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797화
학카리아스가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부하까지 저렇게 강하다는 건 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저렇게 강한 놈이 뭐하러 학카리아스 밑에 있지?
[학카리아스가 각종 비술과 저주로 저 거인을 문지기로 만들었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해줍니다!]
‘아. 그런 거야? 그런 거면 다행이군.’
이성을 잃고 문지기만 할 수 있게 만든 대신, 강력한 힘을 얻은 것!
그렇다면 여기서 저걸 잡느라 힘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냥 지나쳐 들어가면 됐다.
물론 말이 쉬워서 그냥 지나쳐 들어가는 거지, 실제로는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으아아아악!”
“도… 도와줘!”
쾅! 콰지직! 콰콰쾅!
랭커 마법사는 작은 범위에 지진을 일으키는 마법이 가능했다.
랑드버그는 주먹으로 지진을 일으켰다.
레어 입구 앞의 땅이 쪼개지고 뒤흔들리며 비틀렸다. 사방으로 바위가 날아다니고 쪼개진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혼란 그 자체!
-우아! 우아! 우아!
랑드버그는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휘둘러댔다. 어마어마한 압박이었다.
딱히 누구를 조준한 것도 아니었지만 한 번 날뛸 때마다 플레이어 한둘이 재수 없게 걸려 로그아웃되고 있었다.
“애들아. 축복 걸어줄 테니까 빠르게 파고들자.”
“네!”
돌격!
준비를 끝낸 태현 일행은 비처럼 쏟아지는 바위 사이를 뚫고 달려나갔다.
뒤에 남아 있던 플레이어들은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저놈들은 어떻게 저 사이로 막 가는 거지?
“따… 따라가자!”
콰지직!
물론 따라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파티 하나가 또 날아갔다.
“눈을 가려! 장막 깔고 들어간다!”
“순간이동 안 돼?”
“안 돼! 학카리아스 이 새끼가 막아놓은 거 같아!”
“…다 같이 가자!”
“?!”
“그거밖에 답이 없어!”
태현 파티처럼 쉽게 들어오진 못했지만 다른 파티들도 어떻게든 하나둘씩 랑드버그를 지나쳐 레어 안으로 몸을 던졌다.
여러 파티가 동시에 미친 듯이 달리면 한두 파티 정도는 운 좋게 피해서 들어올 수 있다!
누가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거밖에 답이 없었다.
“헉… 헉헉…”
“미친. 학카리아스 죽어서 레어 털기 쉽다는 놈 누구야?!”
간신히 살아 들어온 연합 파티!
인원이 절반 넘게 사라져 있었다.
더 뼈아픈 건 파티 구성이 깨졌다는 점이었다.
탱커, 딜러, 힐러 이런 식으로 역할을 맡아서 돌아가야 하는데, 아까 랑드버그의 난리로 힐러들이 대거 로그아웃된 것!
안에서 아까 같은 독 함정이라도 나오면 남은 힐러들이 엄청나게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어… 이 레어 제가 차지하면 말입니다… 저놈 치워주실 겁니까?
-하하. 흑흑아. 그건 네가 해야지.
-…저 레어 필요 없습니다! 주인님 곁이 좋습니다!
-아니야. 너도 레어 하나 가지자.
* * *
“계속 가보자.”
정신을 차린 앨콧이 입을 열었다.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피해를 입은 이상 뭐라도 얻고 나가야 했다. 그냥 빈손으로 나갈 순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기에는 여기 레어가 너무 고난이도였다.
이걸 보고 이번 인원만큼 모을 수 있을지도 의문!
“….”
“젠장. 가볼 수밖에 없잖아!”
다른 사람들도 그걸 알았다.
이번을 놓치면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한동안 여길 도전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분위기는 침울했다.
이제 뭐가 더 나올까?
우우웅-
“?”
태현은 의아해했다. 뭐지?
[<다 타버린 잡동사니>가 빛을 발합니다.]
“??”
<다 타버린 잡동사니>?
하도 이곳저곳에서 아이템을 많이 주워서 넣다 보니, 이 아이템이 어디서 주운 건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학카리아스를 터뜨리고서 주운 아이템이라고 카르바노그가 말해줍니다.]
-아. 그거야?
다 타버린 잡동사니 :
엄청난 폭발로 인해 전부 타버린 잡동사니입니다. 원래는 무엇이었을 지 알 수 없습니다.
정체불명의 아이템!
버리기도 뭐하고 해서 나중에 다른 곳에 쓰려고 갖고 있었는데…
‘뭐 좋은 아이템인가? 열쇠? 길 알려주는 지도?’
태현은 기대했다.
빛을 발한 다음에는 뭐지?
그러나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설마 이게 끝?
[카르바노그가 시선을 피합니다. 물건은 원래 폭발하면 고장 날 수 있다고…]
-아니. 그래도 그렇지…! 빛이나 발하지 말던가!
태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대하게 해놓고 이러는 게 어딨냐!
그러는 사이 앨콧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레어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파티 위치 좀 바꾸자.”
“바꿀 때가 되긴 했지.”
앨콧은 그렇게 말하고 태현을 불렀다.
“김태산! …씨!”
“???”
크로포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어색한 부름은 뭐지?
“야. 편하게 불러. 왜 그래?”
“아, 아니. 이상하게… 몸이…”
자신도 모르게 ‘씨’가 붙여서 나오는 현상!
앨콧은 당황했다. 왜 이러지?
“왜?”
“앞… 으로 가주시죠.”
“알겠어.”
태현은 일행을 이끌고 앞으로 갔다. 그걸 본 다른 플레이어들이 수군거렸다.
“앨콧이 저렇게 공손한 사람이었나?”
“난 처음 알았네. 그냥 좀 재수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미지가 호감이 되는 앨콧이었다.
* * *
태현 파티가 가장 앞에, 그 바로 뒤가 토바 파티였다.
토바는 태현의 뒤를 쫓아가면서 생각했다.
‘이놈들 보통이 아니야!’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이상했다. 레어 오면서 저런 소수 인원으로 오다니.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그 뒤에 보여준 실력들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랬다. 남들은 죽어 나가는데 태현 일행은 한 명도 로그아웃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스파이?!’
토바는 움찔했다.
저 실력을 갖고서도 나서지 않고 얌전히 있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스파이밖에 없다!
‘왜 숨어 있는 거지? 뭘 노리고? 레어의 아이템? 헉, 설마 길드 동맹이…?’
원래 여기 근처는 길드 동맹의 영역.
지금 길드 동맹이 자기들 일로 정신이 없으니까 다들 우르르 온 거지, 평소였다면 어림도 없었다.
토바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크로포드가 물었다.
“야, 앨콧.”
“왜?”
“그래도 여기 길드 동맹 영역 아니었냐? 이렇게 외부인 데리고 와서 공략해도 돼?”
“괜찮아. 괜찮아.”
“허락받은 거냐?”
“아니. 어차피 얘네 정신없어서 나한테 뭐라고 못 해.”
당당 그 자체!
길드 동맹이 앨콧에게 따지기에는 지금 앨콧에게 아쉬운 게 너무 많았던 것이다.
토바가 둘의 대화를 들었다면 알았을 것이다. 길드 동맹이 지금 여기까지 스파이 보낼 정신이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걸 모르는 토바의 의심은 더욱더 부풀었다.
‘조심해야지!’
-침입자. 발견. 침입자. 발견.
“골렘이다!”
“맹독 아니지?”
“그냥 골렘이군. 다행이야.”
아까 밖에서 하도 많이 시달려서, 플레이어들은 맹독 골렘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더 강하더라도 중독만 안 됐으면 좋겠다!
-손님. 발견. 손님 발견.
“?”
가장 먼저 앞에 있는 태현 파티가 공격을 받아야 하는 상황.
그런데 골렘은 태현 파티를 무시하더니 그냥 뒤로 달려가서 후려쳤다.
토바를!
“컥?!”
태현 파티가 앞에 있어서 마음 놓고 있던 토바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어? 뭐지?”
“그러게요?”
태현 일행도 당황!
흑흑이 때문인가?
‘블랙 드래곤이라고 손님 취급해주는 건가? 아니. 그런 거면 좀 이상한데.’
아까 밖에서는 딱히 손님이라는 말이 안 나왔었던 것이다.
그냥 흑흑이를 건드리지 않았을 뿐!
‘뭐지?’
쿵쿵쿵쿵-
그러는 사이 골렘들이 뒤에서 더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어… 어?”
그냥 골렘이라고 안심했던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질리기 시작했다.
저게 대체 몇 마리야?
“학카리아스, 이 미친…”
골렘들의 연쇄습격!
그러나 이번에도 똑같았다. 그들은 태현 파티는 내버려 두고 뒤부터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태현은 골렘한테 말을 걸었다.
“잠깐. 안으로 좀 안내해 줄 수 있나?”
“뭐하냐?!”
태현의 행동에 케인은 기겁했다.
달려가는 골렘한테 말을 걸다니!
아무리 태현의 화술 스킬이 높다고 해도, 무생물인 골렘한테까지 통할 수는 없었다.
그게 말이…
-손님. 안내. 손님. 안내.
골렘은 재빨리 태현을 들어서 어깨 위에 올리더니 뒤로 돌아서서 호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
“??!?!”
“쟤네들도.”
-손님. 더 안내. 손님. 더 안내.
“뭐, 뭐야?”
태현 파티는 혼란을 틈타 골렘의 어깨 위에 타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싸우고 있는 연합 파티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상황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내 생각에… 내가 학카리아스를 잡고 얻은 아이템 중에 손님 취급받는 아이템이 있었던 것 같아.”
“…무슨 레어 출입증이라도 있었나요?”
“그런 거 아닌가 싶은데.”
그게 아니라면 골렘이 이렇게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확인해 보는 방법이 있지. 흑흑아. 저기까지 날아가 봐.”
태현은 흑흑이를 일행한테서 멀리 날아가게 시켰다.
그러자 골렘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흑흑이를 쏘았다.
-으아아악!
“역시. 레어 안에서는 같은 블랙 드래곤이고 뭐고 없군.”
정말 이런 부분에서는 칼 같은 학카리아스!
밖이면 모를까 안에서는 동족도 무조건 공격하는 철저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흑흑. 주인님.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그래. 그래도 곧 레어 얻을 생각하니까 신나지?”
-이제 별로 신 안 납니다…
흑흑이는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이 레어는 아직 그가 관리하기에는 어려운 것 같아!
“골렘. 학카리아스 보물 창고로 가자.”
-손님. 그쪽으로는 안내 불가. 손님. 그쪽으로는 안내 불가.
“와. 이런 치사한 자식을 봤나.”
보물 창고로는 아예 안내를 안 시켜주는 철저함!
태현은 솔직히 조금 감탄했다.
레어를 관리한다면 학카리아스처럼!
하지만 이런 건 언제나 편법이 있는 법이었다.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어디 있지?”
-학카리아스 님의 응접실, 제1 고문실, 제2 고문실, 제3 고문실, 제4 고문실…
“….”
“….”
태현 일행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 산속에 뭔 놈의 고문실이 이렇게 많아?
“혹시 고문실에 사람 있나?”
-지금은 없습니다.
“쳇.”
태현은 아쉬워했다. 구해주면 생색 좀 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응접실… 응접실은 아니야. 학카리아스 성격에 손님 들어오는 곳 근처에 보물창고를 두진 않았겠지. 최대한 멀리 뒀을 거다.’
“고문실로 가보자!”
-몇 고문실로?
“…1부터!”
태현은 망치를 꺼냈다.
어차피 학카리아스도 죽었겠다, 이제 대충 벽 부수면서 길 만들어도 되겠지?
-여기가 제1 고문실입니다.
고문실 안에는 각종 우리들이 가득했다.
[<마법처리가 된 백금 우리>를 발견했습니다. 특수한 몬스터를 가둘 수 있습니다.]
[대장장이 기술이 매우 높습니다. 오리하르콘이 아주 조금 섞인 쇠사슬을 발견합니다.]
[….]
“!!!”
벽을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던 태현은 조용히 망치를 내렸다.
생각지도 못한 부수입!
“일단 다 챙기자!”
-손님. 경고. 손님 경고. 학카리아스 님 물건에 손대면…
부웅-
태현은 대답 대신 망치를 휘둘렀다. 골렘은 한 대 맞고 그대로 박살이 났다.
콰지직!
“빨리 챙기자!”
“네!”
일행은 이런 치고 빠지기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태현이 망치를 휘두르는 순간부터 바로 움직이는 손!
마치 전문 강도단 같은 동작이었다.
빠르게 견적 내고 훑고 집어넣고 빠져나가기!
-손님. 손님.
“!”
그러나 나가기도 전에 새 골렘이 나타났다. 태현은 망치를 들고 휘두르려…
-문제 생겨서 죄송. 새로 안내해줌. 문제 생겨서 죄송. 새로 안내해줌.
“음?”
-파손 이유 궁금. 파손 이유 궁금.
태현은 깨달았다.
골렘끼리는 서로 왜 부서진지 공유가 안 되는구나!
“어… 갑자기 부서지던데?”
태현은 슬쩍 망치를 다시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