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637화
태현이 밖에서 철인 3종 경기를 뛰고 있는 동안 판온에서는 여러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왜… 지수가 여기 있지?”
“그, 저번에 잘츠 왕국에서 싸울 때 도와드리려고 갔었는데, 오니까 사라져 있어서….”
유지수는 민망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눈치가 빠른 최상윤은 금방 상황을 알아차렸다.
‘도와주러 갔다가 엇갈렸구나!’
최상윤은 짠하다는 눈빛으로 유지수를 쳐다보았다.
분명 유지수의 스펙만 보면 어디 가서 꿀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는 짓만 보면 뭔가 다 빗나가고 틀어지는 것!
보는 사람을 안쓰럽게 만드는 그런 게 있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둘이 같이 있어도 되나?’
최상윤은 흠칫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 일행에는 이다비가 있었다. 유지수가 이다비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됐다.
‘같은 팀인 건 알고 있겠고, 판온에서 같이 돌아다니는 것도 알고 있겠고… 그거 말고는 모르겠지? 그래도 좋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유지수가 이다비를 질투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지수 쟤가 성격이 나쁜 애가 아니긴 한데… 문제 생기는 건 아니겠지?’
최상윤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유지수를 쳐다보았다. 과연 유지수는 이다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안녕하세요.”
“앗, 네. 안녕하세요.”
‘어라? 의외로 평범하네?’
최상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오해를 한 것일까?
그리고 유지수는 케인과도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예전에 유지수를 본 적이 있었지만, 워낙 장비부터 해서 달라진 게 많았기에 못 알아본 것이다.
찌릿-
“?!”
최상윤은 분명히 보았다. 유지수가 순간 케인에게 질투와 경계의 눈빛을 보낸 것을.
‘그, 그쪽?’
아니, 물론 방송이나 대회를 봤을 때 태현하고 가장 붙어 있는 게 케인이긴 한데…!
* * *
“좋아, 가자!”
김태산은 호쾌하게 외쳤다. 태현은 없었지만 이 파티 구성으로도 충분히 무서울 게 없었다.
파티원 전원이 최소 랭커급 플레이어!
원래 직업 조합이 개판이었던 태현 일행과 달리, 김태산이 데리고 온 아저씨들 중에는 힐러 역할인 오크 주술사도 있었다.
“자이언 산맥에는 거인족 몬스터가 나온다고 했지?”
“대형 몬스터는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탱커가 열심히 해야겠군.”
플레이어의 덩치보다 몇 배는 커다란 대형 몬스터.
이런 대형 몬스터는 상대할 때도 조심해야 했다.
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아요, 압니다. 제가 앞에 나서서 다 끌어들일 테니 걱정하지 마십쇼. 버티면 되잖….”
“무슨 소리야?”
“왜 혼자서 하려고 해? 나도 있는데. 같이 하면 되지.”
오크 아저씨들은 케인을 이상한 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탱커 여럿이서 부담을 나눠 가지면 되지, 굳이 앞에서 혼자 두들겨 맞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
케인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구나! 같이 하면 되는구나!
그걸 깨닫자 새삼스럽게 감동이 느껴졌다. 그가 이제까지 얼마나 난이도 높게 판온을 한 건지도!
“크흑…!”
“얘, 얘 왜 이래?”
“태현이가 그러는데 약간 좀 이상한 애래.”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크 아저씨들은 친절했다. 조금 이상하다고 해서 물러서지는 않았다.
“녀석. 기가 많이 허한가 보구나. 이거라도 좀 마셔라.”
“!”
케인은 감동 받은 얼굴로 유리병을 받았다. 유리병에는 아주 시커먼 액체가 들어 있었다.
원래라면 의심을 했겠지만 평소와는 다른 따뜻한 아저씨들의 모습에 케인은 뭔지도 확인하지 않고 덥썩 받아 마셨다.
꿀꺽꿀꺽-
“크헑얽러걹럵?!”
“어허! 그거 귀한 거야! 뿜으면 안 돼!”
“이 녀석!”
오크 아저씨들은 재빨리 케인을 붙잡고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뱉으려던 케인은 강제로 삼켜야 했다.
[<차마 알려줄 수 없는 재료로 만든 오크식 강장 음료>를 마셨습니다.]
[일시적으로 체력이 크게 오릅니다.]
[일시적으로 물리 방어력이…]
메시지창을 보니 분명 나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차라리 독이 더 낫겠다!’
독을 마셔본 적이 있었지만 이것보다는 훨씬 맛이 괜찮았다.
“대체 뭡니까 이게!”
“좋지? 든든하고?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더 달라고 욕심부리지 마라.”
“누가 더 달라고….”
“더 달라고? 이런, 정말 주기 싫지만… 쪼잔하게 굴기는 싫으니까. 어쩔 수 없군. 자, 한 잔 더 해라. 이건 더 찐한 거야.”
“으어억! 야! 구해줘!”
케인은 저항하려고 했지만 오크 아저씨들의 힘 스탯은 장난이 아니었다.
여럿이서 붙잡으니 밀칠 수가 없었다.
획-
최상윤과 정수혁, 이다비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유지수도 마찬가지!
“태현이 친구라고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아저씨, 그건 좀….”
김태산의 말을 들은 최상윤은 질색했다. 김태산은 100% 진심 같아 보였던 것이다.
뒤에서 오크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셔라, 케인! 운명을 손에 넣어라!
“농담하시는 거죠?”
“농담 아닐걸요.”
이다비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파워 워리어 길드의 길마인 그녀는 김태산의 영지 상황도 잘 알고 있었다.
태현의 영지가 각종 호화로운 재료를 마음껏 쓸 수 있는(물론 태현의 돈으로) 요리사들의 천국이라면….
김태산의 영지는 괴식 요리에 눈을 뜬 미친 요리사들의 지옥이었다.
스타우에게 배운 괴식 요리사들이 와서 하나둘씩 요리를 퍼뜨리고, 요리에는 관심이 없던 오크 아저씨들도 ‘어? 건강에 좋은 거라고?’ 하면서 점점 빠져든 결과….
지금 영지에서 볼 수 있는 요리의 90%는 괴식 요리였다.
주현영 같은 양심적인 정상적인 요리사가 있긴 했지만 그 숫자가 너무 적었다.
덕분에 김태산의 영지에서 터져 나오는 주요 불만은 바로 음식이었다.
-세상에 살다 살다 밥맛없어서 못 버티겠는 영지는 처음 본다! 뭐 이런 곳이 있냐!
-여기 NPC들 대부분이 오크였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함. 오크 놈들 진짜 혀 이상한 거 아님? 아무리 그래도 좀 음식은 먹을 만한 걸 설정했어야지 오크 놈들 맛있게 먹어서 나도 먹어봤는데 토하는 줄 알았다. 이게 말이 되냐?? 판온 제작진은 오크 종특 좀 수정해라!
-진짜 다 좋은 곳이에요, 지원 빵빵하고 길드원 아니어도 차별 안 하고… 그렇지만 음식은 밖에서 대량으로 구매해서 오세요! 내가 진짜 <싸구려 검은 빵>을 초보자 때 말고 다시 먹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초보자 때나 먹는, <싸구려 검은 빵>. 정말 딱딱하고 별맛 없어서 억지로 먹는 그런 음식이었다.
그런데 영지에서 온갖 괴식 요리를 먹다 보면 그 빵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물론 불만을 토해내는 플레이어들도 영지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것만 빼면 워낙 영지가 좋았던 것이다.
결국 플레이어들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였다.
괴식 요리가 아닌 요리를 찾는 것.
밖에서 요리를 사 오거나, 아니면 주현영 같은 요리사를 찾아서 긴 줄 뒤에 서서 오래 기다렸다가 요리를 사 먹거나 하면 됐다.
그리고 다른 길은….
괴식 요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왜 괴식 요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어휴. 이래서 맛알못들은.
-괴식 요리는 요리의 혁명이라니까? 현실에서도 냉면밥이나 김치피자탕수육 같은 거 있잖아. 괴식 요리는 이전 요리의 한계와 고정관념을 깨는….
-지X마 미친놈들아!
-괴식 요리 잘못 먹고 정신 나갔냐!
괴식 요리에 중독되어버린 플레이어들은 물귀신처럼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실로 무서운 전파력!
‘파워 워리어 길드에도 유행이 부는 것 같아서 불안해….’
이다비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이다비는 기겁해서 말렸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요리를 만들어서 팔아야 하는데 괴식 요리를 팔았다가는 당장 멱살 잡힐 것이다.
“으으으… 으으으으….”
세 잔을 원샷하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던 케인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왔다.
케인이 원독 서린 눈빛으로 일행을 쳐다보았지만 모두가 시선을 피했다.
“나쁜 놈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몸에 좋은 거 아니었습니까?”
“김태현한테 그런 것만 배우고 말이야! 어! 이 나쁜 놈들 같으니. 너희 그렇게 살면 하늘에서 벌 받는다!”
슝-
그 순간 케인 주변에 그림자가 생겨났다.
“……?”
“위, 위!”
최상윤은 기겁해서 손가락질했다. 케인은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집채만 한 바위가 날아오고 있었다.
“으허억! 왜 나한테!”
“네가 제일 시끄러워서 그런 거 아냐?”
콰아앙!
케인이 방금까지 있었던 자리를 바위가 찍고 지나갔다. 1초만 늦었어도 그대로 맞았을 것이다.
“어디서 던진 거지? 안 보이는데?”
“일단 거리를 벌려! 괜히 뭉쳐 있다가 크게 맞겠다!”
[<회색 늑대의 정령 함성>을 사용했습니다. 파티의 이동 속도가 일시적으로 향상됩니다.]
[<오크 투사의 지휘>를 사용했습니다. 파티의 이동 속도가…]
김태산이 스킬을 사용하자 전원에게 버프가 들어갔다. 지휘관 직업다운 스킬들이었다.
“저 산 위쪽에 거인입니다!”
“!”
-쪼그마한 침입자, 쪼그마한 침입자다!
-바위, 바위 던져라!
쿵, 쿵, 쿵-
위에서 거대한 거인들이 얼굴만 내밀고서 바위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쏴! 견제해!”
김태산은 일단 위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할 곳을 찾았다.
지금 길은 좁고 일직선이어서 위에서 공격이 날아오면 일단 맞아야 했다.
-노예의 쇠사슬!
“?”
케인은 고개를 내민 거인을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촤라락하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정확하게 적중했다.
그러자 그 거대한 덩치가 위에서 아래로 바로 끌려왔다.
콰아앙!
-으아악, 아프다! 아프다! 쪼그마한 놈!
“시끄러워! 야! 공격을 안 멈추면 동료를 죽이겠다!”
쓰러진 거인을 향해 달려간 케인은 무기를 겨누며 외쳤다.
그걸 본 김태산은 놀랐다.
“우와, 저 녀석 대단한데?”
그렇지만 다른 일행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케인 씨가?’
‘케인이 저런 플레이도 할 줄 알았나?’
‘서당개 삼 년이면….’
“공격 멈추라니까! 동료를 죽여도 되냐!”
케인은 위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태현이 하는 짓을 보며 배운 게 있었기에 해본 것이었는데, 하고 나니까 은근히 그럴듯해 보였다.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나 지금 좀 멋있는 플레이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화술 스킬이 낮습니다. 설득에 실패합니다.]
[회색 바위 부족 거인들이 분노합니다.]
-쪼그마한 놈, 쪼그마한 놈. 어디서 협박이냐!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하지 않겠다!
“앗….”
케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짓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슈우우우우웅-
이제까지 날아오던 것보다 두 배는 많아 보이는 바윗덩이들!
“으아아! 김태현은 대충 입 놀리면 애들이 알아서 움직여주던데!”
“케인 이 자식! 감탄한 거 취소야!”
일행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래로 달리기 시작했다.
유지수는 활을 꺼내 화살을 여러 개 장전했다. 그리고 쏘았다.
[먼 거리에서 상대의 급소를 정확하게 꿰뚫는 데 성공했습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궁술 스킬이…]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으악, 으악! 너무 아프다!
거인의 눈만 족족 쏘아대자 거인들은 감히 고개를 내밀지 못하고 물러섰다.
덕분에 바위세례도 일단 멈췄다.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이야, 저기서 저걸 맞추네.”
“대단해!”
“케인보다 낫네!”
“크흑….”
케인은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늘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