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740화
빈센트는 못 들은 척했다.
저 정도 수군거림은 에이전트 세계에서는 1단계에도 들어가지 않는 굴욕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에이전트 세계에서 살아남아 올라온 빈센트에게 저런 건 자장가 수준!
“헉. 표정 하나 안 변하네.”
“우리 말 못 알아듣는 거 아닐까요?”
“번역 다 되잖아.”
케인과 정수혁은 놀랐다. 그들이라면 이런 수군거림을 들었을 경우 마음이 흔들리고 눈물이 찔끔 나왔을 텐데!
‘정말 대단하잖아?’
‘로봇 아닙니까?’
둘의 존경하는 시선을 받으며 빈센트는 명함을 내밀었다.
멋들어진 글씨체로, 빈센트의 회사 이름과 에이전트라는 직함이 쓰여 있었다.
태현은 그걸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앗!”
“후후… 역시 김태현 씨. 김태현 씨 정도 되는 초일류 선수라면 제 이름을 알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빈센….”
“아니. 판온에서도 이런 명함을 만드는구나 싶어 놀란 건데. 어쨌든 잘 부탁합니다. 빈센트 씨.”
“…….”
딱히 빈센트의 명성을 듣고 놀란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빈센트는 미련을 놓지 못하고 말했다.
“제 이름 들어본 적 없으십니까? 제 회사라든가….”
“빈센트… 아!”
“후후, 역….”
“빈센트 반 고흐?”
“…그 사람은 옛날 사람이고요.”
심지어 죽은 사람!
“그럼 모르는데.”
“그…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는 빈센트라고 합니다.”
“그래요. 여기는 왜?”
“김태현 씨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무슨 진지한 이야기?”
태현은 의아해했다.
게임단을 만들기 전까지는 태현에게는 온갖 곳에서 연락이 왔다.
각 게임단 스카우트부터 시작해서 사장이 직접 연락한 곳도 있었으니 에이전트는 별로 놀랄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들기 전!
만들고 나자 영입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지 대부분의 연락이 사라진 상태였다.
“진지한 이야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김태현 씨의 영입에 관한 이야기죠.”
“여기까지 와서 기껏 만든 명함까지 줬는데 좀 미안하게 됐군. 생각 없어.”
“아니, 이야기만 한 번 들어보세요!”
옆에서 듣던 케인이 끼어들었다.
“아니. 아저씨. 지금 김태현은 게임단 직접 차려서 운영 중인데 영입하려고 한다니. 그게 무슨 상도덕 없는 소립니까? 우리는 다 잘리라고?”
‘다른 게임단 가도 되지 않나? 케인 씨 정도면….’
정수혁은 속으로 의아해했지만 굳이 끼어들진 않았다.
“김태현 씨만 영입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 같은 에이전트가 그런 턱도 없는 제안을 들고 왔겠습니까?”
“……?”
“지금 몇몇 게임단에서는 김태현 씨의 게임단을 통째로 인수할 의사가 있습니다.”
“……!!”
다들 깜짝 놀랐다.
선수 한둘 영입은 몰라도 게임단 통째로 인수하려고 하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사고방식이 차원이 다르네.’
이다비는 솔직히 많이 놀랐다.
크게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은 다 이런 건가? 저런 과감한 제안을 팍팍 해오다니.
물론 케인은 수긍하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잘리기 싫다고! 김태현. 저런 제안은 안 받을 거지?”
“안 자릅니다. 케인 씨. 생각해 보시죠. 케인 씨 같은 선수를 누가 탐내지 않겠습니까?”
“어?”
케인은 의아해했다. 진짜?
“케인 씨가 겸손한 건 알지만 자기 가치를 잘 아는 건 중요하지요.”
“…이 사람 나 놀리는 거 아니냐?”
케인은 의심부터 하고 봤다.
태현과 같이 다니면서 생긴 의심병!
누가 칭찬을 하거나 팬이라고 하면 ‘이거 함정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먼저 들게 된 것이다.
“놀리는 건 아니겠지.”
“진, 진짜? 내가 그 정도야?”
기뻐하던 케인은 멈칫했다. 저런 말 몇 마디에 넘어가면 안 됐다.
“크… 크흠. 그래도 안 돼. 나 말고 다른 팀원들도….”
“그것도 물론 이야기했습니다. 김태현 씨가 책임감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게임단을 인수할 경우 다른 선수분들도 다 영입할 겁니다.”
“그, 그랬다가 자를 생각이잖아!”
“안 자릅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에이전트를 맡아 계약서를 써드리겠습니다. 보장 연도도 길게 잡아서 은퇴 전까지 연봉 보장받고 옵션 넣는 것도 가능합니다.”
모든 문제에 다 준비된 에이전트, 빈센트! 자리에 있던 일행은 왜 빈센트가 자기를 초일류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철저하긴 철저하다!
“흐… 흥! 그, 그래도 우리는 우리끼리 해오면서 쌓아온 자부심이 있어. 그깟 돈 몇 푼에 그걸 포기하진 않을 거야.”
케인은 그렇게 말했다.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는 자부심과 뿌듯함!
그런 걸 돈 조금 더 받자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억을 준다고 해도 안….”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케인은 말하면서 자신의 금전 감각이 커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예전에는 벌벌 떨었을 금액인데….
‘와, 내가 이렇게 대단해졌나?’
대회 상금+각종 광고, 스폰서 지원+기타 등등….
태현은 이상적인 걸 뛰어넘어서 호구에 가까운 게임단 단장이었다.
게임단의 운영 금액은 자비로 대면서 나머지 수입은 정확하게 나눠서 지급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 말에 빈센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일억으로 안 될 줄이야….”
“……?”
이다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제안을 하러 온 사람들이 게임단 인수를 하는데 기껏 일억을 제시한다고?
뭔가 이상한데?
“잠깐만요. 일억이 혹시… 아니, 설마 혹시… 달러인가요?”
“당연히 달러죠. 그러면 뭔지 아셨나요?”
“…….”
“…….”
“…….”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케인이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일, 일, 일….”
케인은 말을 더듬었다. 천억이 넘는 금액!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금이라 판단 자체가 불가능했다.
태현은 눈썹을 찌푸렸다. 상대가 저런 충격적인 제안을 해오니 오히려 냉정해졌다.
‘정말 세게 나오는군. 이게 그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인가?’
자잘한 회사들이 쪼잔하게 꼼수를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내가 바로 명문구단이다!’라는 걸 알려주듯이 화끈하게 제안을 때려왔다.
천억은 장난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이름이 날리고 역사가 있는 구단이 되어야 그 정도 수준에 들어갔다.
E스포츠계의 역사에서도 그런 팀은 얼마 되지 않았다.
‘솔직히 우리 게임단은 잘 쳐줘 봤자 십억 안팎인데.’
시설도 인프라도 직원도 거의 없이 태현이 단독으로 이끌고 나가는 게임단.
그런 게임단에 저런 가치가 있을 리 없었다.
즉 저 액수는….
‘저 금액으로 날 사겠다는 제안인가… 케인이나 정수혁도 꽤 괜찮은 선수니까….’
게임단이 아닌 태현을 사기 위한 액수!
-김태현만 손에 넣는다면 나머지는 손해 좀 봐도 상관없다. 감수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상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태현은 물었다.
“만약 받아들이면 장기계약인가?”
“예. 김태현 씨. 그것까지 양보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연봉 협상은 따로 있을 겁니다. 만약 원하시면 계약 시에 추가 성적에 따른 추가 옵션 미리 넣을 수 있습니다. 김태현 씨라면 구단 쪽에서 엄청나게 양보할 겁니다. 이건 제가 장담합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저 돈을 주고 구단을 사서 태현과 팀원들을 데려왔는데 태현이 나가 버리기라도 한다면….
담당자들은 전원 다 뛰어내려야 했다.
저건 구단이 지켜야 하는 마지막 선!
‘게임단 인수금은 종신 계약하는 계약금이라고 보면 되겠고, 연봉은 따로 주겠지만 의미가 있나 싶긴 하네.’
저런 계약금을 제시하는데 연봉을 후려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태현이 죽을 쑤면 연봉이 내려갈 수는 있겠지만, 저 계약금을 받았는데 연봉 좀 내려간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건 게임단의 통 큰 베팅이었다.
판온 E스포츠 초기에, 천억 넘는 금액을 베팅해서 김태현이라는 선수를 잡겠다는 베팅!
-그 돈을 투자해서 김태현을 은퇴 때까지 게임단에 쓸 수 있다면 해볼 만하다!
게임단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냉정하던 태현도 저 과감한 판단에는 살짝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저… 저건 사야 해! 아니, 받아들여야 해!”
케인은 태현에게 다가와 다급하게 속삭였다.
“저 제안은 받아야지! 저런 제안이 언제 들어오겠어!”
“김태현 씨. 천억은 참고로 시작이고 협상에 따라 더 올릴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이번 대회까지는 계약이 불가능할 텐데, 저는 대회 성적에 따라 더 올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더 올라간대잖아! 저건 꼭 해야 해!”
케인의 눈동자가 화르륵 타올랐다. 태현은 귀찮아서 케인의 얼굴을 옆으로 밀었다.
빈센트는 감탄했다.
“확실히 여러분들은 정말 단결력이 대단하네요. 다른 게임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뭘 그런 걸 다….”
“케인 씨한테는 한 푼 안 들어오는 계약인데도 그렇게 김태현 씨를 위해주시다니. 아무리 보장을 해주더라도 소속된 게임단을 바꾸고 새로 시작하는 건 모험인데… 정말 대단한 우정입니다.”
“……?”
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물었다.
“어… 저한테는 뭐 안 들어와요?”
“게임단 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어… 없는데요.”
“그러면 당연히 없죠?”
빈센트는 ‘뭔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지 이 사람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김태현. 난 네 선택을 존중한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
“에잉. 좋다 말았네.”
케인은 정수혁과 다시 구석으로 가버렸다. 빈센트는 당황해서 물었다.
“왜 저런 질문을?”
“저건 내버려 둬도 되고… 어쨌든 제안은 잘 들었고 생각 좀 해보도록 하지.”
“예! 기다리겠습니다.”
빈센트는 반색했다. 매몰차게 거절당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생각 좀 해보겠다’라는 대답을 들은 것 자체가 성과였다.
“저, 폐하. 안 내리십니까?”
“아.”
떠드는 사이 어느새 배는 항구에 도착해 있었다.
* * *
[아스비안 제국에 도착합니다!]
[처음으로 도착한 것에 명성이….]
[…….]
[아스비안 제국은 용을 싫어합니다. 용과 친분이 있는 게 밝혀질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아스비안 제국의 황제, 우이포아틀은 멸망한 제국을 복구시키기 위해 뛰어난 모험가들을 찾고 있습니다. 공적치 포인트를 쌓아 명성을 올리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
[…….]
처음 보는 제국에 왔다는 걸 환영해주듯이, 막대한 보너스 메시지창이 떴다.
“태현 님! 감사합니다!”
“김태현 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배에서 내린 플레이어들이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각자 흩어져서 자기 갈 일을 갔다.
“김태현! 두고 보자!”
“김태현 너 이 자식!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니다!”
“야. 그만해. 그러다 진짜 들으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와서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닥치자!”
배 밑에서 노를 실컷 저었던 길드 동맹 길드원들도 호다닥 사라졌다.
그들을 보며 브랑송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저놈들은 타고난 노잡이입니다. 폐하. 다시 잡아 와서….”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걱정 마라, 브랑송. 다시 또 잡아 올 기회가 있을 거야.”
가장 뒤늦게 내리던 태현 일행 앞에, 플레이어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미스터 김?”
“……?”
태현은 의아해했다. 누구지?
“미스터 김. 유의 출입은 불가능이에요.”
“뭐라는 거야?”
번역기를 끄고 말하는 것 같은 특이한 말투!
태현은 상대 견적부터 먼저 내고 봤다. 차고 있는 장비부터 자세까지.
‘랭커군.’
“고 백. 고 백하라고요.”
“흠. 잘 모르겠지만 시비 거는 거 맞지?”
태현은 뒤를 보며 물었다. 물론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맞군.”
착!
바로 무기부터 뽑는 태현! 그걸 본 상대는 기겁해서 말했다.
“폭력 반대! 폭력 반대!”
“특이한 암살자군.”
뒤에서 케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암살자 같진 않은데?”
“아임 어새신 아님!”
“자기가 암살자라는 걸 인정 안 하는 걸 보니 훈련된 암살자군.”
그러는 사이, 길 저편에서 이세연의 길드원 중 하나인 김현아가 나타났다.
“나디아. 뭐하는… 꺄악! 김태현이잖아! 왜 여기 있어!”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