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30화
그래도 스카비오 백작은 방금처럼 분노하진 않았다.
아탈리 왕국의 국왕이 직접 쳐들어온 게 아니라, 블라디가 힘이 필요해서 아탈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폐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스카비오 백작은 한결 공손해진 태도로 태현을 보며 외쳤다.
“블라디란 놈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블라디란 놈은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사악한 뱀 같은 놈입니다!”
“그런!”
태현은 놀란 척을 해줬다. 스카비오 백작은 그 반응에 용기를 얻어 계속 말했다.
“그놈은 사신을 공격하고 회의장을 습격하고… 절대 믿으시면 안 될 놈입니다. 그런 놈을 믿으실 바에는 차라리 저를 믿으십시오.”
스카비오 백작은 괜히 노회한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블라디와 태현의 동맹을 끊고 태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블라디 놈을 보아하니 하는 짓이 교활하고 비열한 놈이다! 아탈리 국왕이라면 그런 놈을 완전히 믿지는 않겠지!’
스카비오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교섭을 시도했다.
물론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
“블라디가 교활하고 비열한 놈이긴 하지만 동맹을 했는데 내가 어떻게 어기겠나? 난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데.”
[최고급 화술 스킬을…]
[스카비오 백작령 내에서 당신에 대한 평판이 오릅니다!]
[스카비오 백작의 친밀도가…]
[……]
명예로운 국왕 같아 보이는 태현의 모습은 스카비오 백작에게 대번에 호감을 샀다.
방금 야밤에 화공을 가한 게 태현이었지만, 원래 진실은 모르는 게 좋을 때가 있는 법!
[기사단 내 당신의 평가가 오릅…]
아니 너희는 왜 올라?
“역시 폐하…!”
“너무 명예로워!”
“크흑! 영원히 함께하고 싶습니다!”
스카비오 백작은 태현이 명예롭고 약속을 지키는 왕이란 걸 알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폐하! 폐하께서 명예로운 분인 건 잘 알지만, 사람이 꼿꼿하기만 하면 부러지는 법입니다. 가끔은 원칙을 굽히고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저 말은 무슨 뱀파이어들 가훈인가?’
블라디도 저 비슷한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돌렸다.
“그래. 알겠네. 백작. 생각해 보도록 하지.”
“폐하!”
“아. 알겠다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저 화염을 끄셔야 합니다.”
“왜? 부하들 데리고 나와서 습격하게?”
의심으로 똘똘 뭉친 태현!
방금까지 보여줬던 명예로운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진영 안에 있는 보물들을 제 몸값으로 쓰고 싶습니다.”
“…보물?”
태현은 당황했다.
아니, 보통 보물을 진영 안에 보관하나? 원정하러 와서?
태현이 가차 없이 불을 지른 데에는 ‘보물이 있어 봤자 백작이 갖고 있겠지!’라고 판단한 게 컸다.
어떤 놈이 영지전 하러 와서 자기 진영에 보물을 쌓아놓는단 말인가.
그러나 귀족들은 달랐다.
어디를 가더라도 품격 있게 노는 그들!
뱀파이어 귀족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설명을 들은 태현은 분노했다.
“이런 사치스러운 놈들!”
“?!”
졸지에 사치스럽다고 구박을 받은 스카비오 백작은 당황했다.
귀족들은 원래 다 이러지 않나?
태현은 호다닥 진영 쪽으로 달려갔다.
“폐… 폐하?”
스카비오 백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태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 * *
“아! 뜨거! 뜨거!”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칭호: 화염 속으로…를 얻었습니다.]
[체력이 1 오릅니다.]
[장비의 내구도가 빠르게 하락합…]
케인은 비명을 질렀다. 그걸 본 태현은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넌 왜 따라왔냐??”
“…네가 가서…?”
케인은 억울했다. 태현을 안 쫓아가면 구박받을까 봐 따라온 건데!
물론 태현은 더 어이가 없었다.
태현이야 사디크의 권능과 화염 저항이 있어서 화염 속에서도 놀 수 있다지만, 케인은 무슨 배짱으로 들어온 것이란 말인가.
“난 또 스탯 올리려고 온 줄 알았네.”
“??”
“됐고, 장비나 벗어라. 빨리.”
태현은 장비 내구도를 걱정해서 말했다. 케인은 또 시킨다고 그걸 했다.
[장비를 입지 않고 맨몸으로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칭호: 믿을 수 없이 멍청한…을 얻었습니다.]
“…잠깐만. 장비 벗을 필요 없이 그냥 나가면 되는 거 아냐?”
케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 말에 카르바노그는 놀랐다.
[카르바노그가 아키서스의 노예도 학습을 한다고 놀랍니다!]
“아니. 기왕 들어온 김에 스킬 쓰면서 버텨라. 원래 불구덩이가 스탯 올리기 좋은 곳이지.”
케인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불구덩이가 스탯 올리기 좋은 곳이라니, 그러면 지옥은 레벨업하기 좋은 곳이냐?
그러나 태현은 진지했다.
“부러운 녀석. 나도 화염 권능만 없었어도 했을 텐데… 판온 1 때는 자주 했었지.”
“…….”
케인은 진지하게 오싹해졌다.
얘 진짜 미친놈 아냐?
스탯과 스킬 올려준다면 독이라도 먹을 놈!
그러나 케인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계속 HP가 감소하고 있다고 메시지창이 뜬 것이다.
“아뜨! 아뜨!”
“집중해, 인마. HP 5% 선에서 유지해. 더 회복하지 말고. 계속 버티다 보면 어느 순간 화염 저항이나 스탯이 안 오를 텐데, 그때는 나가도 돼.”
“5, 5%? 너무 아슬아슬하잖아?”
“뭔 소리야? 난 1%로 했는데. 난이도 낮춰준 거라고. 배부른 소리 하지 말고.”
“10… 10%!”
5%는 무리였다. 불 속에서 수련하다가 죽으면 <판온에서 가장 웃기게 죽은 랭커>로 기네스에 오를 것이다.
“HP 넉넉하게 잡으면 효율이 안 좋을 텐데… 뭐, 됐다. 네가 알아서 해라.”
태현은 케인을 내버려 뒀다. 지금 찾아야 할 건 보물들!
화염으로 주변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태현은 용케 아이템들을 챙겼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
보통 아이템을 확인하는 건 여유가 있을 때였다.
던전을 빠르게 돌거나 급할 때에는 일단 아이템만 넣고 확인은 나중에 하는 법!
그런데도 태현의 눈을 끄는 아이템이 있었다.
[반쯤 탄 <귀중하게 보관된 장식 상자>에서 와이번의 심장을 얻었습니다!]
“…?”
와이번의 심장?
최근에 어디서 봤더라?
[카르바노그가 <흡혈성의 토끼 사육장>의 사료였다고 말해줍니다.]
“!!!”
그랬다.
토왕이가 먹는 사료 중 하나!
[고대 뱀파이어의 혈액x5를 얻었습니다.]
[……]
수많은 희귀 재료들 중에서 토왕이가 먹는 사료가 이렇게 딱딱 나올 리 없었다.
스카비오 백작은 토왕이가 먹을 사료를 따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태현은 생각을 정리했다.
-스카비오 백작은 토왕이가 먹을 사료를 갖고 왔다.
-스카비오 백작은 태현이 없는 사이에 블라디한테 토왕이를 포함한 사육장을 넘기면 지배권을 인정한다고 했다.
이런 사실들에서 낼 수 있는 결론은?
[정답! 스카비오 백작은 토끼를 좋아한다!]
“…아니지….”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엄청 좋아한다?]
카르바노그의 천진난만한 대답은 무시하고, 태현은 결론을 냈다.
애초에 이 토왕이를 노리고 온 거구나!
‘아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그렇게까지 가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고대 뱀파이어 토끼가 쓸 만해 보이긴 했지만 저 사료들을 들여서 부릴 정도 같지는 않았다.
가성비가 너무 안 좋은 것!
‘그러면 설마 안달토 백작도 이 토끼를 노리고 온 건가?’
그런 거라면….
안달토 백작도 사료를 갖고 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는 불 지르지 말자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그래. 그래야겠다.”
태현은 대충 돌면서 챙길 걸 챙긴 다음 빠져나갔다. 벌써 불도 잦아들고 있었다.
“케인. 가자!”
“어!”
“…?”
태현은 케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케인은 의아해했다.
“왜?”
“아냐. 아무것도.”
케인은 장비를 벗은 채로 속옷만 입고 있었다.
화염 속에서 훈련하다가 다시 입는 걸 잊은 게 분명했다.
태현은 말해주려다가 말았다.
취향은 존중해 주자!
* * *
“스카비오 백작. 진영에 들어가서 대충 좀 챙겨 나왔네. 블라디가 비열하게 불을 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귀족의 보물을 불에 타게 둘 수는 없으니.”
태현은 사람 좋게 말했다.
그 모습에 스카비오 백작은 감동했다.
늙고 교활한 스카비오 백작마저 감동시키는 정성!
“폐하… 이 늙은 뱀파이어,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스카비오 백작의 친밀도가…]
[기사단원들의 충성도가…]
‘아. 저것들 진짜 떼놓고 오든가 해야지.’
뭐만 하면 꼭 같이 오르는 놈들!
“그런데 이 사료들은 더 없나?”
태현은 슬쩍 스카비오 백작을 떠봤다. 그러자 스카비오 백작이 당황해서 표정을 굳혔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는 척하지 말게. 블라디도 이 토끼를 원하고, 자네들도 이 토끼를 원해서 온 거잖나.”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스카비오 백작이 당신을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오해합니다!]
“…폐하를 속일 순 없군요. 예. 크네마 백작이 남긴 강력한 병기….”
“???”
이게?
“…를 원해서 왔습니다. 안달토 백작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크네마 백작이 그 토끼들로 얼마나 많은 적들을 공포에 빠뜨렸는지 모르셔서 하는 말씀이십니다.”
[카르바노그가 우쭐해합니다.]
“그래. 그렇군. 그… 공포의 토끼….”
말하면서도 뭔가 웃긴 상황!
태현은 진지하게 말하기 위해 애썼다.
“…사료는 더 있나?”
“진영에 있었으니 다 탔을….”
‘젠장.’
“…테지만 안달토 백작도 갖고 있을 겁니다. 재료를 모으고 있었으니까요. 안달토 백작과 협상하신다면 이 늙은 몸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스카비오 백작은 포로로 잡힌 것치고는 매우 협조적이었다.
태현에 대한 호감 덕분!
물론 블라디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꺼져라 블라디! 이 쓰레기 뱀파이어 새끼야!’하고 욕부터 나왔을 것이다.
“응? 아니. 안달토 백작도 공격할 생각인데. 포로로 잡으면 그만이지 뭐하러 협상을 하나?”
“폐하…!”
‘이런. 괜히 말했나?’
스카비오 백작의 반응이 이상하자 태현은 살짝 후회했다.
뭐, 화술 스킬 높고 친밀도 높으니까 괜찮겠….
“…더더욱 도와드리겠습니다!”
“…….”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통하는 법칙.
나 혼자 죽을 수는 없다!
* * *
“이번에는 불 안 지르고 들어갑니다.”
“그런…!”
“저희를 위해서…!”
뱀파이어 플레이어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을 위해 몇 배로 힘든 싸움을 하려고 하다니!
아까 있었던 불만은 싹 사라지고 감동만이 남았다.
기사단원들도 정정당당한 싸움을 하려는 태현에게 감동을….
‘아. 진짜.’
메시지창을 꺼버린 후 태현은 앞을 내려다보았다. 스카비오 백작은 태현 옆에서 손가락으로 안달토 백작의 진영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놈이 안달토 백작의 호위기사인 세르조입니다. 아주 뛰어난 전사로 알려져 있죠. 그리고 저놈은 발렌티노란 놈인데 약점이….”
[안달토 백작 진영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전투 시 보너스를 받습니다.]
[사기가…]
태현은 스카비오 백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백작 같은 뱀파이어를 만나니 참 다행이군. 블라디 같은 놈을 상대하다 백작을 상대하니 아주 상쾌해.”
“저도 그렇습니다. 폐하.”
스카비오 백작은 속으로 웃었다.
블라디 이놈! 이것이 너와 나의 차이다!
진짜 귀족과 가짜 귀족은 이런 부분에서 격의 차이가 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