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20화
“이런 치사한 성 같으니… 설마 사람을 차별하는 거냐! 같은 뱀파이어끼리 이래도 되는 거냐! 당장 저놈에게도 저주를 내려라!”
블라디는 성에게 삿대질을 하며 따졌다.
멀리서 지나가는 뱀파이어들이 그걸 보고 머리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렸다.
뭐야 저 늙은 뱀파이어?
미쳤나 봐!
“블라디. 나한테 들리는 거 알고 있지?”
“…폐, 폐하 말고 다른 사람한테 한… 저기 지나가는 뱀파이어들 있잖습니까.”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뱀파이어들!
“그리고 저주가 안 내린 게 아니다. 내렸는데도 별 효과가 없군.”
“예? 어째서? 설마 아키서스의 힘…!”
“그렇지.”
아키서스는 행운의 신.
흡혈성의 저주가 아무리 불운을 몰고 와도 태현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블라디는 다른 식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하긴, 아키서스가 저주의 신 그 자체니 어지간한 저주는….”
“…아키서스는 행운의 신이다.”
“아. 그랬었죠.”
무심코 본심이 나온 블라디였다.
* * *
“폐하. 그러면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블라디는 어울리지 않게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건 기회다!
도망칠 기회!
“응? 아냐. 내 옆에 바짝 붙어라. 그러면 불운도 커버가 될 거야.”
“아… 아니. 그렇게까지 해서….”
“나도 화살받이 하나는… 아니, 부하 한 명은 있어 줘야 공략이 쉽거든.”
“방금 화살받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냐. 화살받이라니. 넌 이번 성 공략에서 케인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거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케인이 뭐지?
아키서스 교단에서 노예를 의미하는 단어인가?
블라디는 질색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은 천천히 성 근처를 돌면서 진입 방법을 확인했다.
‘해자는 깊게 팠고 성벽은 높군… 날아서 들어가면 되나?’
성벽을 보니 저 성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건 꽤나 힘들어 보였다.
가파르고 경사진 데다가 곳곳에는 기어오르는 사람을 막기 위한 함정까지!
“여기 날아가서 들어가 보려고 한 사람은 없나?”
뱀파이어들은 비행이 편한 종족이었다.
조금만 레벨이 높아져도 박쥐 변신이나 다른 동물로 변신할 수 있는 스킬을 얻었으니까.
흡혈성 정면 접근이 안 된다면 위에서 뛰어내려서 들어가는 방법이 먹힐지도….
“당연히 있습니다.”
“어떻게 됐지?”
“추락하던데요….”
“음… 그래.”
태현은 블라디를 붙잡았다.
“…?”
-행운 전환!
[일시적으로 행운이 민첩으로…]
‘이런. 잘못 뽑았군.’
-행운 전환!
[일시적으로 행운이 힘으로…]
‘됐다.’
“폐, 폐하. 왜 절 붙잡으시고….”
“블라디. 날아봐라!”
태현은 블라디를 붙잡고서 위로 던졌다.
언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경험해 보는 것!
그냥 불운으로 인한 저주만 날아온다면 날아서 들어갈 것이고, 다른 저주도 있다면 보고 생각을….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뱀파이어를 집어 던졌습니다! 명성을 얻습니다!]
[신성 스탯이 오릅니다.]
[……]
[투척 스킬이 오릅니다.]
“으아아아아! 저주하겠다! 아키서스!”
블라디는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며 재빨리 박쥐 변신을 하려고 했다.
성벽 위에 착지해야 한다!
[흡혈성이 날아오는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성벽이 높아집니다!]
“와.”
태현은 놀랐다.
저 성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접근하는 상대에 맞춰 성벽이 올라가다니.
쾅!
블라디는 그대로 성벽에 박았다. 소리가 묵직한 게 꽤나 아파 보였다.
‘안 죽었겠지?’
[흡혈성이 성벽을 기어오르는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아냐! 기어오르는 거 아냐! 내려갈 거야! 잠시 부딪힌 거다!”
블라디가 애절하게 외쳤지만 흡혈성은 들어주지 않았다.
“크아아아악!”
블라디는 감전된 것처럼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태현은 잽싸게 블라디를 받았다.
“괜찮냐?”
“안 괜찮다! 세상에 그런 무식한 방법을… 늙은 뱀파이어를 이렇게 괴롭히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냐!”
어찌나 무서웠는지 존댓말도 사라진 블라디!
“그러면 다음에는 대포로 쏴줄까? 그게 더 나았으려나.”
“…폐하.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 * *
‘역시 성문인가?’
태현은 성문으로 접근했다. 불운이 심해진다는 메시지창이 계속 떴지만 태현에게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앗. 이거 더 안으로 들어가면 경험치 작업 할 수 있는 건가?’
태현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흡혈성 중앙에 도착해도 태현의 행운 스탯은 전부 다 깎이지 않을 것 같지만….
그것만 해도 어딘가!
적어도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 양은 줄어들 게 분명했다.
‘그러려면 들어가야 하는데….’
태현은 <고대의 망치>를 꺼냈다.
활활 타오르는 오러가 달린 망치에 블라디는 움찔했다.
‘성기사인가?!’
블라디는 알지 못했다. 태현이 철거업자 관련 칭호를 받을 정도로 수많은 성문들과 건물들을 박살 내왔다는 것을!
꽝!
[<꿈틀거리는 흡혈성의 정문>은 데미지를 받지 않습니다.]
꾸르르륵-
[<꿈틀거리는 흡혈성의 정문>이 자격 없는 침입자에게 분노합니다!]
퉤에엣!
성문에 입이라도 달린 것처럼, 성문이 붉은 피의 가시를 쏘아댔다.
물론 태현이 이제 와서 이런 거에 겁을 먹을 사람은 아니었다.
캉! 카캉! 카카캉!
검으로 쳐내고 막아내고 반격의 원까지 사용해서 되돌려줬다.
[흡혈성의 힘으로 <꿈틀거리는 흡혈성의 정문>이 회복합니다!]
블라디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태현의 모습에 감탄했다.
과연 아키서스답게 무시무시하다!
뱀파이어를 도륙하면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 같은 담대함!
“왜 그렇게 쳐다보냐?”
“폐하의 모습이 너무 멋있으셔서….”
“…?”
[…?]
어쨌든 다른 사람들이 흡혈성을 뚫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접근하는 순간부터 불운 저주.
그 불운을 버티고 어떻게든 스킬을 써서 기어오르거나 날아오르려고 하면 성이 살아서 움직여 침입자를 막아냈다.
성문으로 뚫어보려고 해도 성문은 빠르게 데미지를 회복했다. 불운 상태에서 성문의 반격까지 막아내면서 뚫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귀찮게 할 필요 없지.’
-살아 움직이는 폭탄!
태현은 성큼 다가가 성문을 폭탄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뒤로 물러섰다.
[카르바노그가 당황해합니다.]
‘왜? 이런 일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잖아.’
[성이 통째로 날아가면…]
‘…아, 아니. 설마 그럴 리가.’
태현은 카르바노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닫고 멈칫했다.
‘저 성은 통째로 움직이는 놈이고, 저 성문은 따로 있는 일개 부품 같은 거잖아. 성까지 날려 버릴 수준은 안 될 거라고.’
[카르바노그가 당신의 기계공학 스킬을 지적합니다.]
성문이 성보다는 약해도, 태현의 기계공학 버프를 받으면?
‘…취, 취소해야 하나?’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악!”
블라디의 비명이 주변을 채웠다.
[<꿈틀거리는 흡혈성의 정문>을 폭발시켰습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오릅니다.]
[명성이…]
[신성이…]
[현재 블라디의 이름으로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핏빛 군도에서 블라디의 악명이 높아집니다!]
“…!”
태현은 눈이 뜨인 것 같았다.
아. 나는 이제까지 정말 정직하게 판온을 해왔구나!
정직하게 악명을 스스로 다 받다니.
앞으로는 다른 사람을 앞세워서 악명을 세탁해야겠다!
[카르바노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후. 판온을 너무 착하게 했어.’
[?????]
카르바노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메시지창은 계속해서 나왔다.
[흡혈성이 정문을 회복시키려고 합니다!]
“앗. 들어가야지.”
태현은 엎드려서 떨고 있는 블라디의 멱살을 잡고 앞으로 뛰었다.
* * *
[크네마 백작의 흡혈성 안에 처음으로 입장했습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오…!’
아까 성문을 날려 버린 것에 더해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 곳에 들어온 보너스까지.
‘거기에 행운이 좀 낮아져서 그런 건가?’
현재 레벨 148. 이제 150도 멀지 않았다.
예전에는 ‘난 레벨 100도 못 갈 거 같다’ 생각했었지만, 사람은 어떻게든 성장하는 법이었다.
다른 놈들은 300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건 모르는 척하자!
‘어라. 공포 스탯이 9,995네?’
공포 스탯.
높으면 눈빛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적한테 위압감이나 각종 상태 이상을 주고, 상대방의 공포에 저항할 수 있는 스탯이었다.
힘이나 민첩, 체력이나 지혜만큼은 아니어도 높아서 나쁠 건 없는 쏠쏠한 스탯!
태현은 게임 초반에 <공포를 모르는 자>라는 사기 칭호를 받아서 각종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겁을 먹지 않았기에, 공포 스탯이 좀 의미가 없긴 했다.
‘1만 찍으면 스킬 같은 게 나올 거 같은데….’
[크네마 백작의 흡혈성 안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크네마 백작의 검을 갖고 있습니다.]
[크네마 백작의 흡혈성이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합니다!]
[성의 권리를 얻습니다!]
파아아아앗!
안에서 몬스터가 나오지도 않고, 던전을 깨지도 않고, 성은 순순히 권리를 넘겨줬다.
태현 앞에 메시지창이 떴다. 성을 관리할 수 있는 성주 권한 메시지창이었다.
“…??”
이렇게 그냥 준다고?
태현과 블라디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몰래 들어올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날로 먹을 기대는 하지도 않았는데…!
“아니. 몬스터도 없나? 아까 그렇게 잘 막더니….”
태현은 아쉽다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경험치!
기껏 불운 페널티 받고 경험치 좀 빠르게 올리나 했더니….
그러나 사방을 돌아봐도 잡을 만한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그저 블라디뿐.
“…….”
“폐하? 왜, 왜 그렇게 쳐다보시죠?”
“아냐. 아무것도.”
성주가 된 이상 불운 페널티도 사라졌다.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애들 다 불러야겠군.”
해안가에 있는 임시 요새보다는 여기 성이 훨씬 더 싸우기 좋을 것이다.
다른 뱀파이어 백작들이 소식을 듣기 전에 움직여야지!
다른 뱀파이어 백작들이 들으면 황당하다 못해 뒷목을 잡을 이야기였던 것이다.
웬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 성을 먹튀해간단 말인가. 눈이 뒤집혀서 덤벼들어도 이상할 거 없었다.
태현은 일행을 호출한 다음, 성의 상태를 하나씩 확인해나가기 시작했다.
군사력: F등급
경제력: F등급
기술력: F등급
종교력: F등급
발전도: F등급
영지 골드: 0
……
와! 이런 쓰레기 성이 있다니!
여기에 비교하면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태현은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여기는 블라디 저놈이 다스릴 성이니까….’
보면 볼수록 백작들이 탐내는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태현은 성 내 시설 리스트를 켰다.
[흡혈성의 망루-다 부서져가는 망루지만 올라가면 일단 싸울 수는…]
[흡혈성의 막사-뱀파이어 전사들이 훈련되는 곳이지만 지금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
[흡혈성의 거대한 심장-흡혈성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심장입니다. 이 흡혈성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의 근원입니다.]
“오…?”
그래도 뭔가 좀 그럴듯해보이는 게 있다?
[카르바노그가 이걸 보라며 쿡쿡 찌릅니다.]
‘왜? 더 좋은 게 있어?’
[흡혈성의 토끼 사육장-지금은 텅텅 비었지만 한 때는 토끼가 있었던 곳입니다. 크네마 백작은 토끼를 좋아했습니다.]
“…….”
태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토끼 사육장 설명을 껐다.
[카르바노그가 화를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