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720화
‘저놈 또 사악한 생각을 하는군.’
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태현이 저렇게 눈을 감을 때마다 온갖 사악한 아이디어가 튀어나왔다.
이번엔 또 누가 당할 것인가!
“말… 말… 도 안 돼…! 이건 속임수야!”
“?”
뒤늦게 충격을 받은 오크 주술사 고르수크가 털썩 주저앉았다.
“저건 시이바 님의 성물인데! 시이바 님의 성물이란 말이다!”
“자꾸 시이바, 시이바 하니까 좀 어감이 그렇다.”
“쉿. 조용히 합시다.”
태현은 고르수크에게 다가가 상냥하게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원하는 것도 다 얻었겠다, 한껏 관대해진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살다 보면 착각도 하고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
“크흑… 인간….”
“그럼 난 이만. 잘 지내라. 시바의 성물도 잘 찾아보면 좋겠네.”
“시이바에요. 시이바.”
태현은 쿨하게 떠나려고 했다. 그 순간 고르수크가 어깨를 붙잡았다.
“도와다오!”
“응?”
태현은 멈칫했다.
“그래. 빨리 떠나는 게 도와주는 거지. 알아.”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슥슥-
빠르게 고르수크의 팔을 쳐내는 태현!
“내가 야박한 사람은 아닌데, 할 일이 좀 많아서 말이야. 다음 퀘스트가 쌓여 있다고. 다음에 만나면 그때 생각해 보자.”
거절의 프로!
얼마나 많은 거절을 했는지 관록이 느껴지는 거절이었다.
케인은 새삼스레 감탄했다. 거절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
-알겠냐? 케인? 거절은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 같은 말투로 해야 해.
태현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오크 놈들은 오크의 신 모고크만 믿는다! 나처럼 시이바를 믿는 오크는 발 디딜 곳이 없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하셔야죠. 나는 무슨 교단이 있었는 줄 아냐? 난 내가 다 모으고 권능 찾아서 교단 새로 만들었어! 있는 놈들은 다 나사 하나씩 빠진 놈들이었다고!”
말하다 보니 자기도 울컥해지는 태현이었다. 뭐 이런 교단이 있냐?
“그, 그런….”
“알겠냐? 교단이란 게 다 원래 이런 법이야! 마이너한 신을 믿으면 개고생이라고!”
[고르수크가 당신의 말에 커다란 감동을 받습니다.]
“아니, 감동을 받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따라가서 배우고 싶다! 나를 받아다오!”
<떠돌이 교단 받아주기-시이바 교단 퀘스트>
오크 주술사, 고르수크는 오크 중에서 슬라임의 신 시이바를 믿는 이단아다.
언제나 부족 내에서 천대받고 핍박받은 그는 성공적으로 교단을 부활시킨 당신을 보고 존경해 따라가려고 한다.
오크 주술사 고르수크를 받아들이고 영지에 시이바의 교단을 받아 주십시오.
보상: ?, ???
“거절한다!”
[시이바 교단과의 친밀도가 하락합니다.]
[시이바 교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친밀도가 하락하지 않습니다.]
[카르바노그가 안쓰러워합니다.]
“어째서?!”
“뭘 어째서야 임마. 아키서스 교단을 이끄는 사람한테 새 교단을 받아달라고 하다니. 그게 말이….”
말하던 태현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사디크 교단도 받아 주고 카르바노그도 받아 주고….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
“어쨌든 시이바 교단을 받아서 내게 좋을 게 없다고. 그냥 지금이라도 모고크로 개종하는 게 어때? 그러면 내가 받아 줄 수 있다.”
메이저한 오크들의 신, 모고크를 탐내는 태현!
모고크는 좋았다. 수많은 오크가 믿고 있기도 했고, 오크들 특성상 정식 교단은 없었지만 그만큼 효과도 괜찮았다.
오크와 투쟁의 신인만큼 효과는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르크 지역에서는 오크들이 지금 흘러넘치고 있으니 나중에 받을 수도 있고 말이야.’
영지민 숫자가 바로 국력!
그런 면에서 슬라임의 신 시이바는 확 와닿지 않는 신이었다.
슬라임의 신이 있어서 뭐가 좋지? 영지에 슬라임이 늘어나나?
차라리 카르바노그는 영지의 토끼 피해가 줄고 토끼 고기가 맛있어진다는 효과라도 있지….
“어, 어떻게 신앙을 버릴 수 있나!”
“왜? 잘 버리던데. 최근에 내가 아는 천사 중 한 명이 신앙을 버렸지.”
“거짓말하지 마라!”
“이놈은 지 마음에 안 들면 다 거짓말이래. 됐어. 나 간다.”
“잠… 잠깐! 오크의 보물을 주마!”
“!”
태현은 멈칫했다.
“무슨 보물인지 아주 자세하게 말해보도록. 어떤 성능이고 어떻게 생겼고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
고르수크는 순간 고민했다. 이 인간 놈을 믿어도 되는 걸까?
* * *
“브래들리. 그러고 보니 그리핀 알은 잘 있나?”
“물… 물론입니돠. 아주 잘 진행되고 있습니돠. 이제 무럭무럭 익어서 부화하기만 기다리면 됩니돠!”
“위에서 그리핀 기사단을 꼭 만들고 싶어 하셔. 잘해야 해.”
“물, 물론입니돠!”
길드원의 말에 브래들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보다 지위가 높은 길드원은 상사나 마찬가지였다.
‘으아아… 어쩌지?’
즉위식 이벤트가 끝나고(도중에 사고가 있었지만), 즐겁게 구경을 한 브래들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핀의 알들이 모두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고! 대체 어떤 놈들이 그 소란을 틈타서… 어떤 간 큰 놈들이!
이 주변은 경비병부터 시작해서 어중간한 도둑은 다 쫓겨날 정도로 보안이 강한 곳이었다.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나서 경비병들이 모두 몰려가지 않았다면 여기 들어올 수는 없었을 터!
그리고 브래들리는 이 마굿간의 책임자였다.
<에랑스 왕국 몬스터 테이머>란 영웅 직업 덕분에 쾌속승진한 브래들리!
이 고오급 마굿간까지 받고 ‘난 이제 완전히 출세했다!’라고 기뻐했었는데….
‘난 망했다… 난 망했다고!’
이제까지는 어떻게 말로 넘겼지만 위태위태했다. 한 번만 직접 보러 오면 들통나는 것이다.
-여기 왜 그리핀은 없고 달걀밖에 없냐? 브래들리! 미쳤냐!!
브래들리는 고민하다가 아는 길드 친구한테 귓속말을 보냈다.
-오우! 장샨! 여기 너무 힘들어!
-??
-흑흑. 중국인들은 너무 짜증 나!
-나도 중국인인데…?
-장샨은 착한 중국인! 내 윗대가리는 나쁜 중국인!
-그래. 그래. 뭔 소린지 알겠다.
수비대장으로 일하던 장샨은 연락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 나도 안다!
능력 없는 상사 밑에서 일하다가 태현 측 스파이로 탈출한 장샨.
덕분에 이제는 마음이 편했지만….
‘녀석. 마음고생이 심한가 보군. 요즘 출세 좀 했다고 해서 잘 된 줄 알았는데….’
장샨은 브래들리가 안쓰러웠다. 그래도 나름 같이 들어온 길드 동기였다.
-난 이제 망했어!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게 있잖아… 흑흑!
브래들리는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았다. 갑자기 그리핀 알이 사라졌다는 상황!
그걸 듣고 장샨은 경악했다.
-야. 그건 어떻게 수습이 안 된다. 말하면….
-잘리나? 잘리겠지??
-잘리는 건 물론이고 배상해내라고 할 것 같은데. 길드 동맹이잖아.
-노우! 안 돼!
브래들리는 절규하더니 물었다.
-장샨! 장샨은 똑똑하잖아! 방법이 없을까?
요즘 길드 동맹 내에서 장샨은 ‘본받아야 할 신입 길드원’, ‘신입 길드원이라면 장샨처럼’ 같은 예시로 쓰이는 길드원이었다.
수많은 첩자와 암살자들이 태현 앞에서 박살 났지만, 장샨은 보란 듯이 수도에 잠입해서 심지어 자리까지 얻지 않았는가.
-넌 왜 장샨처럼 하지 못하니?
-장샨은 김태현 놈 앞에도 잠입했다. 넌 고작 이게 무섭냐! 장샨 반쯤 닮아라!
이런 말들이 돌아다닐 정도!
물론 장샨 본인은 이런 말이 돌아다니는 걸 몰랐다.
-내가 똑똑하기는 무슨… 음. 그냥 네가 네 돈으로 그리핀 알 사서 메꾸면 안 되냐?
-그리핀 알이 얼마나 비싼데! 그리고 희귀해서 경매장에 없어!
‘이미 찾아봤구나….’
당황해서 발음까지 뭉개지는 브래들리를 보며 장샨은 더욱더 측은해졌다.
길드 동맹 놈들. 실수는 좀 봐줘야지, 그게 뭐라고 이렇게 애를 잡아대냐!
-음… 크게 기대하지 말고. 내가 아는 곳에 한 번 물어나 볼게.
-뭐!? 정말?! 장샨밖에 없어!
* * *
“일이 이렇게 됐는데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혹시 그리핀의 알을 구할 방법이 없을까요?”
‘그걸 왜 나한테….’
이다비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장샨을 쳐다보았다.
눈치를 보니 알고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왜 저한테 물으시죠?”
“그야 이다비 님은 그 파워 워리어 길드의 길마잖습니까? 세상에 모르는 게 없고 못 구하는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다는….”
“?!”
길마인 이다비도 처음 듣는 거창한 수식어!
‘모르는 거 많고 못 구하는 거 많고 못 하는 것도 더럽게 많은데?!’
언제 이렇게 이상한 소문이 퍼진 거야!?
이다비는 당황했지만 표정을 유지했다.
“그, 얘는 나름 친한 친구여서 도와주고 싶습니다. 제가 모아놓은 골드도 좀 낼 테니까…. 어떻게 구해주실 수 없으십니까?”
“으음. 그래요… 알겠어요. 몇 개 정도 구해볼게요.”
“!”
장샨은 깜짝 놀랐다.
정말 구해준다니!
‘역시 파워 워리어의 길마야! 대단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알 몇 개 정도만 있으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부화 도중에 실패했다고 하면 되니까.
그만큼 그리핀의 알은 섬세했다.
장샨이 물러서자 이다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리핀의 알 몇 개만 갖고 와주겠어?”
“네! 길마님!”
“그런데 우리 길드 소문이 왜 저렇게 났지?”
“네? 강해 보이고 좋지 않나요?”
“…….”
이다비는 범인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그래서 주기로 했는데, 괜찮나요?
-상관없지. 근데 왜?
-이거 받으면 그 사람도 첩자나 마찬가지니까요!
이렇게 싹을 심어두면 언젠가는 쓸 곳이 온다!
태현한테 많이 배운 이다비였다.
-역시 이다비야! 파워 워리어 길마답게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는 데에 능숙하군!
-헤헤헤…. 그렇게까지 칭찬해주실 필요는 없는데요…. 그나저나 방송사 사람들하고 같이 가셨다고 들었는데, 일은 잘되어가고 있나요?
이다비는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현과 방송 쪽 사람들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한쪽은 하드코어 게이머, 한쪽은 태현한테 업혀 갈 생각으로 가볍게 온 사람들!
‘설마 화나서 다 PK해 버린 건 아니겠지?’
-응. 잘 되어가고 있어!
“??”
-진, 진짜요?
-어. 나도 몰랐는데, 난 의외로 팬들하고 이런 걸 하는 게 적성에 맞았는지도 모르겠어.
-…????
이다비는 순간 태현이 누군가한테 협박받고 있나 생각했다.
‘아니. 그럴 사람이 아니지!’
이다비는 케인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김태현이… 사람들을… 그러니까…. 다들 미쳐서….
-???
-광기의 시간이었어…. 앗. 김태현이 부른다. 우리 다음 퀘스트 하러 가야 해. 오크 애들 보물 뺏으러 가야 하거든.
케인의 귓속말이 끝나고 태현이 다시 말했다.
-이다비. 일 마무리되면 에스파 왕국 쪽으로 와줘.
-앗. 네. 그런데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난 새로운 시장을 발견한 걸지도 몰라!
-?!
* * *
“흠. 오크 놈들이 그런 걸 갖고 있다?”
“그렇다….”
“뭐 더 다른 건 없나? 보석, 광석, 아티팩트, 기타 등등 다 받는다.”
“…….”
고르수크는 짜게 식은 눈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인간을 고른 건 실수 같았다.
“부족장의 창고에는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옷.”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부족장의 지팡이! 그 지팡이가 시이바 님의 성물이란 말이다!”
태현은 그 말을 듣고 감탄하기보다는 의심하는 눈빛을 보냈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그거 정말 시이바의 성물 맞냐?”
“이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