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773화
침묵.
뒤따라온 유지수가 물었다.
“이런 말에 대답할 것 같지 않은데요.”
“아냐. 기다려봐.”
잠시 후 대답이 멀리서 들려왔다.
“어떻게 믿습니까!”
“!!”
일행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정말 대답을 하네?
태현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스미스는 이래야지.”
“이제 김태현 씨 안 믿을 겁니다! 이세연하고 손을 잡다니!”
“아니. 나도 손을 잡고 싶어서 잡은 게 아니라~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니까?”
마치 삐진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대화!
일행은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너네 안 싸우니?
김태현 vs 스미스라는, 게시판에 심심하면 올라오는 떡밥을 정말로 보여줄 줄 알았는데….
“이세연하고 싸우면 안 되는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 네가 이세연하고 대놓고 대립했잖아!”
“황제 우이포아틀은 사악한 NPC입니다. 그걸 편들어주는 이세연이 나쁜 거 아닙니까!”
그 말을 들은 태현은 살짝 찔렸다.
자기는 우이포아틀한테 받고 알렉세오스한테 받고….
하여튼 받을 건 다 받은 것이다.
“여기 NPC들이 김태현 씨 좋게 말해줘서 믿었는데!”
“응? 누구?”
“드라켄 비밀결사원들 말입니다!”
“아. 걔네 아직도 살아 있었… 물론 살아 있으리라 믿고 있었지.”
태현은 급히 말을 바꿨다. 저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스미스! 나와서 이야기하자!”
“…못 믿겠습니다.”
“이럴 시간이 없다니까? 곧 이세연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들어오면 대화도 못 해.”
“…….”
스미스는 주저하더니 슬쩍 통로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유지수가 그걸 보더니 물었다.
“이제 쏴도 되나요?”
“아니. 대화할 건데?”
“!”
“!!!”
“!!!!!”
일행 모두가 경악!
“속여서 공격하려는 줄 알았는데…!”
“정말 대화하려고 부른 거였어?!”
스미스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뭡니까?”
“내가 이세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대놓고 싸울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 내 마음 알지? 난 딱히 널 싫어하지 않는다고.”
“…못 믿겠습니다.”
“하. 진짜라니까? 나 못 믿어?”
태현은 가슴을 치며 스미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이다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되게 조잡하게 꼬시는 기분인데….’
저거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나?
있었다.
“으음. 그러면 정말 이세연과 손잡을 생각은 없었다 이거죠?”
“물론이지. 내가 널 공격 안 하고 있잖아. 이게 얼마나 드문 경우인지 넌 잘 알 거야.”
“잘 알긴 합니다.”
스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이 이렇게 기회를 잡았는데도 PVP를 안 하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지!
솔직히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세연 도움을 꼭 받아야 합니까? 김태현 씨 능력이면 충분히….”
“내가 적이 좀 많아서 그렇지.”
“하긴 그렇습니다.”
바로 동의하는 스미스!
솔직히 태현이 유난히 적이 많은 편이었다. 최상위권 랭커들도 태현처럼 적을 우르르 달고 다니진 않았다.
“어쨌든 내가 그래서 이세연하고 싸울 수 없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세연보다 저와 손을 잡는 게 나았을 겁니다. 저도 나름대로 능력 있습니다.”
“진짜?”
“저도 랭커 아닙니까?”
“잘됐네. 안 그래도 도와달라고 하려고 그랬는데.”
“네?”
“내가 이세연한테 욕먹을 각오하고 널 이렇게 도와줬는데, 너도 날 도와주겠지?”
“아니, 그게 꼭 그렇게 굴러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세연은 도와주는데….”
“도와드리겠습니다.”
스미스는 바로 말했다.
이세연한테는 질 수 없다!
“그런데 뭘 도와드려야 하는 겁니까?”
스미스는 보스 몬스터 사냥이나 전설급 퀘스트 정도를 생각했다. 태현이 도움이 필요하면 그런 거 아닐까?
“음. 이제 오스턴 왕국으로 잠깐 돌아가서 박살 내고 불태우고 길드 동맹 애들을 괴롭히고 다닐 건데 네 도움이 필요해.”
“…저, 저 백기사입니다만….”
전설 직업 <고대 제국의 백기사>는 명성 스탯이 매우 중요한, 명예로운 직업이었다.
스미스의 악명 스탯은 랭커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낮은 수준!
태현이 보면 ‘너 어떻게 이렇게 살았냐!?’ 하고 놀랄 정도였다.
“하하. 걱정 마. 너한테 그런 걸 시키진 않고. 너는 정정당당한 싸움에서만 도와주면 돼.”
“정정당당한 거면….”
“내가 오스턴 왕국에서 고개 들고 돌아다니기만 해도 길드 동맹 쪽에서 몰려올걸?”
상대방이 먼저 공격하면 반격해도 악명이 오르지 않았다.
“그건 그렇긴 하겠지만….”
스미스는 망설였다.
스미스는 딱히 길드 동맹이나 중국 쪽 랭커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
하지만 여기서 태현의 편을 들면 명백히 적이 되는 것이다.
‘좋을 게 별로 없는데….’
스미스도 이세연처럼 소수 정예 파티를 추구하는 사람이라, 대형 길드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워낙 대단한 랭커다 보니 인맥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어서 들어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미스가 길드 동맹과 부딪히면 다른 사람들도 분명 참가하게 된다!
일을 키우고 싶지 않은 스미스는 부담이었다.
“그, 싸울 때 제가 잘 말해도 되겠습니까?”
“뭘?”
“저만 싸우는 거고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다고….”
“그건 상관없는데.”
‘그게 의미가 있나?’
길드 동맹 입장에서 스미스가 태현과 같이 싸우면서 ‘저 혼자 싸우는 겁니다! 제 친구들은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리 없었다.
‘아니 저 랭커 놈이 김태현한테 뭘 받아먹고 저러는 거야!’ 하면서 펄쩍펄쩍 날뛰겠지!
“그러면 같이 싸우는 거다?”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이제 빨리 도망쳐. 이세연 곧 들어올 테니까.”
태현은 손을 흔들며 스미스를 재촉했다. 그걸 본 이다비는 갑자기 전래동화가 생각났다.
‘사슴이었나… 제비였나… 이런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요….’
* * *
“놓쳤어? 이런… 어쩔 수 없지.”
이세연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곳에서는 도망치는 사람이 유리했다. 그리고 스미스는 평범한 플레이어도 아니었고….
그래서 스미스가 들어왔을 때부터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태현이 쫓는다고 해서 살짝 기대하긴 했지만.
“도망치면서 자꾸 손잡자고 하더라. 나 도와준다던데?”
“…지금 그 말 꺼내는 의도가 뭔데?”
“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지.”
이세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뭘 원하는데? 너도 저기 광산 전도했잖아.”
“다 박살 나긴 했지만… 뭐 어쨌든, 네가 가져간 게 좀 더 많잖아.”
이세연은 아스비안 제국을 안정시키고 황제에게 보상을 받는 입장.
태현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여기서 얻는 게 많았다.
“같이 싸우자.”
“누구하고?”
“누구겠어. 길드 동맹이지.”
“역시 길드 동맹인가….”
이세연은 신음하듯이 말끝을 흐렸다. 태현이 이상하게 잘해준다 싶었다.
원래라면 김현아만 있을 때 김현아부터 공격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아스비안 제국에서는 싸움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
‘태현 님. 파이팅이에요!’
이다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현이 이세연을 공격하지 않고 손을 잡으려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쟤가 추천했나?’
이세연은 이다비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파워 워리어 길마가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던데, 지금 모습을 보니 확실히….
‘어라? 왜 기분이 나쁘지?’
“왜 대답이 없어?”
“아. 미안. 생각 중이야.”
길드 동맹은 이세연도 생각하고 있는 적이긴 했다. 워낙 규모가 크고, 사방에 힘자랑하기 좋아하는 길드였으니까.
솔직히 태현이 아니었으면 그녀와도 싸웠을 것 같았다.
태현이 하도 이리 패고 저리 패면서 오스턴 왕국 안에 가둬놔서 그렇지….
따져보니 정말 집요할 정도로 길드 동맹을 두들겨 팬 태현이었다.
길드 동맹이 다른 랭커들과 시비가 못 붙을 정도로 정신없이!
“…좋아. 길드 동맹이 더 커지면 위험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 에랑스 왕국에 있는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길드 동맹 싫어하는 애들 꽤 있으니까, 잘 말해서 싸우게 해볼게.”
‘됐다!’
태현은 안도했다. 이세연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악수하자고.”
탁-
“언니! 언니!”
“?”
“길드 동맹이 블랙 드래곤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대요! 지금 오스턴 왕국에 블랙 드래곤 떠서 날뛰고 있어요!”
“…?!”
이세연은 깜짝 놀랐다.
저런 미친 짓은 김태현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길드 동맹도 하네?!
“대체 어떻게?!”
“지금 나오는 정보 보니까, 오스턴 왕국 북동쪽에 있는 학카리아스를 설득한 것 같아요.”
“드래곤을 설득한 거면 돈이 장난 아니게 들었을 텐데… 걔네도 진짜 어지간하긴….”
꽉-
태현은 마주 잡은 이세연의 손을 놓지 않고 힘을 주었다.
“…취소 안 할 테니까 놓지?”
“하하. 꼭 그래서 세게 잡은 게 아니라….”
이세연이나 스미스 입장에서는 꽤 억울하게 된 셈이었다.
블랙 드래곤까지 있는 줄은 몰랐으니까!
‘알고 한 거 아니야?’란 의심을 받긴 했지만, 태현도 이번에는 떳떳했다.
* * *
“블랙 드래곤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은 했어?”
“아니. 넌?”
“나도 아직.”
“…….”
“…….”
태현과 이세연은 조용해졌다.
블랙 드래곤은 솔직히 잡을 자신이 없다!
지금 플레이어 수준으로 잡을 수 있는 몬스터인지 의심스러웠다. 태현이 아무리 레벨 차이가 심한 몬스터를 많이 잡아 왔다고 해도 드래곤은 좀….
“뭐… 피하면서 싸우면 되니까.”
“그… 그렇지.”
자존심 때문에 못하겠다는 말은 못 하는 둘!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아. 나타나면 피하면 되고….”
“맞아. 드래곤 나타나면 피할 방법도 생각해놨어.”
“그, 그랬어? 우연이네. 나도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드래곤 상대할 방법이 살짝 떠오른 거 같기도 해.”
“앗. 너도? 나도 그랬는데….”
‘대체 뭔 대화를 하는 거야?’
다른 일행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그럼 일단 갈라져서 준비 마친 다음에 오스턴 왕국에서 보자. 그런데… 너 저렇게 데리고 갈 애들 많은데 괜찮아?”
“함선 끌고 와서 괜찮아. 다 태우고 가지 뭐.”
“?”
이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인도 태울 수 있나?’
아무리 양보해도 다른 부족들까지는 태운다 쳐도, 저 거인은 데리고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알아서 잘하겠지.’
이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저 움직였다.
우이포아틀한테 이번 퀘스트를 보고하고 보상을 받은 다음, 정리하고 오스턴 왕국으로 가야 했던 것이다.
“우리도 움직여야겠다. 데리고 갈 놈들이 많으니 빨리… 응?”
던전을 나와 해골 광산 근처로 돌아가려던 태현 일행 앞에, 용아병 하나가 유령마를 타고 달려왔다.
이 주변에서 용아병을 보낼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죽은 드래곤 알렉세오스!
-김태현 님. 안녕하십니까.
용아병은 유령마에서 내리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태현은 슬며시 불안해졌다.
‘무슨 일이지?’
알렉세오스한테 받고서 먹튀할 생각으로 가득했던 태현이었기에 찔릴 수밖에 없었다.
-세 해골의 광산에서 있었던 싸움이 저희 주인님 귀에도 들어왔습니다.
“그게… 음….”
정확히 뭘 들은 건지 묻고 싶었지만, 긁어 부스럼이 될까 봐 태현은 조심스러웠다.
-주인님께서 김태현 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최대한 빨리 와주십시오.
<알렉세오스의 부름-드래곤 리치 알렉세오스 퀘스트>
세 해골의 광산에서 있었던….
동시에 뜨는 퀘스트창!
태현은 일단 수락했다. 거절할 수는 없었으니까.
“뭐야? 저거? 위험한 거 아니지?”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고민하던 태현.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서 다른 언데드 기사가 달려왔다.
아스비안 제국 귀족 복장을 차려입은 귀족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