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16화
태현은 늙은 뱀파이어가 도망치려는 걸 바로 알아챘다.
“잡아!”
케인과 최상윤이 급히 달려가 뱀파이어의 어깨를 붙잡았다. 항아리를 빼지 못하도록.
“아키서스다! 아키서스! 뱀파이어 살려!”
“입도 막아!”
“읍읍읍!”
“빨리 뽑아!”
“읍! 으읍!”
늙은 뱀파이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눈빛으로 호소했다.
-젊은 뱀파이어여! 너도 뱀파이어라면 아키서스 같은 사악한 종자와 어울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뽑아라!
그러나 한 재산 뜯긴 에반젤린에게 늙은 뱀파이어의 소리는 개소리일 뿐이었다.
“잘 뽑겠습니다!”
“으으으읍!”
[<봉인된 뱀파이어의 최고급 혈액>을…]
[<박쥐로 변신할 수 있는 밤의 망토>를…]
[……]
“나와! 나온다고!”
에반젤린은 신이 나서 실버를 늙은 뱀파이어에게 집어 던지며 뽑기 시작했다.
늙은 뱀파이어는 몸부림쳤지만 케인과 최상윤은 단단히 붙잡았다.
“야. 근데 이 뱀파이어는 아키서스를 어떻게 아는 거지?”
“대륙에서 명성을 떨쳐서 그런가?”
“오래 살아서 그런 거 아닌가? 앗. 잘됐군.”
태현은 손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늙은 뱀파이어라면 아는 것도 많겠지!
“살라비안 교단을 알고 있나?”
-…….
늙은 뱀파이어는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늙은 뱀파이어는 오래 살았기에 경험이 많고 지혜로웠다.
그는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아키서스를 만났을 때 살아남는 방법>을 읽은 사람이었다.
-아키서스를 만났을 때, 주변에 친구가 있다면 친구를 넘어뜨리고 도망쳐라. 아키서스는 그 친구를 먼저 잡아먹을 것이다.
-아키서스를 만났을 때, 혼자 있을 경우 가지고 있는 걸 모두 떨어뜨리고 도망쳐라. 아키서스는 그걸 줍느라 늦게 쫓아올 것이다.
-아키서스를 만났을 때, 위와 같은 방법을 모두 쓸 수 없을 경우 눈을 감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척을 해라. 아키서스의 말에 넘어가는 순간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날 수 없게 될 터이니… (중략) …아키서스한테 속은 이들 중에는 골드 드래곤도 있다고 한다.
다른 방법은 쓸 수 없었다.
눈 감고 입 닫기!
늙은 뱀파이어가 그렇게 저항하자 태현은 방법을 바꿨다.
“뭐, 말하기 싫으면 항아리나 더 뽑을까? 에반젤린. 준비됐지?”
촤르륵!
에반젤린은 실버를 꺼내 늙은 뱀파이어 앞에 부을 준비를 마쳤다.
이제까지 쌓인 한을 풀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
“말… 말하겠다! 제발! 제발 그만!”
결국 늙은 뱀파이어는 입을 열었다. 항아리 안에 있는 걸 다 털리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난 살라비안 교단과 상관이 없다! 난 그냥 순진한 늙은 뱀파이어….”
“…뭐라고?”
“…장사를 좀 했을 뿐….”
태현은 늙은 뱀파이어가 이상하게 친근해 보였다.
아!
‘저놈 펠마스 닮았네!’
하는 짓거리가 펠마스 비슷했다!
“살라비안 교단과 상관이 없다고?”
태현은 그저 확인하려고 다시 물었다.
[최고급 화술 스킬을…]
[아키서스의 이름을…]
[늙은 뱀파이어 블라디가 매우 겁을 먹고 진실을 토해냅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조… 조금은 관련이 있을지도….”
“…….”
“안 죽인다고 약속해다오!”
블라디는 에반젤린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나마 여기서 가장 착해 보이는 건 같은 뱀파이어인 에반젤린뿐!
태현은 선선히 대답해줬다.
“죽이진 않을게.”
“진?”
죽이‘진’ 않는다고?
미묘한 어감에 에반젤린은 의아해했지만 블라디는 궁지에 몰려서 그런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살라비안 교단에 발을 담갔던 적이 있긴 한데….”
“!!!”
심지어 살라비안 교단 출신!
조금 관련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일행의 표정을 눈치챘는지 블라디가 다급히 말했다.
“몇백 년 전 일! 몇백 년 전 일이었다! 가입했다가 바로 나왔다!”
“…뭐 그렇다 치고. 나온 건 왜 나왔지?”
“시키는 게 많아서….”
뱀파이어 교단이긴 했지만, 뱀파이어도 나올 정도로 이것저것 시키는 게 많은 살라비안 교단!
뭐 주워 먹을 거 없나 하고 들어갔던 블라디 입장에서는 살라비안 교단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흠.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으면 아는 게 별로 없겠군.”
“!!”
블라디의 귀에는 ‘아는 게 별로 없겠군’이 마치 ‘아는 게 별로 없다니 널 죽이겠다!’로 들렸다.
이대로는 아키서스 당해버린다!
“아는 게 많다!”
“…? 가입했다가 바로 나왔다면서?”
“…주교 자리까지는 했을지도….”
“…….”
“…….”
“그냥 두들겨 패면 안 되나요?”
유지수가 손을 들고 물었다.
타이럼 레인저들은 이럴 때 화살 좀 몇 개 몸에 꽂고 시작하던데!
블라디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저항했다.
“그래. 주교까지 하신 블라디. 살라비안 교단에 대해 아는 거 다 털어놔 봐.”
“안 털었다가 들키면 글자 하나당 화살 하나씩….”
“…??”
“???”
“어, 다들 이렇게 안 하나요?”
쏟아지는 시선에 유지수는 당황했다. 타이럼 레인저들만 하는 방법인가?
“살라비안 교단 고위층들은 대부분 다 뱀파이어다.”
“…지금 설마 그걸 정보라고 말한 거 아니지?”
“!?”
블라디는 당황했다.
살라비안 교단의 고위층이 뱀파이어란 건 나름 비밀이었는데?!
요즘은 상식처럼 되어버린 건가?
“아… 아니. 그게 몇백 년 전에는 비밀이었는데….”
“그거 말고는?”
“어… 어….”
나온 지 오래되어서 쓸모 있을 정보는 거의 없을 것 같았다.
“교단이 부리는 괴수들에게는 약점이 있는데….”
“괴수들 다 죽었다.”
“…대, 대주교가 쓰는 마법에는 비밀이 있는데….”
“대주교도 죽었어.”
“?!?!??”
블라디는 기겁했다.
살라비안 교단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마 아키서스 당한 건가?
“…그냥 죽여주십시오….”
블라디는 빠른 포기를 선택했다.
여기까지인가!
바라는 게 한 가지 있다면, 아키서스하지 말고 깔끔하게 죽여주기를!
“포기하지 마! 블라디!”
“맞아! 기억을 되살려 봐!”
태현 일행은 열심히 블라디를 응원했다. 그 응원이 더 섬뜩해 블라디는 괴로워졌다.
‘그냥 죽여 좀!’
그러는 사이 태현은 블라디가 말한 것들을 되새겨보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대주교 마법에 비밀이 있는 걸 알 정도면 친한 거 아니었나?”
“친… 하지는 않고 가끔 피 마실 때 같이 마시는 정도?”
“저게 어느 정도로 친한 거야?”
“많이 친한 거.”
에반젤린은 바로 대답했다. 태현은 블라디의 목에 칼을 겨누고 말했다.
목에 칼을 대면 다들 기억력이 좋아지게 마련!
“그렇게 친한 사이인데 대주교가 보물 어디다 숨겼는지 모르냐? 응?”
“대, 대주교는 보물을 자기 혼자 챙겨서 나는 하나도 못 받았… 사실 몇 개 훔치긴 했는데 저 항아리에 다 있었다!”
그나마 몇 개 훔친 것도 태현 일행이 모두 뽑아가 버린 것!
‘어라? 그러면 크네마 백작의 검은 원래 살라비안 교단 대주교가 훔쳐간 거였나?’
크네마 섬이 지금 뱀파이어들끼리 싸우면서 개판이 된 것 같던데….
누가 악신 교단 아니랄까봐 이곳저곳 싸움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규모로 보면 아키서스가 더…]
‘시끄러.’
“네 성격에 대주교가 혼자 챙겨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뒤도 안 밟았냐? 응?”
“밟긴 했는데 포기했지….”
“…?”
“어째서?”
“그야 대주교가 절대 훔칠 수 없는 곳에 숨겨놓았으니까.”
블라디의 말에 태현은 긴장했다.
대체 어느 곳에 숨겨놨길래?
다른 드래곤의 레어?
뱀파이어들만 들어갈 수 있는 특수 던전의 심층부?
“그게 어디지?”
“에랑스 왕국 은행.”
“…….”
“…….”
의외의 장소에 일행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아… 그래.
무언가 귀중한 걸 보관할 때는 은행이 최고지!
장소를 들은 이다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현 님. 에랑스 왕국 은행에 보관한 게 사실이면 큰일인데요.”
에랑스 왕국 은행!
골드를 맡기면 이자도 조금씩 주고, 가방 무게가 무거운 플레이어들이 아이템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보관 장소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에랑스 왕가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으니까!
“아…!”
태현은 깨달았다.
대주교가 자기 이름으로 은행에 보물을 맡겨놨으면, 태현은 찾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어지간한 곳이면 들어가서 던전 깨고 훔쳐 나왔을 텐데, 저기는 은행!
일단 할 수 있는지부터 문제였고, 하더라도 에랑스 왕가와 원수 사이가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적이 많은 태현 입장에서 에랑스 왕국마저 적으로 만들면?
‘진짜 대륙 공적 되겠군.’
에스파 왕국이나 잘츠 왕국 같은 멀리 있거나 작은 왕국들을 빼고, 근처에 있는 왕국들과 모두 적이 되는 업적 달성!
다른 사람들이라면 일부러 하려고 해도 못 할 것이다.
“어떡하냐?”
“…가서 훔치는 건?”
“무리겠지. 그게 가능했으면 벌써 소문이 돌았을걸.”
만약 에랑스 왕국 은행에 들어가 뭔가 훔칠 수 있다면, 은신과 도둑질 스킬 만렙을 찍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도둑 랭커들도 한 번쯤은 눈독을 들여보지만 결국 다 포기하는 그곳!
“…가서 말을 걸어보는 건 어때요?”
“???”
이다비의 말에 태현은 의아해했다. 말을 뭐 어떻게 걸라고?
“들어가서 협박하라고?”
모두 손들어! 움직이지 마! 보물을 갖고 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그게 아니라요. 태현 님은 화술 스킬도 높고, 왕위도 갖고 있으니까, 가서 말로 상황을 설명하면….”
“…그럴듯한데?”
원래라면 씨알도 안 먹힐 상황이지만, 태현은 경우가 좀 달랐다.
대륙에서 온갖 명성을 쌓은 덕분에 에랑스 국왕도 만나고 싶어하는 상황.
게다가 본인이 아탈리 국왕이기도 했다.
찾아가서 ‘그 대주교란 놈이 아주 나쁜 놈인데 아탈리 왕가 보물을 싹 훔쳐간 놈이니 좀 돌려주십쇼~’라고 잘 말한다면 의외로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들어가서 강도질하거나 도둑질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방법!
“…그러면 전 이제 놔주시는 겁니까?”
블라디는 은근슬쩍 존댓말로 물었다.
옆에서 보니 대화가 잘 풀린 것 같은데 나는 가도 되겠지?
“아니야. 보니까 넌 꽤나 도움이 될 거 같다.”
“아… 아니. 전 늙고 병들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니야. 내가 너와 비슷한 인상을 가진 놈을 아는데, 의외로 쓸모가 있더라고.”
아키서스 교단에 펠마스가 있다면 살라비안 교단에는 블라디가 있다!
게다가 연기하고 사기 치는 솜씨를 보면 펠마스보다 한 수 위였다.
데리고 다니면서 좀 써먹어야겠다!
핏빛 군도에서 퀘스트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이런 도움 되는 놈을 놓칠 수는 없었다.
* * *
“뱀파이어가 아닌 게 들키시면 매우 위험할 겁니다.”
“그래. 그건 알고 있지.”
“아키서스 교단인 게 들키시면 그것도 그것대로 위험할 겁니다.”
“…….”
복잡한 표정을 짓는 태현 일행!
“아키서스 교단은 뱀파이어도 믿어도 된다는데….”
“아니 어떤 미친 뱀파이어가 아키서스를 믿습니까?”
“죽고 싶냐?”
태현은 울컥해서 블라디의 멱살을 잡았다.
아키서스 욕은 해도 내가 하지 남이 하면 화난다!
“아, 아니… 아키서스는 좀… 믿는 뱀파이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안 믿겠죠.”
“왜? 살라비안도 믿는 놈들이?”
솔직히 아키서스 교단이 살라비안 교단에 비교하면 훨씬 더 상식적이고 멀쩡하게 굴러가는 교단!
“무섭잖습니까.”
“…….”
태현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뱀파이어도 아키서스는 무서울 수 있겠지!
“살라비안 교단은 들어갈 때 속을 걱정이 없거나, 최소한 들어갔다가 나오더라도 뭐라도 챙겨 나올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가 있는데 아키서스 교단은 그런 게 좀….”
“알겠으니까 그만 말해.”
“제가 젊었을 때도 다른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어느 교단이 챙길 게 많을까’ 이야기했었는데 그때도 아키서스는 한 번도 안 나왔습니다.”
“알겠으니까 그만하라고.”
“…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