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643화
‘뭐지?’
[떠난 신을 그렇게 불러올 수는 없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신을 잠깐이라도 대륙에 강림시키려면 화신의 그릇이 필요하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화신이라면….’
태현 직업이 <아키서스의 화신>이었다. 사디크 쪽에도 <사디크의 화신> 같은 게 있을까?
혹시 성기사단장이 그런 걸 찾아서 준비했을지도 몰랐다.
“혹시 네가 <사디크의 화신>이냐?”
“뭐, 뭐? 감히 무슨 소리를….”
‘아닌가 보군.’
성기사단장은 그냥 성기사단장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저 알이 <사디크의 화신>인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네 입으로 <사디크의 화신>을 감히 담지 마라!”
“그러면 저건 뭔데?”
태현은 허공에서 불타는 알을 가리켰다. 꿈틀거리면서 신성력을 뿜어내는 것이 보통 불길한 게 아니었다.
“사디크가 오더라도 뭐 육체가 필요할 거 아냐. 저건 뭔데?”
카르바노그는 사디크가 강림하기 위해서는 걸맞은 그릇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성기사단장은 <사디크의 화신>을 준비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어리석기는. 내가 그런 것도 생각 안 했을 거 같으냐? 저건 거인족의 육체다. 가장 튼튼하고 단단한 거인족의 육체! 사디크 님이 강림하더라도 버틸 수 있는 육체지!”
[카르바노그가 아니라고 비웃습니다. 그걸로는 안 된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음… 그래. 네 노력이 장하다.”
어쨌든 간에 사디크 성기사단장이 열심히 노력하는 건 사실이었다.
신성력 높은 곳도 찾아, 거인족도 잡아, 남은 거인족들도 설득해….
저렇게 열심히 하는 NPC가 있었던가?
아키서스 교단의 NPC들은 사디크 성기사단장과 비교한다면 모두 보름달 앞의 반딧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도 허세를 부리는군. 두려운가?”
“솔직히 좀 무서웠는데 괜찮아졌어.”
카르바노그가 말해준 덕분에 공포가 사라졌다. 더럽게 불길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넌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이렇게 쉽게 올 수는 없었을 텐데….”
“아. 얘가 있어서.”
태현은 흑흑이를 가리켰다. 그걸 본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깜짝 놀랐다.
“사디크 님의 마수?!”
-안, 안녕?
흑흑이는 어색한 목소리로 날개를 흔들었다. 흑흑이도 사디크 성기사단장을 대하는 게 좀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사디크 님의 마수가 왜 아키서스 놈을 도와준단 말이냐! 미친 거냐!”
-이, 이 사람도 사디크의 권능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배신자 자식! 과연 블랙 드래곤답구나! 저런 놈을 마수로 받아들여주는 게 아니었는데!”
-뭐… 뭐?! 이런 건방진 놈이! 야, 자기 권능 간수 잘못해서 다른 놈한테 뺏긴 놈이 멍청한 거지!
블랙 드래곤 욕을 하자 울컥한 흑흑이가 이를 갈며 반격했다.
-내가 약속한 건 사디크의 권능으로 날 불러낸 놈한테 충성을 바치겠다는 거였다! 너희들이 멍청하게 굴어서 뺏겨놓고 나한테 뭐라고 하다니!
“뭐, 멍, 멍청? 사디크 님을 모욕하는 거냐?”
-모욕은 무슨! 사실이다 멍청한 놈들아!
“죽여 버리겠다!”
분노한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검을 휘둘러서 사디크의 화염을 쏘아 보냈다.
화르륵!
-내가 할 소리다!
흑흑이는 바로 날아오르더니 화염을 입으로 덥석 삼키고 성기사단장에게 다시 쏘아 보냈다.
“!”
쾅!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옆으로 피했다.
“네… 네놈! 사디크 님의 힘을…!”
사디크 성기사단장도 흑흑이가 사디크의 힘을 받아들이고 급격하게 강해졌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배신자 놈이 사디크 님의 힘을 쓰지 마라!”
-배신자는 누가 배신자냐! 나는 사디크의 마수다!
“사디크 교단의 성기사단장인 나를 거역하는 놈이 무슨!”
-…내, 내 주인이 진짜 사디크의 계승자다! 너는 가짜다 가짜!
말싸움에서 지기 싫었던 흑흑이는 우기기 시작했다. 우기고 보니 의외로 그럴듯했다.
-내 주인은 사디크 교단의 성기사들도 받아들이고 권능도 쓸 줄 안다! 너는 아무것도 없다! 네가 가짜다!
“이… 이놈이….”
태현은 흥미롭게 둘의 말싸움을 지켜보았다.
“흑흑이가 이긴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에도 저 똘똘한 검은 놈이 이긴 거 같다.”
오크 아저씨들과 나머지 일행도 동의하는 상황!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분노했지만 그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이, 이런….”
순간 성기사단장은 거인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이게 뭐라고!
-으음… 우리가 보기에도 저 검은 놈이 이긴 거 같다.
“…저놈들을 전부 죽여라!”
-말싸움에서 졌다고 죽이라는 건가? 대전사. 그건 너무….
“아니다! 이 멍청한 놈들아! 의식을 방해하러 온 침입자 놈들이잖아!”
-아, 그건가.
옆에서 듣고 있던 태현은 대전사를 놀렸다.
“아니야. 저놈은 지금 말싸움에서 진 걸 숨기기 위해서 저러는 거야.”
[최고급 화술 스킬을…]
[……]
-역시… 대전사….
“닥치고 내 말 들어라!”
-알겠다. 간다.
거인들은 몽둥이를 들더니 태현 일행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질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거만함!
확실히 여기 있는 거인들은 바깥 거인들보다 더 강해 보였다.
‘사디크 성기사단장이 여기에 데리고 있는 거 보면 정예는 정예인가 보군.’
이렇게 좁은 곳에서는 싸우기 힘들었다. 태현은 일행들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명령했다.
-일단 거리를 벌려서 유인한 다음 좀 넓은 곳에서 공격을 합시다. 여기서 싸웠다가는 몇 명 죽을 테니까.
거인은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쪼그만 놈들. 대전사가 화내서 어쩔 수 없… 크아아아악!
화르르르르륵!
“?”
태현 일행이 공격을 개시하기도 전에 엄청난 화염이 그들을 덮쳤다.
-으하하핫! 힘이! 힘이 넘친다!
흑흑이였다.
-블랙 드래곤의 힘을 맛보아라! 이 하찮은 거인 놈들아!
허공에서 수십 개의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거기서 어둡고 검은 창이 소환되었다.
-연속 암흑의 창 발사! 암흑 폭발! 블랙 드래곤의 독! 중독 강화! 독 폭풍! 뼈를 깎는 저주, 가죽 약화의 저주….
흑흑이는 평소에 구박받고 살던 서러움을 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수준의 연속 마법을 보여주었다.
허공에 계속해서 마법진이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났다.
뒤에서 보던 정수혁이 감탄했다.
“대, 대단해…!”
“쟤 저렇게 대단한 놈이었냐?”
“아까 뼈다귀랑 투닥거리길래 좀 모자란 놈인 줄 알았는데….”
오크 아저씨들은 놀라워했다. 겉모습만 그럴듯했지 좀 이상한 놈인 줄 알았는데!
덕분에 흑흑이의 어깨는 더욱더 으쓱했다.
-끓어올라라! 사디크의 용암 화살! 사디크의 용암 화살! 사디크의 실명 저주! 사디크의 심장 태우기!
[주변에 모인 사디크의 힘이 반응합니다. 흑흑이의 힘이 더욱 강해집니다!]
[주변에 모인 사디크의 힘이 더욱더 강해집니다!]
‘이거 괜찮은 거 맞나?’
안 그래도 위험해 보이던 알이 더욱더 요동쳤다. 흑흑이가 힘을 쓸 때마다 힘을 빌려주며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이, 이 배신자…! 당장 멈추지 못할까! 너 따위가 감히!”
-흥! 시끄럽다!
흑흑이는 그 말과 함께 거인들을 끝장내버렸다. 동굴 벽이 그대로 무너지며 비틀거리던 거인들을 덮쳐버린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멍으로 떨어지는 거인들!
흑흑이는 어깨를 다시 으쓱거리며 말했다.
-봐라! 이게 내 힘이다! 다시 한번 지껄여봐라!
“사디크 님이 오시면 네놈이 한 짓을 그대로 고발할 것이다!”
-어?
흑흑이는 움찔했다.
그건 좀 위험하다 싶었다.
지금 정예 거인 전사들을 전부 쓸어버린 힘은 엄밀히 따지자면 저기 있는 사디크의 힘이었다.
그 힘을 빌려서 평소에는 쓸 수 없던 고위 마법들을 닥치는 대로 난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디크가 여기 강림하면….
힘을 뺏기는 건 물론이고 방금 했던 일들까지….
-주, 주인님. 어떡하죠?
흑흑이는 으쓱했던 어깨를 내리고 태현을 보며 물었다.
“흑흑아.”
-네?
“거인 잡는 건 좋은데 경험치 공유하게 같이 잡았어야지.”
-지금 그걸 말할 때가…?!
“뭐, 사디크 강림하는 건 솔직히 안 될걸. 걱정할 필요 없다.”
-네? 정말입니까?
“그래.”
“무슨 헛소리냐! 이제 곧 강림하신다.”
“아. 예. 그러시겠죠.”
카르바노그가 말해준 덕분에 태현은 안심하고 있었다.
꿈틀-
콰아아아앙!
[사디크의 힘이 더욱더 강해집니다.]
[신성력을 받아들이고… 사디크가 강림합니다!]
귀를 찢을 굉음과 함께, 화염의 알이 터져나가고 안에 있던 거대한 화염이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그 화염이 거대한 거인의 형체를 이루었다.
거인족보다 두 배는 커다란 모습이었다.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의기양양해져서 외쳤다.
“봐라! 김태현 백작! 사디크 님이 오셨다!”
“?!”
태현은 당황했다. 안 된다며?
[카르바노그가 당황해합니다.]
-야…!
태현은 카르바노그를 저주했다. 이런 원수 같은 신을 봤나!
불의 거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사디크다….
“오오! 사디크 님! 저놈이 사디크 님을 욕보이고 사디크 님의 교단을 무너뜨리고 사디크 님의 권능을 훔쳐갔습니다! 분노의 불로 태워버리십시오!”
‘젠장.’
-나는… 사디크다….
“?”
-나는… 사디크다….
“…고장 났나?”
태현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성기사단장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어디서 건방지게 감히!!”
“아니, 고장 난 거 같은데?”
-나는… 사디크다….
[강력한 사디크의 힘을 알맞지 않은 그릇이 받아서 그런 거 같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네 말은 이제 안 믿어.
[카르바노그가 항의합니다. 한 번 정도는 틀릴 수 있다고…]
-애초에 강림이 실패했어야지, 왜 저렇게 나온 건데?
[그릇으로 삼은 거인족의 육체가 워낙 튼튼하고 강해서 버티고 있는 것 같다고 카르바노그가 추측합니다.]
‘이걸 믿어도 되나?’
태현은 떨떠름했지만 안 믿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카르바노그만큼 신과 신성력과 강림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아니 신도 없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카르바노그는 모르는 척합니다.]
-……
태현은 울컥했지만 참았다. 실체도 형체도 없는 신한테 화내서 뭐하겠는가.
일단 완전하게 소환된 게 아니어서 다행이긴 했다. 완전하게 소환됐으면 바로 태현 일행부터 태워 죽였을 테니까.
그렇지만 저 불완전한 화신도 위협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잡아야 하나? 잡을 수 있을까?’
잡을 수 있는 수준인지를 떠나서 지금 상태가 멀쩡해 보이지 않은데 괜히 먼저 공격하는 게 좋은 선택인지 갈등이 됐다.
“저놈을 죽여주십시오, 사디크 님!”
-나는… 사디크다….
“사디크 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당신을 믿는 제 말을!”
화르륵!
성기사단장의 몸에서 사디크의 화염이 솟구쳤다.
-화염… 내 신자면… 믿어줄 만한….
그 간절한 태도에 사디크의 화신이 고개를 돌려 태현을 쳐다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 없는 시선이 오싹했다.
태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주 보고 외쳤다.
“저놈을 죽여주십시오, 사디크 님!”
“??????”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저 백작 놈이 미쳤나? 사디크의 화신이 그의 말을 들어줄 리가….
화르륵!
태현의 몸에서도 사디크의 화염이 솟구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흑이도 위엄 넘치게 사디크의 화염을 뿜으며 태현의 옆에 섰다.
딱 봐도 겉모습만 보면 태현이 한 수 위!
“이, 이, 이런 미친놈….”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사디크 님… 저놈의 속임수에….”
-으음… 화염… 내 신자… 저건 내 마수가 분명한데….
“놈의 속임수입니다! 들어주십시오!”
그러나 사디크의 화신은 듣지 못했다. 이쯤 되자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깨달았다.
뭔가 잘못됐다!
완전한 화신이 아니라 불완전한 화신이 소환된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후후. 주인님께서는 네 수작을 이미 알아보고 계셨다! 멍청하기는!
기회를 잡은 흑흑이는 신이 나서 성기사단장을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