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17화
블라디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닥치라는데 닥쳐야지!
‘크네마 백작의 검은 어떻게 써야 하나….’
그러나 태현은 블라디의 경고를 생각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뱀파이어 아닌 게 들키면 페널티.
아키서스 교단인 걸 들키면… 페널티인가?
[카르바노그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일단 뱀파이어들은 타 종족을 기본적으로 깔아보고 시작했다.
그런 만큼 다른 종족이 자기네 영지를 먹겠다고 하면 여러모로 페널티가 들어갈 것이다.
-인간 백작이라니! 우우!
-뱀파이어 아닌 주인은 용납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아키서스 교단은?
-아키서스 교단이라니! 그런 사악한 교단은 받아들일 수 없다!
-아키서스 교단이라니! 너무 무섭다! 말 잘 들을 테니 제발 아키서스만큼은!
말을 안 들을지, 말을 잘 들을지 태현도 예상이 가지 않았다.
‘일단 인간인 건 숨겨야겠지.’
괜히 페널티 받고 시작할 필요가 없었다.
“음….”
태현은 블라디를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얘 뱀파이어잖아?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블라디는 태현의 시선이 불안했는지 몸을 꼼지락거렸다.
전승에 따르면 아키서스의 시선을 오래 받으면 수명이 준다던데….
“흠. 블라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내가 너한테 선물을 하나 주마.”
“전 괜찮습니다!”
슥-
블라디의 목에 칼이 다시 들어왔다.
“받을래 말래?”
“…감사히 받겠습니다… 크흑!”
* * *
태현의 계획은 간단했다.
블라디를 간판으로 세워 크네마 섬을 먹는 것!
태현이 간판으로 나서서 먹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간단하고 부담이 덜한 일이었다.
물론 블라디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왜 크네마 백작의 검을 가졌는데도 블라디가 이런 사기나 치고 있었겠는가.
‘내가 그런 싸움에 어떻게 끼어들어!’
영지를 얻겠다고 싸우는 뱀파이어들은 다들 한가닥 하는 뱀파이어들이었다.
그런 뱀파이어들 사이에 끼어서 ‘내가 검 찾았다! 내가 백작 된다!’ 같은 소리를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목이 잘려 나갈 수 있었다.
원래 고래 싸움에는 새우가 끼어드는 게 아닌 법!
“살려주십쇼!”
블라디는 엎드렸다.
짧고 굵게 죽기보다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
“아직 안 죽였는데 왜 그래?”
“혹시나 제가 백작이 되더라도… 핏빛 군도의 다른 뱀파이어 백작들한테 암살당할 겁니다! 걔네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음. 걔네들이 무섭냐 아키서스가 무섭냐?”
블라디는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아키서스?”
“…걔네들이 더 무섭다고 말해주기를 조금 바랐는데.”
태현은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에이 그래도 그 백작들이 더 무섭죠!’ 같은 대답이 나오기를 조금 바랐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블라디는 솔직했다.
이런 지나치게 솔직한 자식!
“블라디. 네가 살고 싶으면 방법이 있다. 다른 놈들을 겁먹게 만드는 거야.”
“…?”
“그냥 네가 지나가다가 검 주워서 백작이 되었다고 하면 모두가 우습게보겠지만, 아키서스 교단을 등에 업고 백작이 되려고 한다면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냐?”
“미쳤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슥-
“…두, 두려워 할 것도 같습니다.”
“그래. 두려움! 두려움을 잘 활용하는 거다.”
누구보다도 두려움을 잘 활용하는 태현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물론 선신 교단이 할 말은 아니었다.
[카르바노그가 이제 악신 교단으로 가는 거냐고 당황해합니다.]
“평소에 에반젤린 같은 호구들 뜯어먹을 때를 생각해 봐.”
“야….”
“있어 보이는 현명한 뱀파이어인 척을 하면 다들 넘어가지 않았냐?”
“그런… 그랬었습니다.”
“그럼 이제 매우 무서워 보이는 정체불명의 뱀파이어 백작인 척을 하자.”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잘 못 하면 죽을 텐데 열심히 해야겠지.”
“…….”
* * *
“크하하하! 나, 크네마 백작의 정당한 계승자이자 공포를 모르는 자, 카테란드 바다의 질서를 가지고 온 자, 모든 토끼들의 주인이자 악마의 혓바닥을 가진 자, 사디크와 기타 등등 신의 힘을 빼앗은 자, 악마 공작을 속이고 쓰러뜨린 자. 드래곤을 쓰러뜨린… 아니, 이거 좀 심하지 않습니까?”
블라디는 당황했다.
원래 이런 업적들은 상대를 겁먹게 만들고 움츠러들게 한다는 점에서 거창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정도가 있지.
악마 공작을 속이고 쓰러뜨리고 드래곤도 쓰러뜨리고 다른 신들의 힘도 빼앗은 자라니.
그게 말이 되나?
“이 정도는 해야 겁을 먹지 않나?”
“아니, 그래도 좀 말이 되야….”
“실제로 내가 한 일들인데?”
“????”
블라디는 기겁했다.
생각해 보니 살라비안 교단 대주교도 이 아키서스가 슥삭했던 것 같은데….
너무 무섭다!
“뭐 그게 부담이 되면 그런 아키서스를 업고 있다고 해.”
“아키서스 교단에서 무슨 자리를 맡고 있다고 할까요?”
“흠… 대충 뱀파이어 전사라고 하자.”
“너무 대충 아닙니까?”
블라디는 투덜거렸다.
감투란 자고로 이름이 멋있어야 하는 법!
“그럼 고위 뱀파이어.”
“너무 대충….”
슥-
“…지어도 품격이 있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오냐.”
법은 멀었고 칼은 가까웠다.
블라디는 현재 핏빛 군도의 세력과 크네마 백작의 섬에 끼어든 세력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핏빛 군도는 뱀파이어 귀족들이 언제나 싸우는 땅입니다. 이 중 몇몇 강력한 백작들이 있고….”
일행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너무 많고 복잡한 핏빛 군도의 세력들!
온갖 뱀파이어 귀족들이 서로 얽혀 있으니 듣는 것도 일이었다.
“아. 됐고. 크네마 백작에서 싸우는 놈들이 누구냐고.”
“지금 남아서 싸우는 건 스카비오 백작과 안달토 백작….”
“그 둘밖에 없어? 뭐야. 쉽겠는데?”
“스카비오 백작은 에스파비오 백작과 밀라네 백작, 팔라치 백작… 등의 지원을 받고 있고 안달토 백작은….”
“아. 작작해라.”
태현은 짜증을 냈다.
“지원이고 뭐고 간에 일단 거기서 싸우는 건 둘밖에 없다는 거잖아?”
“나머지 군소 세력들은 다 쓰러졌고 이제 둘만 맞서고 있죠.”
“잘됐네. 포병대와 기사단 불러와서 정면으로 쓸어버리기 좋겠다.”
‘포병대? 기사단?’
블라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미, 미, 미, 미친….”
블라디는 입을 떡 벌렸다.
태현 일행이 잠시 사라지더니, 웬 무시무시한 놈들을 데리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한쪽은 기묘하게 생긴 대포들을 우르르 끌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미친놈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정체를 알아서 무서운 미친놈들이었다.
언데드 사냥 전문 기사단!
뱀파이어 입장에서는 팔다리가 덜덜 떨려오는 일이었다.
“가자! 저 섬인가?”
해안가 쪽에는 스카비오 백작의 깃발이 걸려 있는 진영이 보였다.
스카비오 백작에게는 안 된 일이었다.
반대쪽 해안가를 택했다면 당할 일이 없었을 텐데!
-침입자, 여기는 우리가 점령한 땅이다. 돌아가라! 접근하는 순간 네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버릴 테니!
“폐하! 처형하게 해주십시오!”
박쥐가 날아와서 말하자 그걸 본 기사들이 경련을 일으켰다.
뱀파이어다!
“그래. 가도 좋다.”
“와아아아!”
“야. 잠깐. 아직 물 위인데…?”
기사들은 함성과 함께 물 위로 뛰어들었다. 헤엄치면 금방이지만 그래도 아직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내리다니?
-기사의 완벽한 돌격!
순간 기사들은 허공에서 말을 소환하더니 바다 위를 달려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부럽다!’
기사들만이 쓸 수 있는 전용스킬!
태현은 감탄했다.
-뭐, 뭐야?
-기습이다! 기습!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기사단이 쳐들어오자 뱀파이어들은 당황했다.
“에랑스 왕국 놈들이 감히 우리를 토벌하려고 기사단을 보내?!”
“용서하지 않겠다!”
“다른 백작들을 불러라!”
침입자가 있을 경우 똘똘 뭉치는 것이 핏빛 군도의 뱀파이어였다.
에랑스 왕국이 쉽게 토벌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
“야. 외쳐야지.”
“콜록, 콜록. 넵.”
블라디는 마른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준비했다.
“들어라! 콜록. 콜록.”
야심차게 외친 블라디. 블라디의 목소리는 그대로 묻혀버렸다.
챙챙챙!
“기사들을 막아라!”
“죽어라, 불결한 언데드들!”
중갑을 입고 덤비는 기사들, 그리고 그 기사들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뱀파이어들.
치열한 싸움 덕분에 블라디는 무시당했다.
“…….”
“…….”
“들어라! 들으라고!”
“…?”
그제야 뱀파이어들이 고개를 돌렸다. 저 듣도 보도 못한 뱀파이어 놈은 누구?
“클클클… 나는 블라디! 아키서스 교단의 고위 뱀파이어이자 기사단을 손에 넣고 부리는 강력한 뱀파이어다! 클클, 잘 들어라! 크네마 백작의 검은 내 손에 있다! 이 내가 크네마 섬의 정당한 백작이란 말이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번쩍!
블라디는 검을 치켜들었다.
크네마 백작의 검이 사악한 빛을 발하고, 그 빛에 자리에 있던 뱀파이어들이 블라디를 인정하지… 않았다.
[스카비오 백작의 뱀파이어들이 분노합니다!]
[스카비오 백작의 뱀파이어들이 당신의 선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스카비오 백작 진영의 적대도가 올라갑니다!]
[……]
[……]
[당신의 목에 현상금이 걸립니다!]
이제와서 백작의 검을 찾았다고 ‘아, 네, 그러십니까’ 하고 물러설 정도로 뱀파이어들은 친절하지 않았다.
“죽여!”
“뺏어!”
“놈의 검은 가짜다! 속지 마라! 그래도 뺏어라!”
인정하지 않고 뺏을 생각으로 가득!
블라디는 기겁해서 뒷걸음질쳤다.
거리가 멀었는데도 무서워!
그러나 블라디는 잊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더 무서운 이들이 있다는 것을
쿵-
상륙을 마친 태현 일행과 아키서스 포병대가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발사 준비.”
“공격! 공격!”
뱀파이어들의 절반은 기사단을 둘러싸고, 절반은 블라디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달려오던 뱀파이어들은 도중에 떠들었다.
“저놈들은 근데 누구냐? 뱀파이어가 아닌 것 같은데.”
“기사단도 아닌 거 같다.”
“아까 저 뱀파이어 놈이 무슨 교단이라고 하지 않았나?”
“살라비안?”
“아니. 아키서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키서스? 아키서스…?”
이 자리에 있는 뱀파이어들은 대부분 젊은 뱀파이어들이었다.
<아키서스를 만났을 때 살아남는 방법> 같은 건 읽어본 적 없는 뱀파이어들!
블라디는 한탄했다.
요즘 젊은 뱀파이어들은 겁이 없다고.
콰콰쾅!
살라비안 교단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했던 아이템들.
그 아이템들이 화끈하게 뱀파이어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
달려들던 뱀파이어들이 싹 날아가자 그 뒤 뱀파이어들은 기겁했다.
저게 대체?
“드, 드워프들이 왔나?”
“이게 무슨…!”
[스카비오 백작 뱀파이어들의 사기가 내려갑니다!]
[스카비오 백작의 원한이…]
[……]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
“용용이. 흑흑이. 나와서 경계 서라.”
태현은 흑흑이도 꺼냈다.
뱀파이어 상태지만 여기 이 핏빛 군도는 햇빛이 잘 안 들어서 상관이 없었다.
‘이런 장점도 있군.’
“안개로 변신해서 접근… 크아악!”
“박쥐로 날아가서… 크악!”
정면으로 돌격했다가 갈려 나간 뱀파이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각종 변신을 사용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아키서스 포병대들은 화염탄, 은탄, 각종 포탄을 바꿔가며 신나게 두들겨 팼다.
게다가 안개로 변신해서 접근하는 쪽에게는 용용이와 흑흑이가 화끈하게 마법을 갈겨댔다.
“저… 저건! 뱀파이어 드래곤…?!”
“전, 전설의 뱀파이어 드래곤이다!”
“??”
-?????
[???]
태현도, 흑흑이도, 카르바노그도 당황했다.
뭔 전설의 드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