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676화
순간 태현과 이세연이 시선이 마주쳤다. 태현은 씩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이세연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아차!’
“자. 팀 KL도 들어주세요!”
태현이 화이트보드를 들었다. 거기에는 아무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다.
“?”
“??”
“하하. 저희는 본선에 올라온 이상 모든 팀이 다 상대하기 까다롭고 걱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야지요.”
“아아! 그런 뜻이!”
MC는 감탄했다.
태현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다른 선수들도 감탄했다.
저게 바로 만족을 모르고 계속해서 정진하는 1인자의 자세인가!
물론 이세연은 아니었다. 태현의 시꺼먼 속마음이 뻔히 보였던 것이다.
‘저, 저, 저거 내 이름 쓰기 싫어서…!’
이세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세상에 저렇게 속이 좁을 수가!
이세연은 눈빛으로 항의했다. 그러나 태현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과연 팀 KL의 각오는 남다르군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 뒤로는 순탄하게 진행이 이어졌다.
이번 대회 공략의 키워드는 뭐가 될 것이냐(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폭탄> 아이템이라고 대답했다), 게임단에 들어간 프로게이머로서 불편한 점이 있느냐(케인 혼자 숙소가 너무 넓어서 청소하기 귀찮다는 말을 했다가 눈총을 받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야. 오늘 방송 정말 잘됐네요.”
방송이 끝나자 PD가 와서 모두를 칭찬했다.
프로게이머들은 게임은 잘해도 방송 진행은 어색할 때가 많아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 풀렸던 것이다.
MC가 능숙하게 이끈 것도 있었지만 태현이나 이세연처럼 이미 방송을 경험해 본 적 있는 선수들이 큰 도움이 됐다.
거기에 케인처럼 예측할 수 없는 대답을 하는 선수들까지!
‘아주 좋아. 아주 좋아….’
“그러고 보니 김태현 선수.”
“?”
“이번에 이동팔 대표님께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하시던데. 김태현 선수 역할이 크겠군요.”
“아, 네. …네?”
무심코 대답하던 태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왜 태현 도움이 필요하지?
* * *
“아. 들었군. 후후. 그래. 언제 한번 이야기하려고 했었지.”
‘당황한 거 같은데?’
태현은 이동팔 대표의 이마에 땀 한 방울이 맺혀 있는 걸 보며 생각했다.
더운 날씨는 아니었다.
“우리 SI 엔터에서 김태현 선수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간판 중 하나라고.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간판이라는 건 정말 대단한 거야. 김태현 선수가 들어올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클 줄은….”
“그 소리는 많이 들었고요. 매번 하시잖습니까.”
네 인기를 봐라! 네가 나가기만 하면 이렇게 히트를 친다! 이렇게 인기 좋은데 방송 하나 더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뉘앙스의 문자를 주기적으로 받는 태현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판온을 해야 한다는 이유가 있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김태현 선수도 이제 후배들을 챙겨줘야 하지 않겠나?”
“후배 말입니까? SI 엔터에서 새로 선수 영입하시게요? 뭐, 요즘 프로게이머들이 인기긴 하니까….”
판온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판온 관련자들의 인기도 따라서 높아지게 되어 있었다.
태현이 판온만 하는데도 점점 인기가 늘어나는 것처럼.
“아니. 인제 와서 선수 영입은 좀… 그리고 김태현 선수도 있고 세연이도 있는데 굳이 더 늘려야 하나 싶네. 이래 봬도 내가 소수정예를 좋아하거든. 잘 키운 한 명이 회사를 먹여 살리는 법.”
SI 엔터 입장에서는 다른 선수들이 성에 차지 않을 만도 했다.
태현과 이세연이 압도적인 활약으로 성적을 내고 있었으니….
“그러면 뭡니까? 선수 아니면 제가 챙겨줄 게 없는데요….”
태현은 의아해했다. 판온 관련 선수가 아니라면 태현이 챙겨줄 게 있나?
가수나 배우들은 태현이 뭘 가르쳐줄 게 없었다.
‘운동이라도 가르쳐주란 건가?’
“만약 챙겨줄 게 있으면 챙겨줄 건가?”
“…뭐 일단 들어보고….”
“수락한 걸로 알겠어! 그래. 내 야심 찬 계획을 들려주지.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네.”
“…?”
“아이돌 게임단을 만들어 볼 생각이야.”
“…….”
태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탁-
“잠깐! 끝까지는 들어줘야지!”
“아니, 뭔 개소립니까 그게!”
“잘 들어봐! 아이돌, 잘 나가지? 인기 좋잖아!”
“그렇죠….”
“게임단은 어때? 요즘 인기 좋잖아!”
“…….”
“둘 다 인기 좋은데 합치면 얼마나 시너지 효과가 날지 아나?”
“어중간해져서 망할 거 같은데요.”
“부정적인 소리 하지 말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잘해야지.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그리고 게임이면 게임.”
‘이 사람이 미쳤나?’
태현은 진지하게 의심하는 눈빛으로 이동팔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요즘 SI 엔터가 잘나간다고 약을 한 건 아니겠지?
“왜 그렇게 쳐다보나?”
“아니… 아닙니다.”
이동팔은 100% 진지해 보였다. 저렇게 진지해 보이니 태현도 살짝 흔들렸다.
자기보다 훨씬 더 연예계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하는 소리니 뭔가 계산이 있는 게 분명한 거 아닐까?
“생각해 보니 대표님이 하시는 일이고, 망해도 대표님이 책임질 일이니 제가 말릴 이유는 없네요.”
“그래… 잠깐. 방금 망한다고 했나?”
“근데 전 왜 부른 겁니까?”
“아, 게임 훈련 좀 부탁….”
“저 갑니다.”
“조금만! 조금만 해주면 돼! 기초 실력이나 컨트롤 같은 거!”
“바빠 죽겠는 사람한테 뭘 시키는 겁니까?”
“그러니까 조금이라고 했잖아! 아주 기초적인 훈련 정도만 시켜줘도 괜찮다고! 그리고 대회로 바쁜 건 나도 알아! 대회 끝난 다음 해도 돼!”
태현은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근데 코치는 많지 않나요? 넘쳐나는 게 판온 코치일 텐데….”
게임단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코치나 감독을 맡으려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이 나왔다.
주로 나이가 좀 있고, 전 세대 프로게이머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맡곤 했다.
“내 신조 모르나? 할 수 있는 한 최고를 고르라는 신조.”
“이세연 시켜요, 이세연.”
“시키려고 했는데 걔는… 그 뭐시냐. 원거리? 캐스터? 그런 것만 해왔고 그런 것만 알아서 힘들다고 하던데. 법사면 도와주겠다는데 다른 건 자기가 무리래. 그래서 다른 직업들은 역시 김태현 선수가….”
“아.”
태현은 무슨 소린지 바로 이해했다.
이세연은 판온 1 때부터 2까지 네크로맨서만 파온, 골수 네크로맨서 플레이어였다.
그리고 네크로맨서는 마법사 중에서도 운용 방법이 꽤 독특한 편이었다.
소환수를 조종하면서 동시에 저주 계열 마법도 사용해야 하는, 대표적인 고난이도 직업!
그런 이세연인 만큼, 근접 직업을 가르치기는 꺼려 할 수 있었다.
“대회 끝나고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정말이겠지?!”
“한다고 안 했고 생각만 한다고 했거든요?”
* * *
“…이런 일이 있었는데. 혹시 요즘 뭐 안 좋은 걸 드신 적이 있으신가?”
“…아니거든.”
이세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회사 스타일링 룸에서 메이크업을 받으며 쉬고 있는데 태현이 찾아온 것이다.
“삼촌도 다 생각이 있어서 계획하신 거야. 판온의 인기가 워낙 좋으니 충분히 해볼 만한 계획이란 거지. 춤이나 노래는 확실하게 실력을 키우고 있으니 거기에 판온이란 요소를 추가하는 거지.”
“분명 그럴듯한 소리인데 왜 이렇게 미친 소리처럼 들릴까….”
“원래 평범한 사람들에게 혁신적인 시도는 잘 와닿지 않는 법이지.”
“…….”
이세연은 태현에게 도발을 찔러 넣었다. 저번 방송에서 했던 일에 대한 보답이었다.
“나, 나도 혁신적이라고 생각하긴 했거든?”
“난 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준비하고 있던 연습생 애들 보니까 노래도 괜찮고 춤도 괜찮더라. 이제 게임만 잘하면 되겠네.”
이세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이동팔 대표와 생각이 달랐다.
‘삼촌은 나하고 김태현한테 배웠다는 걸로 화제몰이를 하려는 것 같은데,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아. 그냥 코치 고용해도 충분할 거야.’
태현과 매번 티격태격 다투었지만, 이세연은 태현과 한 가지 생각은 일치했다.
-누군가 가르치는 건 부담이야!
같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하하 판온 좀 같이해요~ 배우고 싶어요~’이럴 때도 최대한 돌려서 거절했는데, 연습생 애들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부담 그 자체였다.
게다가 연예인들과 달리 연습생들은 될 때까지 이세연이 책임지고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다.
-우리 조카가 최고야! 크헬헬!
-…….
기대 잔뜩인 삼촌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김태현 선수한테도 부탁해야겠군. 둘이 가르치면 최강일 테니…!
-!
그때 이세연은 깨달았다.
그녀가 굳이 거절하지 않아도 태현이 알아서 거절해 줄 것이라는 걸!
태현이 저런 제안을 받을 리 없었으니….
만약 태현이 거절하면 이동팔은 근접 직업 코치를 구할 테니, 이세연은 ‘에이 그럴 바에는 한 사람이 다 가르치는 게 낫죠’ 같은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세연은 태현을 믿었다.
‘네가 받을 리 없지!’
“그래서, 제안을 거절하니까 삼촌… 아니, 대표님이 뭐라셔?”
“응? 거절 안 했는데? 생각해 보겠다고 했는데.”
“왜?!?!?!”
“하도 간절한 태도로 미친 소리를 하시니까… 그리고 너도 가르친다고 하고, 대회 끝나고 내 스케줄에 맞춰서 한다고 하니 그것도 거절하긴 뭐했어. 생각해 본다고 했지. 예전이었다면 거절했겠지만 나도 게임단을 이끌어야 하잖아. 같이 홍보가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데, 걔네들이 데뷔하면 우리 게임단하고 많이 엮이지 않겠어?”
“…….”
이세연의 입이 벌어졌다. 일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말, 말도 안 되는….’
저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놈이 저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그런데 너 방금 좀 이상하게 놀란 것 같은데.”
“어, 어? 뭐가?”
“너 혹시… 내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해서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그러겠어?”
“랭커들 중에 다른 사람 가르치는 거 좋아하는 사람 드물잖아? 방해되면 방해됐지 도움 안 되니까. 점점 수상해지는데….”
흔들리는 이세연의 눈빛을 보고 태현은 확신했다.
이 녀석, 내가 거절할 줄 알고 받아들였구나! 내 핑계 대려고!
“아… 아니라니까.”
“그래. 뭐 상관없지. 난 제안을 받아들일 테니까.”
“…….”
이세연의 눈동자가 더 크게 흔들렸다. 태현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난 가볼게.”
“…^#!%^@!”
태현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 이세연은 발을 동동 굴렀다. 무덤을 스스로 판 꼴이 된 것이다.
그걸 본 스타일리스트가 물었다.
“둘이 진짜 사귀어?”
“언니는 눈이 있으면 방금 그걸 보고서 그런 말이 나와요?!”
“미, 미안. 그냥 물어본 거야….”
* * *
‘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돌 게임단은 좀 아닌 것 같은데….’
탕탕탕탕-
“야, 손, 손! 네 손 찍겠다!”
태현이 보지도 않고 망치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강철 판을 찍어내는 걸 보며, 케인은 기겁했다.
그러나 태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치웠다.
보지도 않고 망치를 두드려서 작업을 끝내는 달인의 기예!
머릿속으로는 수십 가지 생각을 해도 손끝은 정확하게 움직였다.
지금 태현은 수도 성벽에 나와서 대장장이들과 같이 잡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있잖아.”
“?”
“국왕 즉위는 언제 할 거냐?”
케인은 소곤소곤 물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들렸다.
“!”
“!!!”
다들 그 말을 듣자마자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었다.
김태현이 과연 아탈리 왕국 국왕 즉위를 언제쯤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