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662화
“힉.”
태현과 눈이 마주친 버포드는 고개를 깔고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왠지 모르게 불길했던 것이다.
판온에서 구르고 구른 덕분에 많이 늘어난 직감!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하하. 버포드 이 녀석. 아까 감동적인 연설을 하던데.”
“하, 하하… 감사합니다….”
“난 네가 이럴 줄 알고 영지에 들여보냈지. 내가 안 그랬으면 왜 사디크 교단에 가입했던 플레이어를 받아줬겠어?”
“…….”
버포드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디크의 화신을 쫓아가.”
“아니… 그게… 제가 사디크 교단 가입했었긴 했는데 이제는 탈퇴 상태고….”
“뭐 어때. 신성 스킬은 그대로 쓸 수 있잖아. 나름 사디크 교단 아니겠어?”
“아키서스 교단에 흡수된 사디크 교단이잖습니까….”
“괜찮아. 쟤도 제정신 아닌 거 같으니 그렇게 눈치채지는 못할 거야. 걸리면 딱 잡아떼라고.”
“…….”
“자! 빨리! 놓치기 전에 따라가! 못 찾으면 돌아올 생각 하지 말고!”
은근슬쩍 무서운 소리를 하며 버포드의 등을 떠미는 태현.
결국 버포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크흑… 무서운데….’
아까는 뭔가 치밀어 올라서 겁도 없이 외쳤지만, 지금 와서 보니 새삼스럽게 사디크의 화신은 정말 무섭게 생긴 것 같았다.
<사디크의 화신을 추적하라-사디크 교단 아키서스 교단 퀘스트>
현 아키서스 교단(구 사디크 교단) 소속인 당신이지만, 사디크 성기사로서의 힘은 아직 잃지 않고 있다.
대륙에 나타난 사디크의 화신을 추적해 그 정체와 비밀을 밝혀라!
사디크의 화신이 가진 힘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엄청난 보상일 것이다.
이건 사디크를 배신하는 게 아니다! 이제 사디크 교단이 곧 아키서스 교단이기 때문이다.
보상: ?, ???, ????
“…….”
아예 등까지 떠밀어주는 퀘스트 창! <아키서스를 믿는 사디크 성기사>로 전직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좀 아닌 거 같은데….’
버포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옮기는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무거웠다.
* * *
“이 승리는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태현은 기분 좋게 성벽 위에서 외쳤다.
성벽 밑은 격전의 흔적으로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승리의 기쁨!
공적치 포인트부터 시작해서 각종 보상이 승리한 플레이어들한테는 쏙쏙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왕위에는 언제 오르실 건가요!”
“수도로 언제 쳐들어가실 거죠?!”
태현은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 수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보고 있는 사람들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여러분! 나중 이야기도 좋지만 일단 오늘 승리를 기뻐합시다! 여기 전장에 널려 있는 전리품들 같은 것도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앗. 그렇지!”
“맞아!”
“그런데 저기서 어떻게 전리품을 챙기지? 남은 곳에서 챙기란 건가?”
플레이어 중 몇 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봐도 성벽 앞 전장은 난장판이었던 것이다.
살라비안 교단이 오염시킨 땅부터 시작해서 그 위에 용암과 화염이 펄펄 흘러넘치고 있었으니….
[영지 근처에 살라비안 교단이 오염이 심합니다. 영지 성장에 전체적으로 페널티가 들어갑니다.]
[영지 뱀파이어들이 좋아합니다.]
[다른 뱀파이어들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필요 없어….’
[영지 근처에 사디크 교단의 화염과 용암이 흐릅니다. 영지 성장에 페널티가 들어갑니다.]
[영지 대장장이들이 좋아합니다.]
실제로 태현에게는 계속 메시지가 날아오고 있었다.
지금 치워야 한다!
사람들이 기분 좋게 모였을 때!
‘공성전 끝나고 퀘스트 끝나면 다들 흩어질 테니까 시키고 싶어도 못 시키겠지?’
태현은 지금 기회를 이용해 전장을 복구할 생각이었다.
“화염을 끄고 용암을 식히고 오염을 없애면 됩니다! 그러면 전리품들이 우수수 쏟아질 겁니다!”
“오오오!”
“그런 방법이!”
“자! 여러분! 이제 정리하러 갑시다!”
사람들은 단체로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성벽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삽과 곡괭이, 각종 작업 도구들을 챙겨 들고 전장으로 향했다.
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용암에 닿았는데 전리품들이 남아나나?”
“쉿. 닥쳐.”
* * *
[도망쳤던 왕국군 부대가 영지에 들어옵니다.]
[백부장 가줄이 영지에 들어옵니다.]
[십부장 베켄이 영지에 들어옵니다.]
[……]
[영지의 유지비가 올라갑니다.]
‘큭.’
남들은 돈 주고도 못 사는 NPC 정예 부대를 공짜로 얻은 건 좋았지만, 대가가 따랐다.
그것은 바로 유지비!
-영지 확인.
태현은 오랜만에 영지를 확인했다.
군사력: A등급.
-대륙에서 손꼽힐 정도의 성벽을 갖고 있지만 군사 숫자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외교력: D등급.
-동맹 사이인 영지가 거의 없다. 오스턴 왕국은 영지를 적대하고 있으며 에랑스 왕국의 교단들도 아키서스 교단의 영지를 경계하고 있다.
경제력: D등급.
-대대적인 공사와 지출, 영지 모험가들에게 베풀어주는 이벤트 때문에 지출이 많다.
기술력: A-등급.
-대륙에서 가장 열정적인 제작자들이 영지에 모여 있다. 뛰어난 농부, 건축가, 재봉사 등등이 아키서스의 축복을 받아가며 제작에 힘쓰고 있다.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을 주의해야 한다.
“…….”
태현은 나머지도 확인했다.
주민 숫자는 손꼽힐 정도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고, 민심, 치안은 당연히 최상. 신성 또한 아키서스 교단의 본거지여서 그런지 최상이었다.
문화력: B+등급.
최근 소문을 듣고 예술가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젊은 예술 직업 모험가들에게는 좋은 스승이 되어줄 것이다.
“?”
뭔 소문?
태현은 고민하다가 뭘 말하는지 깨달았다.
아, 왕궁에서 훔친 예술품들!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에드안한테 왜 이런 걸 훔쳤냐고 구박했었는데….
태현은 펠마스를 불러 신전 안에 예술품들을 다 장식해놓으라고 명령했다.
“오옷! 이 작품들은…!”
“아는 작품인가?”
“비싸 보입니다! 금칠이 되어 있군요!”
“…너 말고 갈락파드 불러와라.”
“아,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제 전공이 이겁니다!”
“네 전공은… 아니다 됐다. 그래. 잘 해봐.”
태현은 말리려다가 말았다. 그냥 전시만 하는 건데 뭔 실수가 있겠는가.
그보다도 태현은 신경 쓸 게 많았다.
진행하고 있는 국왕 퀘스트가 다음으로 넘어간 것이다.
<왕이여, 만수무강하소서-아탈리 왕국 국왕 퀘스트>
당신은 뛰어난 지략으로 도미닉과 살라비안 군대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도미닉과 살라비안 교단은 수도로 돌아가 힘을 회복하려고 한다.
쇠는 달구어졌을 때 쳐야 하는 법.
왕국의 뜻 있는 군대들을 모아 수도를 공격해 도미닉을 처치하라!
보상: 아탈리 왕국의 국왕.
‘으. 수비랑 달리 공격은 좀 부담스러운데.’
과연 영지의 플레이어들로 잘 될까?
명령 체계가 통일되어있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길드 동맹도 공성전에서 공격 입장에 서면 피해가 많았다.
공격하려면 수비하는 숫자의 3배는 필요하다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태현은 힐끗 밑을 내려다보았다. 플레이어들이 삼삼오오 모여 삽질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영차! 영차!”
“여기 성수 부어! 냄새난다!”
“앗! 전리품이다! 은이야!”
“그거 우리가 쏜 화살 아냐?”
‘음. 보니까 의외로 잘 될 거 같기도 하고….’
[오송 백작의 사절이 영지에 찾아옵니다.]
[부카드 백작의 사절이 영지에 찾아옵니다.]
[피브레 백작의 사절이…]
“?”
태현은 메시지창을 보고 의아해했다. 뭐지?
* * *
“김태현 백작의 의기에 감동했소!”
“우리도 한 몫 돕겠소이다!”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NPC들의 말에서 느껴지는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도미닉이 질 거 같으니 김태현 백작의 편에 서는 게 좋겠군!
-김태현 백작은 영웅인 데다가 젊고 경험 없으니 이용해먹기 좋겠지. 다른 귀족들과 친하지도 않으니 더더욱.
-일단 영웅인 김태현 백작을 앞에 세우고 도미닉을 쓰러뜨린 다음에 잘 구슬려보자고. 다른 귀족들이 입을 모아서 말하면 어떻게 거절하겠어?
[카르바노그가 누가 누구를 얕보는 거냐며 경악합니다.]
태현은 상냥하게 웃었다. 그리고 허리를 적당히 굽혔다.
존경을 표시하는 가장 적당한 각도!
“잘 오셨습니다! 이렇게 존경하는 다른 백작 여러분들을 뵙게 되니 기쁠 뿐입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으하하하!”
[카르바노그도 따라 웃습니다.]
서로 다른 꿍꿍이를 품고서 웃는 그들!
-주인이여. 흑흑이가 돌아왔다.
“아. 잊고 있었네. 사디크의 화신도 왔었는데 걔는 왜 이렇게 늦게 왔대?”
* * *
태현은 오랜만에 게임단 일행들을 캡슐 밖으로 끌고 나왔다.
이유는 하나였다.
“옷 좀 사 입자.”
모두의 시선이 한 명한테 모였다. 케인은 당황해서 손을 흔들었다.
“왜, 왜 나를?”
“음….”
“으으음….”
“으흠. 으흠.”
일행은 모두 헛기침만 하고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케인이 옷을 안 사 입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센스가 너무….
“슬슬 대회도 앞뒀겠다, 게임단 단위로 방송 나가야 할 일도 있을 거야. 그때 대비해서 미리 옷 좀 갖춰놓자고.”
“방, 방송? 진짜? 나도 나가도 되는 건가?”
“물론 나가도 되는데… 넌 나가기 전에 나한테 복장 검사받고 가라. 아니다. 내가 그냥 코디님을 소개시켜 줄게.”
“…….”
걸어가던 이다비는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데 태현 님.”
“응?”
“저희 프로스다스가 후원하고 있지 않나요?”
태현이 저번 화보를 찍은 브랜드(이세연과 함께).
그 화보가 워낙 대박을 쳤기에 이후 게임단을 후원하기로 결정이 났었다.
“그렇지.”
“그러면 협찬도 들어오지 않아요?”
“응. 들어오고 있어.”
“…그런데 옷을 사러 간다고요?”
“사실 그건 핑계였어. 아무리 케인이라도 방송 나갈 때 입을 옷은 충분하지. 정말 안 되면 내 옷… 아니다. 내 옷은 사이즈 안 맞겠군. 어쨌든 빌리든 뭐든 어떻게든 할 수 있으니까.”
“…? 그러면 왜 나온 거예요?”
“겸사겸사 나왔지. 동생들 선물 좀 사주고, 케인 꼴 보기 싫은 옷도 좀 치우고….”
“동생? 태현 님 동생 없잖아요.”
“네 동생.”
이다비는 잠깐 멈칫했다가 말뜻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에요! 됐어요! 진짜 됐거든요! 제가 해줄게요!”
“내가 해주겠다는데 왜 네가 그래? 네가 선물해 주고 싶으면 따로 해.”
태현은 완강했다. 이럴 때 태현은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 이다비는 설득을 포기했다.
“…감사합니다. 잘 받을게요.”
“그래. 동생들 좋아할 만한 옷 좀 골라줘.”
“네.”
그러나 이다비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현 님은 뭘 좋아하시지?’
태현한테 쓸데없는 말을 한 동생들을 족치는… 아니, 야단치는 건 집에 가서 하고, 지금은 다른 걸 고민할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선물해 주겠어!
이다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케인, 최상윤, 정수혁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최상윤은 이다비가 복잡한 손짓을 보내자 당황했다. 저게 뭔 뜻이지?
“뭔… 뭐야?”
“쉿쉿. 물어볼 게 있어서요.”
“뭔데…?”
“태현 님이 뭘 좋아하시죠?”
“이기는 걸 좋아하지.”
“…좀 더 물질적이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없나요?”
“돈으로 되는 건… 음… 걔는 인생이 돈 자체라 뭘….”
말하던 최상윤은 깨달았다.
이다비가 뭔가 선물을 해주려고 하는 거구나!
‘이건 응원해 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