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692화
“악마의 피를 마시게 하는 건 어떨까요?”
“그런 아이디어가…!”
태현은 이다비의 아이디어에 감탄했다. 저런 참신한 아이디어라니!
어중간한 거짓말을 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과가 좋고,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겠는가.
게다가 악마의 피는 구하기도 쉬웠다.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리 태현은 주변에서 얼마든지 악마의 피를 뜯어낼 수 있었다.
[카르바노그가 무시무시한 생각에 몸서리칩니다.]
[카르바노그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타락하다 못해 그냥 악마가 될 거라고 경고합니다!]
‘아. 그래?’
태현은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그냥 타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악마가 된다니.
‘응? 근데 악마가 되어도 상관없지 않나? 스킬만 멀쩡하면….’
[카르바노그가 어이없어합니다. 요하스가 악마가 되면 누굴 먼저 죽이겠냐고 묻습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다.’
태현이 생각해도 요하스가 악마가 되면 가장 먼저 태현을 공격할 것 같았다.
이제까지 쌓인 원한이 모두 폭발!
그렇다면 결국 순수한 말과 속임수로 요하스를 함정에 빠뜨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됐다.
그 과정에서 태현이 했다는 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건 물론이고!
“그런데 태현 님.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나요?”
“뭘? 속임수? 함정?”
“…아, 아니요. 대회요.”
“!”
던전 공략 대회.
예선을 돌파한 팀들이 1:1로 맞붙는 본선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 * *
“오늘 이렇게 모이게 된 건….”
태현 일행은 판온 안이 아니라 현실의 숙소에서 모여 있었다.
굳이 판온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렇게 모이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최상윤이 에반젤린과 함께 살라비안 교단을 추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에 있을 본선 대회 때문이야.”
“아. 그거.”
“헉. 잊고 있었는데.”
“괜찮습니다! 연습했던 대로만 하면 됩니다.”
정수혁은 케인을 격려했다.
“평소에 연습하신 것만 하시면 어떤 속성의 던전이 나오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우승할 수 있습니다.”
“맞아. 수혁이가 맞는 말 했네. 평소 연습하던 것만 똑바로 하면 되지.”
최상윤도 동의했다.
“게다가 첫 번째 팀은 꼴찌에서 두 번째로 통과한 팀이잖아? 압도적으로 차이 난다고.”
1등 유성 게임단, 2등 팀 KL.
그 밑의 등수들은 사실 격차가 심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팀을 우승팀으로 뽑았다.
-유성 게임단 vs 팀 KL! 판온 1에서부터 이어진 싸움!
-탄탄한 구성의 유성 게임단, 변칙 플레이의 달인인 팀 KL!
-유성 게임단은 어떻게 강팀이 되었나?
최상윤이 걱정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케인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너… 너희 평소에 연습했어?”
“네? 당연한 거 아닙니까?”
“했는데? 태현이가 하라고 했잖아.”
“연습했어요.”
“…….”
케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너 설마….”
“나, 나도 했어! 물론이지!”
‘안 했군.’
‘안 한 것 같습니다.’
‘안 한 게 분명하네요.’
일행은 딱하다는 듯이 케인을 쳐다보았다. 쯔쯔….
“자자. 사실 나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 예선과 본선 사이에 시간이 좀 있었다지만 그사이에 엄청나게 시간을 줄이진 못했겠지. 그냥 평소처럼, 실수만 하지 말라고.”
태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케인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케인을 쳐다보았다.
‘왜 나한테만 그래…!’
‘흠. 새로 얻은 스킬은 아직 공개하지 말아야겠군.’
사람들의 예측과 비슷하게, 태현은 결승에서 유성 게임단과 맞붙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세연이 이끄는 유성 게임단도 태현과 비슷한 성적을 내고 있는 상황.
시간을 더 줄이면 줄였지 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감안한다면 태현도 미리 대비를 해놔야 했다.
이번에 새로 얻은 스킬은 그 대비가 되어줄 것이다.
* * *
최명성 팀장은 대회 대진표를 보며 말했다.
“팀 KL이 고전할지도 모르겠어.”
“네? 팀 KL이요? 농담이시죠?”
“농담 아니야.”
“팀 KL 첫 상대가… 오사카 드래곤즈잖습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팀 KL이 이런 팀에 밀릴까요?”
일본은 전통적으로 E스포츠에서 약세인 나라였다. 그에 비해 한국은 전통적으로 E스포츠의 강자!
오죽하면 ‘게임단의 전력은 얼마나 많은 한국 선수를 보유하고 있나로 결정된다’ 같은 농담이 돌아다니겠는가.
실제로 지금 게임단 중 손꼽히는 게임단 중 여럿이 한국에 있었다.
압도적인 자본력으로 운영되는 미국과 중국 게임단에 비교한다면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끝까지 들어야지. 밀린다는 게 아니라 고전할지도 모른다고.”
“왜요?”
“대회란 게 원래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 의외로 다른 요소들이 많이 작용해.”
“…??”
“뭐, 보면 알 거다.”
* * *
[던전 공략 대회 경기장에 입장했습니다.]
[안에서는 PVP가 불가능합니다.]
[……]
대회 진행을 위해 각 본선 진출 플레이어들은 바로 경기장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태현은 이상하게 경고 메시지창이 자신을 노리고 말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회 전에 싸우지 마!
‘음. 기분 탓이겠지.’
그보다 중요한 게 많았다. 이를테면 지금 눈앞에 모인 사람들이라던가.
“일본인 플레이어들은 전부 모였나?”
경기장 안에 입장한 태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경기장 근처에서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
가장 많은 판온 플레이어가 있는 국가는 중국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닌 것 같았다.
“이거 결승전 아니지? 본선 첫 경기 맞지?”
“아무리 판온이 인기가 많아도 이건 좀….”
뒤늦게 입장한 다른 팀원들도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물론 팀 KL 팬들도 많이 있었지만, 지금 일본 팬들처럼 조직적이고 거대한 응원을 하는 팬들은 없었다.
“후후. 김태현. 당황한 것 같군.”
“넌…!”
태현은 고개를 돌려 말을 건 플레이어를 쳐다보았다.
“누구였더라?”
“크로포드잖아 개자식아!”
화염술사 랭커 크로포드.
이번 대회에서는 아깝게 예선 탈락했지만, 마법사 랭커로서 무시당할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실제로 정수혁은 크로포드를 보고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영… 영광입니다!”
“하하. 여기 이 친구는 내가 누군지 알… 잠깐, 정수혁이었어? 무슨 영광 같은 소리를….”
“네?”
“치워. 같은 경쟁자면서 겸손할 필요 없어!”
평소였다면 크로포드를 단칼에 요절냈을 태현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크로포드가 근본적으로는 호ㄱ… 아니, 나름 괜찮은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정수혁을 밀어내긴 했지만 저건 어디까지나 경쟁자로서 동등하게 여기는 모습이었지, 무시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물론 경기장에서 PVP가 허용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크로포드는 태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채 입을 열었다.
“앨콧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당할 뻔했군. 네가 이런 심리전이 주특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아니, 진짜 기억 못한 거였는데.”
“안 통한다니까 이 자식아! 그만해!”
‘충분히 통하는 것 같은데….’
다른 일행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이걸 보고 당황한 것 같군. 설마 이걸 예상 못한 건 아니겠지? 그러면 좀 실망인데.”
“뭔 예상?”
“오사카 드래곤즈가 얼마나 많은 팬을 끌고 올지 말이야. 야. 일본 애들은 팀이 몇 개 없어. 있더라도 대부분 아마추어 팀이라고. 그런데 갑자기 한 팀이 본선에 진출한 거야.”
“반응이… 뜨겁겠네?”
“뜨거울 뿐이겠냐? 지금 저기 모인 기자들 봐라. 인터뷰하느라 바쁘네.”
“…….”
태현과 팀원들은 고개를 돌렸다. 일본인 기자들이 오사카 드래곤즈를 둘러싸고 떠들고 있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소감이….
-처음으로 판온 대회에 본선 진출을 하게 되었는데….
-강팀을 앞두고 최선을 다하겠….
성실해 보이는 선수들은 차근차근 인터뷰에 대답하고 있었다.
그들은 태현 일행과 눈이 마주치자 허겁지겁 인사했다.
“앗! 저기 팀 KL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팀 KL의 주장 김태현 선수! 이번 대회를 앞두고 오사카 드래곤즈를 상대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준비하셨습니까?”
“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 라고 말하려다가 태현은 멈칫했다.
그러기에는 상대 팀 선수들의 눈빛이 지나치게 똘망똘망했던 것이다.
이런 타입의 사람들에게는 약한 게 태현!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을 뿐입니다.”
“오사카 드래곤즈 정도는 특별한 방법 없어도 그냥 쉽게 이길 수 있다 이겁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도 않았는데? 번역기 고장 났나?”
“김태현 정도의 선수가 보기에는 오사카 드래곤즈는 허접한 팀이다?”
“너희 일부러 이러는 거지?”
무언가 자극적인 걸 원하는 것 같은 기자들!
악당 대 도전자들 같은 구도를 원하는 게 분명했다.
언제나 잘 먹히는 게 바로 노이즈 마케팅!
옆에서 <오사카 드래곤즈 파이팅!>이란 옷과 현수막을 들고 있던 팬들이 ‘우우우’ 하고 야유를 시작했다.
‘흠….’
그러나 그럴수록 태현의 머리는 냉정해지고 가슴은 차가워졌다.
원래 이런 상황일수록 더 능력을 발휘하는 게 태현!
그러나 팀에는 태현 같은 냉혈한만 있는 게 아니었다.
“크흑… 크흐흑!”
“넌 또 왜 울어?”
갑자기 케인이 코를 훌쩍대자 태현은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쟤네 사연이 너무… 감동적이잖아!”
“??”
옆에서 일본 방송국에서 나온 MC 한 명이 관중들 앞에서 오사카 드래곤즈 팀원들의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오사카 드래곤즈의 쇼카와 선수는 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란 선수입니다. 쇼카와 선수는 오늘, 지켜봐 주실 할머니를 위해 최고의 경기를….”
“…….”
무슨 프로그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알 것 같았다.
‘쟤네는 여기 말고 인간극장 같은 곳에 나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들어보니 무슨 팀원 하나하나가 절실한 사연을 갖고 올라온 팀이었다.
“만약… 본선에서 이기게 된다면 약혼자에게 청혼할 생각입니다.”
와아아아아!
“저는 꼭 할머니에게 이 경기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선수들이 한 명씩 소감을 말할 때마다 점점 커지는 함성!
그걸 본 케인은 완전히 흔들렸다.
“크흐흑. 나보다 훨씬 더… 악!”
딱!
태현은 케인의 뒤통수를 찰지게 때렸다.
“개소리하지 말고 집중이나 해라.”
“왜, 왜?”
“자. 다들 집중. 물론 우리들의 사연이 쟤네처럼 뭉클하고 가슴 따뜻하진 않지. 우리는 딱히 사연 없잖아?”
“제 사연은 꽤 감동적인데요….”
이다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케인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에이, 그래도 저기에 비하면 어림도 없… 억! 지, 지금 이다비가 날 때린 거야?”
“아닌데요?”
처음 보는 이다비의 공격성!
“이다비 사연은 감동적이긴 한데 그건 말하고 다닐 사연이 아니고.”
“무슨 일이었었는데? 악!”
“자. 우리는 이것만 알면 된다. 이기는 건 팬이 많은 팀도 아니고, 사연이 많은 팀도 아니야. 이기는 건 강한 팀이다. 그냥 강한 팀이라고.”
“김태현 선수? 잠깐 인터뷰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는 사이 한국 쪽 방송국에서도 사람들이 왔다. 태현은 웃으며 거절했다.
“경기 다 끝나고 하죠.”
“네?”
태현은 사람들을 밀치고 팀원들과 함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연이고 뭐고 간에 그런 걸 태현이 신경 써 줄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저런 악명이 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단 이기고 생각한다!’
상대가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하든….
앞에서 맞붙게 되면 전력을 다해, 최선을 다해 상대해 주는 게 태현이었다.
한 시간 후.
팀 KL은 본선 첫 경기를 압도적인 승리로 장식한 뒤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