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745화
이세연은 머리가 아파져 오는 걸 느꼈다.
태현한테 ‘야. 제국 올 때는 잊혀진 망자의 왕관 갖고 오지 마’라고 말하려다가 말았었다.
다른 퀘스트로 바쁜 태현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왠지 모르게 태현한테 그런 말을 했다가는 역효과가 날 것 같았던 것이다.
이세연은 한숨을 푹푹 쉬며 다급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태현한테 사정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 황제는… 약간 미친놈이야.”
“흠. 그럴 수 있지.”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요즘 미친놈들을 너무 많이 봐서….”
하도 미친놈들을 많이 봐서 이제 안 미친 정상인 NPC를 만나면 놀랄 것 같았다.
“역사책을 이것저것 찾아보고 정보를 모았었는데, 살아 있을 때는 대단한 폭군이었대. 그래서 용들의 습격을 받았고….”
‘어라?’
태현은 당황했다.
이세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드라켄 비밀결사가 나름 괜찮은 놈들 아닌가?
‘난 미친놈들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서 제국이 멸망한 거고.”
“잠깐. 그런 놈을 부활시킨 네 잘못 아닌가?”
“다 계획이 있었거든? 황제가 완전하게 부활하려면 <잊혀진 망자의 지팡이>랑 <잊혀진 망자의 왕관> 둘 다 필요한데, 하나만 있으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황제는 폭군이라고 해도 주변에 난리를 치지 못하고.”
이세연의 계획은 간단했다.
일단 그녀와 그녀의 길드를 지원해 줄 아스비안 제국을 부활시킨다.
황제가 엄청난 폭군인 건 괜찮았다. <잊혀진 망자의 왕관>이 없는 한 황제는 힘을 쓰지 못했다.
황제가 왕관을 찾으려고 해도 김태현은 저 멀리 있었고, 호락호락 내줄 사람도 아니었으니….
황제는 헛되이 힘만 쓰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사이 이세연은 제국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와. 사악해.”
“너한테 들을 소리는 아니거든?!”
이제까지 태현이 했던 일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매우 얌전한 수준!
* * *
“…….”
“…….”
둘만 남은 케인과 스미스.
둘 사이에는 어색함이 맴돌았다.
케인은 속으로 절규했다.
‘김태현! 빨리 돌아와라!’
친하지도 않은 사람, 그것도 최상위권 랭커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헉! 스미스 님! 팬입니다! 여기 사인 좀… 케인에게 라고 적어주시면 됩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만큼 둘의 차이는 까마득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케인도 나름 탑클래스 플레이어.
품위를(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켜야 했다!
“케인 씨. 요즘 대회 잘 보고 있습니다.”
“앗. 진짜? …크흠. 진, 진짜요?”
“네. 판온 플레이어 중에 던전 대회를 안 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스미스는 싱긋 웃었다. 안 그래도 잘생겼는데 저렇게 싱그럽게 웃자 케인은 눈이 부셨다.
‘크아아악!’
“스… 스미스는 대회 안 나갑니까?”
“저는 던전 대회는 안 나가고, 투기장 리그는 준비하고 있습니다. 뉴욕 라이온즈 아십니까?”
“어… 알죠.”
케인은 머뭇거렸다. 에이전트가 와서 이름을 꺼냈던 구단 중 하나가 뉴욕 라이온즈 아니었나?
“던전 대회는 왜 안 나가셨…?”
“자신이 없었거든요. 아무래도 시간을 최대한으로 단축해야 하다 보니 거기에 특화되지 않으면 힘들죠.”
스미스뿐만이 아니라, 몇몇 최상위권 랭커들도 비슷한 이유로 포기했다.
순위권에 들 자신이 없다면 굳이 거기에 아까운 시간을 쓸 이유가 없었다.
최상위권 랭커들은 그거 말고도 할 게 많았으니까.
“그렇지만 투기장 리그에서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케인 씨.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뤄보죠!”
“그, 그러… 잠깐. 정정당당하게?”
“네? 네.”
“…그건 힘들 거 같은데….”
“!?”
그러는 사이 태현과 이세연이 돌아왔다.
둘은 나름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숨 막히는 공기에서 해방이야!
“무슨 이야기 했냐?”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 좀 짰지.”
이세연과 태현은 빠르게 합의했다.
-왕관 주면 우리 같이 망하는 거야.
-네가 더 크게 망하겠지.
-…나 망하면 나도 네 영지 가서 언데드 뿌릴 거야.
-하하. 농담이야. 농담. 내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널 방해하겠니? 우리는 판온 1때부터 같이 한 친구였고 같은 매니지먼트 소속이잖아?
-네가 판온 1 이야기 하면 빡치니까 하지 마….
태현이 제안을 무시하고 접은 것 때문에, 길드원들은 한동안 이세연을 놀렸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태현의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든 왕관은 주면 안 됐다. 왕관을 주는 순간 황제가 무슨 미친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대신 내가 필요한 건 네가 도와주는 거다.
-알겠어. 도와주면 되잖아.
-아. 그리고 드라켄 비밀결사라고 알아?
-거기를 네가 어떻게 알아? 아. 오면서 퀘스트라도 받은 건가? 조언 하나 해주자면, 그거 찾는 퀘스트는 받지 마. 우리 길드원 중에서 드라켄 비밀결사 관련 퀘스트 받은 애들이 몇몇 있는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드라켄 비밀결사 퀘스트는 보상이 좋아서 다들 도전해 봤지만, 워낙 철저하게 숨은 놈들이라 찾을 수가 없었다.
-…….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왕관은 숨길 테니 걱정하지 마.
-너… 진짜 약속 지키기다? 황제가 어떤 감언이설을 해도 넘어가면 안 된다?
-자꾸 그러니까 마음이 흔들리잖아.
-야!
* * *
[아스비안 제국의 황제, 우이포아틀을 만났습니다!]
[무지막지한 폭군, 우이포아틀을 만나는 것으로 공포 상태에 빠집니다.]
[공포 상태에 면역입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검술 스킬이…]
[마법 스킬이…]
[……]
화강암으로 만든 방에, 우이포아틀이 옥좌 위에 앉아 있었다.
해골로 된 NPC가 온갖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습은 기괴했다.
‘이야. 저거 하나 잡으면 인생 역전이겠군.’
들고 있는 지팡이부터 시작해서 팔찌, 귀걸이, 허리춤에 찬 벨트와 검… 다 유니크한 아이템이었다.
하나하나가 경매장에 나올 경우 경매장을 뒤흔들 장비!
‘레벨이 몇이야? 600은 당연히 넘겼을 테고, 700 넘기나? 이세연이 걱정할 만하군.’
저런 놈을 완전히 부활시켰다가는 정말 저 황제부터 레이드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장비를 보니 마법도 잘 쓰고 검술도 잘 쓰는 것 같았다.
괜히 용들이 쳐들어온 수준이 아닌 것이다.
태현은 일단 엎드렸다. 이런 보스 몬스터와는 친하게 지내야지!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험가… 그대에게서는 왕의 기운이 느껴진다. 왕이 왜 짐 앞에 무릎을 꿇는가?”
“제 왕국이야 폐하의 제국에 비하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 모래 위의 바늘 아니겠습니까?”
태현은 1초도 기다리지 않고 아부를 찔러 넣었다.
숙련된 격투가가 생각하지 않고 몸이 반응하듯이, 태현의 경지 또한 그러했다.
[황제 우이포아틀이 당신의 말에 만족합니다!]
[친밀도가 아주 조금 오릅니다.]
‘…쪼잔한 놈 같으니.’
이세연이 성격 더럽다고 욕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짐이 그대를 부른 이유를 알겠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십시오!”
“짐에게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용들의 몰살….”
-!
-!
두 용이 안에서 움찔했다.
“…제국의 힘을 회복시키는 것, 그리고 짐의 완전한 부활이다. 짐을 보아라. 어떠한가?”
“참으로 아름다운 뼈다귀입니다.”
[카르바노그가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최고급 화술의 스킬은 어디 가질 않았다. 우이포아틀은 호탕하게 웃었다. 뼈가 부딪히며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 짐의 위엄은 이런 몸이 되었어도 어딜 가지 않지. 하지만 짐은 이런 몸을 원하지 않는다. 짐이 영생을 요구하자 제국의 마법사들이 이렇게 말하더군. 의식을 치르고 잠들어 있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이 꼴을 보라! 이 불완전한 몸을! 어떤 진미를 먹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예술품을 봐도 감흥이 일지 않는 저주받은 몸이다! 마법사 놈들이 날 속인 것이지.”
‘성격이 지랄 맞아서 거짓말한 것 같은데….’
“모험가! 짐의 왕관을 내놓아라. 내 힘이 담긴 왕관… 그 왕관이 있으면 짐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다. 힘을 회복하고 용의 목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겠도다!”
“폐하, 저는 왕관이 없습니다.”
“뭐라? 거짓말하지 마라! 짐의 마법사들이 그대를 가리켰다! 왕관의 기운이 그대에게서 느껴졌단 말이다!”
“폐하, 제 눈을 보십시오. 이게 거짓말을 하는 눈입니까?”
“…으음….”
“이렇게 말하는 게 조금 부끄럽지만, 저는 나름 대륙에서는 영웅으로 불립니다. 대륙의 저주도 해결했고, 악마도 사냥했으며, 파이토스의 전사이기도 하며….”
아키서스는 일부러 뺐다. 혹시 몰라서.
‘아키서스가 여기서도 사기 치고 다니진 않았겠지?’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런데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할 수도 있지 않나?”
[칭호: 저주의 종결자를…]
[칭호: 악마 사냥꾼…]
[……]
대형 퀘스트를 깨거나 업적을 깨고서 얻은 칭호는 단순히 보너스 효과만 주는 게 아니었다.
NPC들과 대화할 때 말에 보너스를 주는 것이다.
[황제 우이포아틀이 당신의 말에 흔들립니다.]
[의심이 많고 난폭한 그는 쉽게 설득되지 않습니다.]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이야. 대단한데?’
태현은 감탄했다.
이제까지 이렇게 화술 스킬이 안 통하는 상대는 없었던 것이다.
보기 드문 깐깐하고 레벨 높은 상대!
실제로 완전히 성공한 게 아니었는데도 화술 스킬도 크게 올랐다.
얼마나 만만치 않은 상대인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대에게서 왕관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 어떻게 설명할 생각이지? 설마 짐의 마법사들이 실수했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제가 왕관의 조각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태현은 그렇게 말하며 <잊혀진 망자의 왕관 조각>을 꺼냈다.
여기 오기 전에 만든 아이템이었다.
* * *
-그런데 황제를 어떻게 속일 생각이야?
-준비를 해야겠지. 이 왕관을… 왕관을… 왕관을….
-…부술 거면 빨리 부숴. 황제가 기다리잖아.
-크으윽….
태현은 망치를 들고 괴로워했다. 이런 유니크한 아이템을 그의 손으로 부숴야 한다니!
<고대의 망치>가 없었다면 부수기도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고대의 망치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나중에… 수리할 수 있겠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빨리 부숴!
-후. 간다!
꽝!
* * *
이세연이 경고를 해준 덕분에, 태현은 황제를 속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상태였다.
자기 살을 깎아가면서까지!
황제가 부서진 왕관의 조각을 보고 분노했다.
“감히! 짐의 왕관을 누가 부서뜨렸단 말이냐!”
“폐하! 오스턴 왕국을 아십니까?”
“오스턴… 오스턴 왕국… 그런 왕국은 처음 들어보는데. 중앙 대륙의 왕국인가?”
“예!”
우이포아틀은 고대의 사람이었다. 오스턴 왕국이나 에랑스 왕국이 만들어지기도 전의 NPC!
“폐하의 충신인 모험가 이세연처럼, 저도 폐하를 부활시키기 위해 왕관을 찾아 헤맸습니다. 크흑. 그런데… 그 무도한 놈들이 폐하의 왕관을 뺏어갔습니다.”
“이런 영원한 불꽃으로 태워죽일 놈들 같으니!”
“맞는 말씀이십니다!”
“가서 찾아와라, 모험가! 놈들의 손에서 내 왕관을 찾아오란 말이다!”
<잊혀진 망자의 왕관을 찾아와라-전설 등급 퀘스트>
폭군 우이포아틀은 자신의 보물에 손을 댄 사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왕관을 부순 자가 누구든 간에 우이포아틀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륙의 끝까지 쫓아가 그를 영원의 불꽃으로 태울 것입니다!
잊혀진 망자의 왕관을 찾아오고, 그 왕관을 부순 범인을 찾아 잡아오십시오!
보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