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21화
[탕탕탕! 탕탕탕탕!]
‘아. 시끄러.’
토끼 발로 땅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자 의외로 거슬렸다.
결국 삐지는 카르바노그!
[카르바노그가 말을 무시합니다.]
‘…알겠어. 토끼 사육장부터 확인해 볼게.’
태현은 카르바노그를 달랬다.
카르바노그가 세력도 적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마이너한 신이긴 했지만, 그래도 신은 신이었다.
대부분의 신들이 떠난 대륙에서 신이란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실제로 카르바노그는 태현에게 꽤나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신이었기 때문에 남들이 모르는 지식도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태현도 몇 번이고 도움을 받았으니 카르바노그를 삐지게 할 수는 없었다.
달래줘야지!
‘뭐, 토끼 사육장 정도야 별거 아니니까….’
토끼 사육장은 무슨 <연금술사 길드>나 <보석 세공사의 집> 같이 비싼 시설도 아니었다.
이름만 들어도 견적이 나온다!
대충 철창 만들고 사료 구해서 뿌려놓으면 토끼 사육장은 끝이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만드는 것도 아니라 이미 있는 거 대충 고쳐서 수리만 하면 되는 거니까….
[현재 <흡혈성의 토끼 사육장>의 상태는 96%입니다.]
‘오. 더 잘됐군.’
태현은 안심했다. 96%면 거의 망가진 게 없다고 봐도 됐다.
[<흡혈성의 토끼 사육장>을 수리하고 다시 운영하기 위해서는 64,300 골드가 필요합니다.]
“…응?”
태현은 눈을 깜박였다. 내가 뭐 잘못 봤니?
6만 골드라니. 내가 토끼 사육장을 수리하겠다는 거지 성을 사겠다는 게 아닌데?
그 돈이 있다면 영지부터 관리하지!
그러나 다시 봐도 메시지창은 달라지지 않았다. 태현은 기가 막혔다.
‘아니 뭔 토끼 사육장을 오리하르콘이랑 미스릴로 만들었나??’
[<흡혈성의 토끼 사육장>을 수리하는 데에 필요한 재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레자 산 최고급 다이아몬드 0/10
프로즈란드 산 최고급 사파이어 0/10
……
……
고위 뱀파이어의 혈액 0/10
와이번의 심장 0/10]
태현은 크네마 백작이 왜 망했는지 알 수 있었다.
토끼가 사는 곳을 온갖 보석으로 만들고, 토끼가 먹는 사료를 위해 고위 뱀파이어의 혈액부터 와이번의 심장까지 준비했으니….
미친놈이 토끼에 이렇게 돈을 쏟아 부으니 망하지!
[카르바노그가 크네마 백작에게 감동합니다. 이런 백작이 있는 줄 몰랐다고 반성합니다.]
“…….”
살라비안 교단이나 다른 교단이 아니라 카르바노그 교단에 갔어야 할 인재가 여기 있었다.
태현은 복잡한 마음으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크네마 백작이 그래도 나름 고대 뱀파이어 혈통도 잇고 해서 좀 대단한 놈인 줄 알았는데….
‘그냥 사치하다가 죽은 놈 같은데….’
토끼에 이렇게 쏟아붓고 죽은 건 솔직히 자업자득 아닌가?
‘카르바노그. 미안한데 이건 지금 당장 수리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카르바노그가 시무룩해집니다.]
카르바노그는 시무룩해졌지만 탕탕거리진 않았다.
카르바노그가 보기에도 너무 재료가 많이 들어갔던 것!
[크네마 백작이 살아 있었다면 이야기가 잘 통했을 것이라고 카르바노그가 아쉬워합니다.]
‘그래. 나도 그랬을 거 같아.’
토끼 애호가 백작이 토끼 신에게 선택 받은 사람을 만난다면?
친밀도가 하늘을 뚫고 올랐을 것이다.
‘블라디 놈 백작 세우는 것보다 훨씬 나았을 것 같기도….’
싸울 필요도 없고 그냥 날로 핏빛 군도의 섬을 하나 먹은 다음 유유자적히 돌아가면 그만!
그렇게 생각하니 크네마 백작의 죽음이 아쉬워졌다.
약간 좀 이상한 사람이면 어떠냐! 이야기만 잘 통하면 그만이지!
* * *
그래도 태현은 토끼 사육장을 직접 찾아갔다.
카르바노그를 달래기 위해서… 는 아니었다.
‘상태가 96%면 보석이 대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 거지?’
사악한 흉계!
그런 것도 모르고 카르바노그는 감동하고 있었다.
‘…!’
햇빛이 잘 들지 않는 핏빛 군도인데도 멀리서부터 눈부시게 번쩍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저건 설마…!
황금으로 바닥을 다지고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에메랄드로 유리를 대신한 사육장!
그 눈부신 광채에 태현은 전율했다.
‘신의 뜻인가? 착하게 살아온 보답으로 날 위해?’
[???]
태현은 홀린 듯 다가갔다. 그 순간 카르릉하는 소리가 들렸다.
“…?”
-카르릉!
사육장 안은 텅 비어 있지 않았다. 안에는 토끼 하나가 들어 있었다.
‘뭐야. 안 돌아가는 거 아니었나?’
시설이 파손되어서 운영이 안 되어 있을 텐데 토끼가 남아 있다니.
[카르바노그가 조심하라고 합니다!]
“…?”
-카르릉!
[크네마 백작이 직접 키운 <고대 뱀파이어 토끼들의 왕>이 울부짖습니다!]
[저항에 실패합니다!]
[이동 속도가 느려집니다!]
[스킬 쿨타임이…]
[방어력이…]
[……]
“?!??!?”
태현은 정말 놀랐다.
태현의 상태 이상 저항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랭커들 중에서도 태현만큼 디버프에 잘 버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키서스의 화신> 패시브 스킬들과 미친 행운 스탯, 그리고 정말 다양하게 뜯어낸 각종 방어 스킬들까지!
그런데도 그걸 뚫고 상태 이상을 먹이다니.
대체…?
[카르바노그가 저 토끼는 매우 강한 토끼라고 말합니다. 크네마 백작이 아무래도 고대 뱀파이어의 피를 먹여 각성시킨 것 같다고 합니다!]
뱀파이어 드래곤에 이어 뱀파이어 토끼.
뱀파이어 드래곤은 매우 무서웠지만 뱀파이어 토끼는 별로 무섭게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진짜 센 뱀파이어 토끼는 매우 무섭다!
[<고대 뱀파이어 토끼들의 왕>은 크네마 백작말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의하십시오!]
[토끼의 신 카르바노그의 사도입니다. <고대 뱀파이어 토끼들의 왕>이 당신을 인정합니다.]
[토끼 지배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고대 뱀파이어 토끼들의 왕>이 당신을 나름 좋아합니다.]
그러나 태현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장점 같지 않은 장점이 있었다.
토끼와 친하다는 것!
-카릉.
‘고대 뱀파이어 토끼들의 왕… 너무 기니까 토왕이라고 불러야지.’
[카르바노그가 그 소리 절대 쟤한테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토왕은 태현한테 이빨을 들이대는 걸 멈추고 들어와도 좋다는 듯이 거만하게 드러누웠다.
물론 거만하게 드러누워도 토끼였기 때문에 별로 위엄은 없었다.
“음… 그래서… 넌 뭘 할 수 있고 왜 여기 있는 거니?”
-카릉.
[먹이를 주고 자기를 섬기던 크네마 백작이 떠난 다음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
보통 주인 없으면 떠나지 않나?
토왕 정도라면 저 사육장 정도는 충분히 부술 수 있을 텐데?
-카릉.
[왕은 자기 발로 움직이지 않는 법. 다음 백작이 자기를 모시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냥 게으른 놈 아닌가?’
한마디로 자기 발로 움직이기 싫어서 저랬다는 것!
“토왕아.”
[카르바노그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라고 탄식합니다!]
-카릉?
그러나 토왕이는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반응!
[……]
“너 레벨이 혹시 몇이니?”
그 질문에 토왕이는 당당하게 앞발가락 하나를 폈다.
“…천, 천?!”
태현은 경악했다.
레벨 100일 리는 없을 테고, 설마 1,000???
아니… 그게 말이 되나?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면….
[1. 1이라는 뜻이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해줍니다.]
“…….”
태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뭔 레벨 1??
‘아니. 레벨 1짜리 울부짖음에 상태 이상 걸린 거라고?’
어디 가서 부끄러워서 말도 못 할 이야기!
물론 특수 스킬들은 레벨이 낮아도 상관이 없지만….
태현은 안으로 들어가 토왕이를 붙잡았다. 토실토실하게 오른 토끼가 그대로 들어올려졌다.
-카릉! 카릉!
[토왕이가 무엄하다고 화를 냅니다.]
“그래. 그래.”
이런 토끼를 보고 속은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태현은 반성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 * *
“사신을 쫓아 보냈다고? 블라디란 놈이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놈은 뱀파이어의 수치다!”
뱀파이어 백작들 사이에서 ‘블라디’란 이름은 명예도 규칙도 모르는 쓰레기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작님!”
“뭐냐?”
“크… 크네마 백작의 흡혈성에 누군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스카비오 백작은 경악했다.
자기 자신도 들어가지 못했던, 강력한 침입불가 마법이 걸려 있던 흡혈성.
게다가 아직 크네마 섬의 주인은 정해지지도 않은 상황!
그런데 감히 어느 놈이!?
“설마… 그 블라디란 놈이 들어간 거 아닐까요?”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백작님! 그놈 말고는 의심가는 놈이 없습니다!”
“차라리 안달토 백작이 들어갔으면 모를까 그놈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들어갔단 말이냐!”
스카비오 백작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절대 들어가지 못했던 곳에 블라디란 놈이 손쉽게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해 봤습니다! 안달토 백작이 점령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놈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
주변은 조용해졌다.
모두 전율에 떨고 있었다.
블라디란 뱀파이어, 정말 무서운 뱀파이어다!
대체 이런 뱀파이어가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블라디 놈이 만약 성 안에 있는 그걸 먼저 발견하면….”
“…아니다! 놈은 그걸 모를 거다. 나나 안달토 백작 정도 아니면 존재하지도 않을 테니까.”
스카비오 백작은 포기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그 흡혈성 안에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미치지 않고서야 토끼 기르는 곳에 가서 토끼를 찾겠느냐? 블라디란 놈이 아무리 교활하고 영악해도 그건 모를 것이다!”
그랬다.
스카비오 백작이 쓰레기 같은 가치밖에 없는 크네마 섬을 먹고 성을 점령하려는 이유는 바로 <고대 뱀파이어 토끼들의 왕> 때문이었다.
고대 뱀파이어 출신에, 온갖 비술의 달인이었던 크네마 백작이 이뤄낸 최후의 걸작!
소문에 따르면 그 토끼에는 온갖 뱀파이어들의 비술이 담겨 있다고 들었다.
대체 그런 대단한 기술을 가졌는데도 왜 다른 몬스터들을 놔두고 그릇을 토끼로 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크네마 백작이 골랐다면 토끼여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토끼가 뭐 비술에 더 잘 맞는다거나, 더 튼튼하다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성공했다는 것!
그 토끼를 가지는 순간 강력한 괴수 군단을 손에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비슷한 대화가 안달토 백작의 진영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블라디… 사신을 공격한 그 무식하고 근본 없는 뱀파이어 놈은 모를 것이다! 포기할 수 없다. 군대를 준비해라!”
“백작님. 흡혈성은 위험합니다! 거기가 얼마나 강력한지 아시잖습니까?”
“흥. 크네마 백작과 달리 블라디란 놈은 흡혈성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거다! 오히려 방어는 더 약해졌을 거다.”
안달토 백작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크네마 백작은 온갖 비술의 달인이었고 각종 마법을 사용해 흡혈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이 바뀐 상황.
바뀐 주인이 크네마 백작보다 뛰어날 리는 없을 테니, 있는 것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수 있었다.
막 주인이 바뀌어서 혼란스러운 지금이 기회!
“너희들도 알고 있을 텐데! 고대 뱀파이어 토끼 군단이 얼마나 강력한지! 나름 마수를 부린다던 살라비안 교단도 두려워서 꼬리를 내릴 정도였다!”
안달토 백작은 포기할 수 없었다.
토끼…!
토끼를 손에 넣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