 외친 것이었지만, 태현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생각해 보니 이다비 옷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이다비는 태현 보고 매번 협찬받은 옷만 입고 다닌다고 했지만, 사실 이다비가 그런 소리를 할 처지는 아니었다.
태현은 있는데 안 입는 거고 이다비는 없어서 안 입는 거였으니까!
프로스다스 쪽에서 옷을 팍팍 보내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언니는 저희 옷만 사거든요….”
“음. 괜찮은 거 같다. 평상시에 입을 만한 것들하고, 앞으로 방송이나 공식 자리에 나갈 일이 많을 테니까 정장하고, 아직 날이 덥긴 하지만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코트도….”
“…….”
‘옷 가게 차리세요?’
두 동생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이다비는 솔직히 저 옷 다 받아도 된다!
“그러면 누구한테 맡긴다… 아, 어머니가 아시는 디자이너가 계셨는데. 누구였지. 여쭤봐야겠다. 예. 어머니. 네. 선물 샀어요. 아버지 선물요? 아. 네. 공항 면세점 들릴 거니까 괜찮아요. 아니, 아버지도 저번에 거기서 사 왔는데… 알겠어요. 따로 살게요. 왜 전화 드렸냐면요, 그 저번에 종종 말하셨던 친한 디자이너 분 있잖아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그분이요. 성함이… 마틴 킴이라고요? 네. 그분한테 연락해서 약속 좀 잡아주실 수 있어요? 지금 미국에 계신다고요? 어. 잘됐네요. 지금 제가 찾아뵙죠. 제 옷 맞추냐고요? 아뇨, 친구… 그 작고 소심한 친구 아니에요. 이세연이요? 왜 이세연 이야기를… 제가 걔 옷을 왜 맞춰줘요? 어쨌든 연락처 좀 주세요. 제가 찾아갈게요.”
태현은 어머니와의 전화를 끊었다. 일단 필요한 건 얻어냈다.
게다가 그 디자이너도 지금 미국, 그것도 결승전이 열린 도시에 있다니 잘된 셈!
“그러면 가자!”
“네? 어. 저희도요?”
“너희 언니 취향을 너희가 잘 알 거 아냐.”
“언니가 딱히 취향이 있는 사람이….”
“싸고 튼튼하고 방어력 높은 거?”
“마지막은 게임 같은데.”
동생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은 무시하고 그들을 붙잡고 일어섰다.
너희들이 관광을 하고 싶어하는 건 알지만 내 일이 우선이다!
두 동생들은 슬픈 얼굴로 태현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 *
“연락드리지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화를 끝내고 이다비와 빈센트를 보낸 마틴 킴은 눈을 감았다. 손에는 사인지가 들려 있었다.
‘이렇게 사인을 받게 될 줄이야.’
결승전은 그도 경기장에서 봤었다.
이다비 앞에서는 품격 있는 패션 디자이너처럼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인까지 안 받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이다비 선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선선히 사인을 해주었다.
-제 사인 같은 게 필요하실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틴 킴은 안쪽 사무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액자 안에 사인지를 넣어놓았다.
‘다른 팀원들 사인도 부탁하는 건… 너무 욕심내는 것 같았겠지. 김태현도 탐나는데… 다음에 윤희를 만나면 슬쩍 말을 해볼까….’
사실 태현의 어머니와 친한 사이였기에 말 한마디만 하면 받을 수 있긴 했다.
그렇지만 마틴 킴은 어디까지나 고고하며 우아한, 디자인 외길 인생을 걷는 신비주의 디자이너의 이미지를 고집하고 싶었다.
게임? 판온? 그게 뭐지? 난 모르는데?
‘입을 사람이 직접 안 오는 게 좀 불편하지만 치수가 워낙 상세하니 문제없을 것 같군. 키 큰 남자 정장인가? 이다비 선수 남자친구?’
마틴 킴이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전화가 왔다. 태현의 어머니, 정윤희에게서 온 전화였다.
“무슨 일인… 음? 음… 음… 음?!?!”
우아하게 말하던 마틴 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금 내게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사장님. 약속을 했다고 찾아오신 분이 있는데, 오늘 약속은 더 없는데요. 돌려보낼까요?”
비서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마틴 킴의 명성이 명성이다 보니, 어떻게든 한 번 만나 자기 옷을 보여주려는 디자이너들이 많았다.
“무… 무… 무…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는 거니!”
“네??”
비서는 당황했다. 자기가 뭐 잘못했나?
“지금 당장 나가서 들여보내! 당장!”
“어… 예!”
평소 침착 우아 고상하던 마틴 킴이 저렇게 고함을 치자 비서는 놀라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현이 들어왔다.
“오랜만이에요. 김태현 선수. 어렸을 때 한 번 만난 적 있는데, 기억하고 있으려나?”
“네. 그때 옷을 만들어주셨잖습니까.”
태현이 기억하는 걸 보고 마틴 킴은 웃었다.
“맞아요. 그리고 대회 우승 축하해요.”
“아. 경기 보셨나요?”
“…결, 결과만. 윤희한테… 들었죠.”
“그렇군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사인이나 해줄래요?”
“선생님 사무실에 제 사인이 있으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정, 재계의 유명인들이 와서 입고 가는 곳에 태현의 사인이라니.
그러나 마틴 킴은 정색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김태현 선수는 훌륭한 선수니까요.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감사합니다.”
그러는 사이 비서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무실에서 나왔다.
“…?”
-사인지가 없는데요.
아무 종이에다가 해도 됐지만 그건 마틴 킴의 미적 감각이 용서하지 않았다.
마틴 킴은 눈에서 레이저를 뿜을 듯이 비서를 노려보았다.
‘뭐하는 거야! 하필 왜 지금!’
-죄… 죄송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사인지가 없나 봐요.”
“하하. 아쉽게 됐네요. 저도 해드리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죠.”
사인은 그냥 넘어갈 것 같은 분위기!
마틴 킴은 필사적으로 말했다.
“주, 주소 보낼 테니까…!”
“…그, 그렇게까지 받으실 필요가 있습니까?”
“크흠. 크흠. 그, 친구의 아들이 이렇게 활약하는 거 보니 너무 기뻐서… 크흠. 크흠.”
마틴 킴의 말에 태현은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면 치수부터 재볼까요?”
“아. 제 옷이 아니라 다른 친구한테 선물하려고 하는데요.”
“…?”
하루에 두 번이나 똑같은 의뢰를 맡게 되다니.
게다가 생각해 보니 이다비는 김태현과 같은 팀 아니었나?
그리고 치수를 계산해 보면….
눈앞에 있는 태현과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김태현 선수 옷을 주문한 거였어?!’
설마 김태현 선수가 주문하는 건….
“애들아. 이다비 치수 좀 불러볼래?”
“네!”
“!!”
이걸로 확정!
마틴 킴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두 선수가 서로에게 몰래 깜짝 선물을 주려고 이러고 있단 말인가?
‘…이 둘 무슨… 드라마 찍니?’
드라마에서도 안 이러겠다!
마틴 킴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 혼자라는 것에 떨었다.
이걸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다!
이 커다란 진실을!
입이 너무 근질거려!
‘…윤희한테 아냐고 물어볼까?’
* * *
“나는 쓰레기야! 으흑흑! 나는 쓰레기야!”
와장창!
다니엘은 탁자 위에 있던 부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발로 밟은 다음, 머리를 땅에 박고 휠윈드까지 돌았다.
광기의 도가니!
하도 이런 일들이 많아서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이제 들어오지도 않았다.
-또 저러시냐?
-곧 괜찮아지시겠지.
“안 괜찮아! 이것들아!”
-헉. 들리셨습니까?
“이번에는 진짜로 문제라고!”
“아니… 다니엘 님. 너무 눈이 높으신 거 아닙니까? 다니엘 님이 만드신 건 정말 최고입니다.”
“맞습니다. 태현 님만 빼면 2인자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폭탄만 좋아하는 가브리엘과 달리, 온갖 기계공학 아이템에 도전하는 다니엘은 길드원들한테도 인기가 좋았다.
각종 재밌는 아이템들을 친절하게 선물해 주는 다니엘!
물론 가끔 미쳐 날뛸 때는 좀 미친 사람 같았지만….
“…그 문제가 아니야. 제작하는데 계속 실패가 뜨고 있어. 아무래도 부품 내구도가 부족한 것 같아.”
단단한 광석들은 모두 다 썼는데도 계속 실패가 뜬다면 이제 남은 건….
“아다만티움…! 아다만티움이 필요해!”
다니엘의 광기 어린 목소리에 길드원들은 기겁했다.
아니, 지금 누구 기둥뿌리를 뽑아먹으려고 저런 소리를 하신대?!
아다만티움이 무슨 돌멩이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