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644화
“말도 안 돼! 아무리 김태현 백작이라도…!”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김태현이 사악하고 교활하고… 하여튼 온갖 비열한 호칭은 다 붙는 놈이었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됐다.
대륙의 왕국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숙한 성지에서 일을 진행했다.
김태현이 나타났을 때도 대부분의 의식은 진행된 상태!
뭘 방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김태현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래서 막았다고?
“이걸 알고 있었을 리가….”
“다 알고 있었지!”
“!”
사실 모르고 있었지만 태현은 대충 분위기를 맞춰줬다.
덕분에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절망했다.
“나는 저놈을 이길 수 없는 것인가! 오오! 사디크 님! 어찌하여 저런 악마를!”
“아니 진짜 악마는 따로 있는데 너무 심한 말 아니냐? 동종업계 종사자한테 이래도 돼?”
태현은 투덜거렸다. 악마 종족은 따로 있는데 누가 누구보고 악마래?
“사디크 님! 저놈을 빨리 죽여주십쇼! 여기 사디크 님의 귀여운 마수도 있습니다!”
-마수… 그래… 내 신자가 맞는 거 같다….
[사디크의 불완전한 화신을 설득하는 데 성공합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태현은 사디크 성기사단장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절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사디크 님! 이걸 보십시오!”
서걱!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검을 뽑아 자신의 팔 하나를 잘라냈다.
화르륵!
-사디크의 인신 공양!
화끈한 스킬답게 사디크 성기사단장의 팔은 불타서 사라지고, 사디크 성기사단장의 몸을 강력한 화염이 덮었다.
오크 아저씨들은 흥미진진하게 팝콘을 뜯으며 구경했다.
“화술에서 밀리니까 퍼포먼스로 때우다니! 대단한데?”
“제법이야, 제법!”
일진일퇴의 공방!
사디크의 화신을 누가 더 확실하게 꼬드길 것인가!
거기에 서로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으음… 으음….
[사디크의 불완전한 화신이 흔들립니다.]
[설득이 깨질 수 있습니다.]
위험한 상황!
저걸 설득하기 위해서는 성기사단장보다 더 화끈하게 바쳐야 하나?
태현은 고개를 돌려서 흑흑이를 쳐다보았다.
-주, 주인님. 설마 절 바치실 생각은….
“아, 아니야. 그런 생각 안 했어.”
-방금 말 더듬으신 것 같은데….
태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흑흑이를 바칠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가성비 안 좋은 짓!
‘그래. 나한테는 화술 스킬이 있다!’
판온 1에서는 판온 생활 전부를 쏟아부은 대장장이 스킬에 자부심을 가졌었다.
판온 2에서는 판온 생활 전부를 쏟아부은 화술 스킬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태현이었다.
절대 저런 퍼포먼스로 때우려는 놈한테 질 수 없다!
-결정했다!
“오오! 사디크 님! 눈을 뜨신 겁니까!”
“사디크 님! 저 가짜의 쇼에 속지 마십쇼!”
-둘 다 태워버리겠다…!
“…….”
“…….”
성기사단장도, 태현도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뭔 솔로몬 같은 소리?
“아, 아니. 사디크 님?”
“사디크 님! 눈을 뜨셔야 합니다!”
-둘 다 태우면… 날 속인 놈도 확실하게 없앨 수 있다….
“사디크 님의 충실한 종인 저까지 태우실 겁니까?”
-내 충실한 종이면… 그 정도는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과연 악신은 악신!
물론 사디크 성기사단장의 구겨진 얼굴을 보니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디크 님… 다시 생각을….”
-너… 수상하군….
어떻게든 설득을 하려고 했다가 궁지에 몰려 버린 성기사단장!
‘오호.’
상대가 알아서 무덤을 파주니 태현으로서는 기쁠 뿐이었다.
-내가… 친히 태워준다는데… 기쁘지 않느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성기사단장은 태현을 노려보았다. 저 눈빛은… 물귀신의 눈빛!
태현은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저 자식이 물귀신처럼 같이 가려고 하는군!’
성기사단장이 궁지에 몰리면, ‘나는 죽어도 되니까 저 개 같은 김태현 놈도 같이 죽여주세요!!’라고 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나 같아도 그러겠다.’
태현은 결국 입을 열었다. 일단 그건 막아야 했다.
“사디크 님! 둘 다 태우는 것보다 저희끼리 알아서 승부를 내게 해주십시오! 이긴 자가 진정 사디크 님을 믿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
성기사단장은 반색했다.
태현이 꺼낸 말이긴 하지만, 일단 지금 사디크의 화신에게 불타는 것만 아니면 충분히 솔깃했던 것이다.
“위대하신 사디크 님께서 저희 같은 미천한 놈들에게 낭비하실 시간이 아깝습니다!”
-음… 맞는 말이다… 확실히 내게는 해야 할 사명이 있지….
“?”
태현은 갑자기 불길해졌다. 무슨 사명?
“무슨 사명이시죠?”
-모든 왕국을 태우고… 모든 교단을 태우는 것이지… 오로지 내 화염만이 남을 것이다….
성기사단장이 재빨리 태현을 가리키며 외쳤다.
“아탈리 왕국! 아탈리 왕국에 저놈의 영지가 있습니다!”
확실히 성기사단장은 많이 늘었다. 궁지에 몰리자 쑥쑥 오르는 화술 스킬!
태현은 가슴이 덜컥했지만, 다행히 사디크의 화신은 사디크의 화신이었다.
-내게… 명령하지 마라… 죽고 싶으냐?
“죄, 죄송합니다.”
-내가 갈 곳은 정했다. 나는… 에랑스 왕국으로 갈 것이다.
“왜… 에랑스 왕국인지….”
-더러운 교단 놈들이… 거기 많으니까….
에랑스 왕국!
지금 중앙 대륙에서 가장 잘 나가는 왕국!
당연히 다양한 교단 신전들이 우글거리며 힘을 뽐냈다.
사실 에랑스 왕국에서는 아키서스 교단이 별로 힘이 없었다. 오스턴 왕국이나 아탈리 왕국에서나 많이 퍼졌지….
‘음? 잠깐만.’
북동쪽으로는 잘츠 왕국, 동쪽으로는 쑤닝이 있는 오스턴 왕국, 동남쪽으로는 태현이 있는 아탈리 왕국….
‘무조건 오스턴 왕국으로 보내야 한다!’
잘하면 길드 동맹이 거의 다 먹은 오스턴 왕국에도 엿을 먹일 수 있다!
하지만 사디크 성기사단장처럼 명령하면 안 됐다. 저런 상대한테는 접근하는 방법이 따로 있었다.
단순히 화술 스킬만 높아서는 안 됐다.
마치 자기가 떠올린 것처럼, 은근하게 찔러 넣어야 하는 것!
“흠흠. 오스턴 왕국에 그렇게 사디크 교단을 핍박한 교단 놈들이 많다던데. 정말 나쁜 놈들인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
은근슬쩍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리는 태현!
물론 아주 큰 목소리로 말해서 사디크의 화신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뭐라고… 그게 어떤 놈들이냐?
“아키서스 놈들입니다!”
“저… 저 뻔뻔한….”
자기가 아키서스 교단 수장이면서!
결국 성기사단장은 뒷목을 잡았다.
[성기사단장이 극도의 분노로 상태 이상 <졸도>에 걸립니다.]
[화술로 상대를 졸도시키는 건 화술의 신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칭호: 촌철살인을 얻습니다.]
[스킬 <촌철살인>을 얻습니다.]
<촌철살인>
상대방에게 극심한 모욕을 가해, 무조건적인 상태 이상에 빠뜨립니다.
상대의 마법 저항 스탯과 상관없이 무조건 들어가는 강력한 디버프 기술!
화술 스킬은 마법 스킬보다 공격력은 떨어지지만 이런 독특한 강점이 있는 스킬이었다.
-좋다… 에랑스 왕국, 오스턴 왕국 모두 태워주겠다. 오만한 교단 놈들. 모두 내 분노의 화염을 맛보리라!!
콰아아아아앙!
사디크의 몸에서 거대한 화염 기둥이 솟구치더니, 거인족 성소의 천장을 뚫고 하늘 높이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사디크가 화염 기둥으로 변하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
“어???”
일행은 당황한 소리를 냈다. 사디크의 화염 기둥이 점점 하늘로 솟구치더니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슈우우우욱-
사디크의 화신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주변에 옮겨붙은 화염을 제외하고는 남긴 게 하나도 없었다.
남은 건 당황한 태현 일행과, 더 당황한 얼굴의 사디크 성기사단장!
“…….”
“…….”
설마 사디크의 화신이 정말 쿨하게 왕국을 태워버리러 바로 떠날지는 몰랐던 성기사단장이었다.
그것도 자기를 내버려 두고!
스르륵-
태현 일행은 서로 말하지 않았는데도 빙 둘러쌌다. 서로의 마음이 일치했던 것이다.
-보스 몬스터 하나를 날로 잡을 수 있는 기회다!
보스 몬스터를 왜 잡기 힘든가?
그건 보스 몬스터 자체가 강하기도 했지만, 보스 몬스터가 보통 위험하고 깨기 어려운 던전 깊숙한 곳에 부하들과 같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던전도, 부하도 없는 보스 몬스터라면?
난이도가 확 하락했다.
게다가 여기 있는 태현 일행은 전원 랭커라고 봐도 좋았다.
사디크 성기사단장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잡을 수 있다!
“잠… 잠깐….”
“공격!!”
신이 난 태현은 바로 명령을 내렸다. 그것으로 사디크 성기사단장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 * *
파파파팍!
‘안정적인 원거리 딜러 한 명만 있어도 확실히 편해지는군.’
사디크 성기사단장이 급소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느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며, 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유지수는 장비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
현질에 목숨 건 오크 아저씨들 사이에 있는데도 장비가 꿀리지 않고, 오히려 더 좋아 보인다는 건….
현질!
‘용돈을 많이 받나?’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사디크 성기사단장을 팼다.
퍼퍼퍽! 퍼퍼퍼퍼퍽!
[사디크 성기사단장의 <사디크의 인신 공양> 스킬이 공격을 방어합니다.]
[성기사단장을 감싸는 사디크의 화염이 공격을 방어합니다.]
[사디크의 사악한 갑옷이 공격을…]
[……]
“으. 성기사 놈들은 하여간….”
한 번 때릴 때마다 직업, 장비, 스킬들이 튀어나와서 방어해 준다고 외쳐댔다.
진짜 방어력과 생명력 하나는 끈질긴 성기사!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그 성기사 중에서도 으뜸이니 그 단단함은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뭐 방해하는 놈들도 없을 테니 계속 두들겨 패다 보면 언젠간 죽겠지.’
솔직히 갈르두에 비교하면 훨씬 상대하기 수월한 편이었다.
신성 스킬은 없었지만 무식한 HP 회복력을 가진 갈르두는 때려도 때려도 계속해서 회복했었으니까.
그에 비해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계속해서 때리고 때리다 보면 스킬도 바닥이 날 것이고 언젠가는 최후가 온다!
‘음. 그 전에 토끼로 변신시키고 싶은데 빈틈을 안 보여주네.’
두들겨 맞으면서도 태현과 케인만큼은 확실하게 주시하고 있는 성기사단장이었다.
“으아아아아! 김태현! 절대 널 용서하지 않겠다!”
“지가 소환 잘못해놓고 왜 나한테 저래?”
공격을 막아내던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일 대 다수의 싸움.
약한 고리부터 먼저 쳐서 쓰러뜨려야 했다.
그렇다면….
멀리서 성가시게 구는 궁수! 궁수 직업은 방어력이 낮으니 먼저 쓰러뜨릴 수 있다!
화르륵!
아까 잘려나간 사디크 성기사단장의 팔에서 사악한 형상의 화염 용이 나타났다.
-사디크의 화염 악룡 소환!
“!”
유지수는 아차 싶었다.
태현 일행을 포함해서 많은 인원이 사디크 성기사단장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내버려 두고 그녀를 공격할 줄이야!
‘방심했어! 방심하면 안 됐는데…! 버틸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몇 가지 생각. 그때 이다비가 앞으로 달려 나왔다.
“으아아아!”
무식하게 몸으로 받아내는 이다비!
<아키서스 비전의 성스러운 갑옷>의 성능을 믿고 한 행동이었다.
[아키서스의 화신이 가까이 있습니다. 갑옷의 성능이 올라갑니다.]
[<아키서스의 성스러운 힘>이 공격을 흡수하고 HP를 회복시킵니다.]
[<아키서스의 마법>이 발동됩니다.]
[……]
그러나 사디크 성기사단장이 쏘아 보낸 권능 스킬은 대단했다. 즉사는 피했어도 남아서 온갖 상태 이상을 남겼다.
[사디크의 화염 악룡이 <영원히 불태우는 화염> 저주를…]
[사디크의 화염 악룡이 강한 열로 갑옷을…]
[……]
이다비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직 갑옷에는 남은 스킬들이 있다!
-아키서스의 비전 가호! 아키서스의 비전 축복!
[<아키서스의 비전 가호>가 모든 상태 이상을 해제시킵니다!]
[<아키서스의 비전 가호>가 회복력을…]
[<아키서스의 비전 가호>가 회피력을…]
“감, 감사합니다.”
유지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다비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래도 뭐라도 보답을….”
“골드면 괜찮아요!”
“아하하, 농담도 잘하시는… 농담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