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678화
“케인. 멍청한 소리는 하지 말자. 즉위식 준비에 필요한 게 있으니까 가지러 가는 거잖아.”
“오스턴 왕국에? 아탈리 왕국 즉위식 준비잖아….”
“오스턴 왕가 아이템이 아니라… 애초에 그건 이미 내가 갖고 있잖아.”
“응?”
“오스턴 왕가 아이템을 가지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골드와 아이템을 가지러 가는 거야.”
케인은 그제야 태현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했다.
“…강도질한다는 거지?”
“이제야 이해가 좀 빠르네. 자, 복면 쓰자.”
“넌 복면 필요 없지 않냐?”
태현에게는 <마르덴 후작의 살아 움직이는 가면>이라는, 이런 상황에서는 사기적인 아이템을 갖고 있었다.
외모 변경이 가능한 가면!
“케인, 케인. 너도 PK 좀 해보고 강도질 좀 해봤을 텐데 왜 이러냐?”
“난 너하고 비교하면 엄청 착하게 산 편이거든 이 자식아?!”
이제는 케인도 알았다.
그도 나름대로 악당 플레이를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판온 1 때 태현과 비교한다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이라는 걸!
판온 1 때 태현의 일화들을 들으면 믿기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
참으로 온갖 방식으로 사람을 털어먹는, 강도질의 마에스트로!
오죽하면 산적 플레이어들이 태현의 일화들을 따로 모아서 <산적 교본서>로 부르고 다닐까!
“케인. 한 번 하고 말 거면 상관이 없지만, 지속 가능한 강도질을 위해서는 여러 고민이 필요하지.”
“…….”
지속 가능한 강도질 같은 단어는 처음 들어봤다. 케인은 가만히 있었다.
어디 무슨 소리를 하나 보자!
“왜 판온에서 강도질을 전문으로 하는 플레이어들은 오래 가지 못할까?”
“글… 글쎄?”
자기가 벌거나 만드는 것보다 남의 것을 뺏는 건 언제나 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판온에서 산적, 해적 등 강도질을 전문적으로 하는 플레이어들은 초기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그들 중 오래 살아남아 랭커까지 된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다 꼬리를 잡혀서지.”
강도질을 시작하면 여러 페널티가 붙었다. 강도질을 많이 할수록, 그 피해가 클수록, 페널티는 더더욱 커졌다.
각 마을, 요새, 성, 도시 등등에서 출입 금지가 걸리는 건 물론이고.
현상금까지 걸려서 퀘스트를 받은 NPC와 플레이어들이 찾아오게 됐다.
드넓은 판온에서 쉴 곳 하나 없이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태현이야 악명 스탯이 워낙 높아도, 작위에 영지에 미친 명성 스탯까지 갖고 있었으니 크게 힘든 적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강도짓을 하는 플레이어들은 뭉쳐서 길드를 만들곤 했다. 자기들끼리라도 뭉쳐야 했으니까.
그리고 물론,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케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보통 그런 길드는 자기들끼리도 싸우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꼬리를 잡히는 순간 여러모로 귀찮아져. 알겠냐, 케인? 깽판을 칠 때는 두 가지로 구분을 해야 해. 정체를 들켜도 되는 깽판과 정체를 들키면 안 되는 깽판. 이런 강도질은 보통 후자일 때가 많지.”
“…….”
태현의 목소리에서는 오랜 연륜을 가진 현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지혜가 담겨 있었다.
순간 진지하게 듣던 케인은 정신을 차렸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이 자식은 강도질하는 방법을 뭐 이리 폼 나게 말하는 거야? 난 강도질 좀 했다고 아직까지 게시판에서 욕먹는데….’
케인은 왠지 모르게 억울해졌다. 조금 훔친 그는 아직도 욕을 먹는데 태현은 영웅 취급을 받다니!
“난 일단 길드 동맹과 휴전을 맺은 상황이란 말이지. 그런데 강도질한 걸 들키면 좀 그래.”
“너도 그런 걸 신경 쓰는구나….”
“신경 써야 할 때는 신경 써야지. 자. 그래서 왜 복면을 써야 하는가. 왜냐하면 정체는 숨겨도 다 들통나게 마련이거든.”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복면을 쓰고, 이것저것 변장을 하고, 아닌 척을 해도 하다 보면 판온에서는 꼬리가 잡히게 되어 있었다.
마법이나 추적 관련 스킬 이야기가 아니었다.
강도짓한 걸 본 플레이어들이 동영상이라도 찍어 올리면, 그걸 수십, 수백만의 플레이어들이 보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든 제보가 들어오게 마련이었다.
-어? 저 사람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저 사람 XX 같아요!
“그러니까 최대한 속임수를 많이 걸어야 해. 지금 길드 동맹 쪽에서 난리를 치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게 나란 말이지.”
‘알긴 잘 아네.’
“아예 가상의 인물, 새로 나타난 놈인 척해야 의심을 벗어날 수 있어. 난 평소에 복면을 쓰고 다니지 않았으니까 복면을 쓰는 것도 혼란을 주겠지. 그리고 케인. 평소 쓰던 스킬도 쓰면 안 돼.”
“뭐?!”
“노예의 쇠사슬 같은 거 쓰면 죽는다. 평범한 스킬들만 써. 시중에 풀려서 개나 소나 쓸 수 있는 스킬들. <강타>나 <세 번 치기> 같은 것들 있잖아.”
“끙….”
“그리고 이름도 가짜로 지어야겠군. 흠. 좀 산적 플레이어 같아 보여야 하는데… 요즘 유명한 산적 플레이어들 누구 있더라?”
‘너, 인마. 너.’
케인은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게시판을 검색했다.
“길드 동맹에 느레, 느페 형제가 유명하네.”
느레, 느페 형제.
산적으로 뛰다가 한계를 느껴서 길드 동맹에 가입한 두 산적 랭커였다.
최근에는 아란티스 왕국에서 태현과 부딪혔다가 느레의 장비가 전부 다 털린 적이 있었다.
“그런 애가 있었나?”
“네가 장비 다 털었잖아! 경매장에도 올렸는데 까먹었냐?!”
“몰라. 그런 놈. 그런 놈 하나하나 다 기억하면 어떻게 살라고.”
“…….”
“어쨌든 잘됐네. 그럼 우리는… 느구, 느가로 가자.”
“…이름 너무 구리지 않냐….”
“시끄러, 인마. 우리 컨셉은 ‘느레, 느페 형제를 동경해서 새롭게 나타난 산적 듀오’야. 알겠어?”
‘강도질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나?’
“너 지금 속으로 강도질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냐고 생각했지?”
“?!?!”
“케인. 세상 모든 일은 쉽게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다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도질도 마찬가지야! 네가 그러니까 강도질로 대성을 못한 거지!”
“…!”
케인은 충격과 함께 살짝 감동을 느꼈다.
‘아니. 또 감동받을 뻔했네. 속지 말자. 속지 말자.’
이상하게 태현과 대화하다 보면 넘어가게 됐다.
* * *
한 번 느레 장비를 만져본 적이 있는 태현에게, 다시 비슷한 장비를 맞추는 건 쉬웠다.
느레는 기억 못 해도 느레한테 뺏어서 확인해 본 장비는 기억하는 태현!
[<정교하게 따라한 산적의 갑옷>을 만들었습니다.]
“흠. 좋아. 좋아.”
아주 똑같지도 않으면서도, 거의 비슷하게 생긴 갑옷.
이걸 보면 사람들은 ‘어? 느레, 느페 형제랑 장비도 비슷하다니. 둘을 따라하는 건가?’ 생각할 것이다.
“가자. 케인!”
“…….”
“그러고 보니 새로 얻은 스킬 중에 너한테 어울리는 스킬이 있어.”
“뭔데?”
케인은 살짝 기대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살라비안의 폭주>라고.”
“…이름만 들어도 수상쩍어 보이는데….”
태현이 도미닉을 잡고 얻은 권능 스킬!
“아냐. 좋은 스킬이야.”
<살라비안의 폭주>
살라비안의 힘을 빌려 생명력을 폭주시킵니다! 일정 시간 동안 HP와 HP 회복력, 물리 방어력과 마법 방어력이 매우 크게 증가합니다.
“!”
“거봐. 좋지? 권능 스킬들은 대체로 좋다니까.”
“진짜 좋네? 근데 왜 스킬 이름에 폭주가 들어가지?”
“…하하. 멋있어서 넣었나 보지.”
태현은 가장 밑의 줄에 있는 설명을 숨겼다.
주의: 살라비안의 힘으로 인해 모습이 흉측해질 수 있습니다.
태현은 케인과 같이 가면서 아이템을 확인했다.
도미닉을 잡고 기타 살라비안 교단과 귀족들까지 털면서, 아이템이 너무 많이 나와 전부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중요한 것부터 먼저 먼저 확인하면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탈리 왕국의 왕관:
내구력 ∞/∞, 마법 방어력 700.
스킬 <왕국 추방> 사용 가능, 스킬 <국왕의 현상금> 사용 가능, 스킬 <국왕의>….
아탈리 왕가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왕관이다. 한때 살라비안의 힘이 깃들어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정화된 상태다.
-착용하는 순간 즉위식 퀘스트 시작.
가장 중요한 왕관.
이건 또 극단적인 아이템이었다. 물리 방어력이 없는 대신 마법 방어력이 이제까지 본 아이템 중 최고였다.
‘마법사들 죽이라고 만든 아이템인가?’
이걸 끼고 마법사들한테 덤벼들면 마법사들이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물론 이거 없어도 태현은 마법사들 죽일 자신은 충분히 있었지만!
마법 방어력도 극단적이었지만, 스킬 목록도 극단적이었다.
이제까지 얻은 아이템 중 가장 스킬들이 많았다.
관련된 스킬은 대부분 국왕의 명령 스킬이었다.
쫓아내거나 현상금 걸거나 괴롭히거나 귀족으로 올려주거나….
하도 세세하게 나뉘어 있어서 다 볼 수가 없었다.
‘음?’
스킬 목록들을 훑어보던 태현은 신기한 걸 발견했다.
<아탈리 왕가의 힘>
오랫동안 내려오던 아탈리 왕가의 힘을 빌려, 일시적으로 무적 상태가 됩니다.
-아탈리 왕궁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순간 뭐 이런 사기 스킬이 있나 했는데, 생각해 보니 아탈리 왕궁 안에서만 쓸 수 있으면 좀 애매했다.
적을 어떻게 왕궁 안으로 끌어들이지?
태현은 도미닉이 이 스킬을 못 쓰고 죽었다는 것에 안도하기로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에드안이 안 훔쳤으면 정말 사달이 날 뻔했군….’
“태현… 아니, 느구! 느구!”
“?”
케인이 태현을 불렀다.
“저기 길드 동맹 애들 아냐?”
“오.”
아이템 확인을 하던 태현은 창을 끄고 시선을 돌렸다.
저 언덕 밑에서 수레 몇 대와 함께 길드 동맹 깃발을 단 플레이어들이 오고 있었다.
“뭔 아이템이냐… 보자. 오호라. 대장장이 재료군.”
질 좋은 강철 주괴들이 수레에 잔뜩 실려 있는 걸 보고 태현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길드 동맹 깃발까지 달고 있다니.
보통 ‘이거 건드리면 넌 길드 동맹한테 쫓겨서 죽는다!’라는 의미로 단 거겠지만, 태현한테는 ‘여기를 털어 주세요!’라는 깃발로 보였다.
“가자! 느가!”
“그… 그래!”
케인은 아직도 어색한 새 이름에 겸연쩍어하며 태현의 뒤를 쫓았다.
“모두 정지!!”
“…???”
수레를 끌던 길드 동맹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나타난 플레이어들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안심하고 비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단둘이었으니까!
“…뭐, 뭐야? 으하하하! 두 명이잖아!”
“너희 판온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나 본데, 우리가 길드 동맹 길드원이거든? 너 잘못 걸렸다.”
“무릎 꿇고 잘못했어요 하면 봐줄게.”
태현은 그걸 보고 작게 말했다.
“친절하네.”
“뭐, 뭐라고 해야 하더라?”
“너 산적질 해본 적 있잖아?”
“한 지 너무 오래됐다고!”
“쯔쯔… 이름이 부끄럽다. 내가 한다. 난 느구! 여기는 느가! 짐을 놓고 가면 목숨은 살려주마!”
길드원들은 여전히 비웃으면서 머리 옆에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잠깐만, 느구, 느가면… 설마 느레, 느페 형제 따라한 건가?”
“야! 장비도 비슷해! 산적 꿈나무인가 봐! 크하하하… 컥!”
태현은 말을 하던 길드원에게 도끼를 집어 던졌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HP가 0이 되어…]
“…….”
“…….”
장비는 전부 바뀌었지만 쌓아놓은 스탯과 패시브 스킬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행운의 일격으로 잔뜩 버프된 투척 도끼가 들어박히자 길드원은 그대로 로그아웃됐다.
“어… 어….”
“우리가 우스워 보이냐? 어!?”
케인은 뒤늦게 끼어들었다.
“우리는 느레, 느페 따위보다 훨씬 더 크게 될 산적들이다! 쫄아서 길드에 들어간 느레, 느페하고 비교하지 말라, 이 말이야!”
“그래! 말 잘했다. 느가!”
“저… 저 미친놈들이 진짜! 너희 길드 동맹한테 척살당하고 싶 컥!”
“쓸어버려!”
그 말과 함께, 태현과 케인은 길드원들에게 덤벼들어 공격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