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될놈이다-631화 (631/1,826)

§ 나는 될놈이다 631화

“썼군.”

“…….”

이세연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렇지만 태현과의 대화에서 이런 침묵은 인정이나 다름없었다.

이세연은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안, 안 썼거든.”

“안 썼다고 말해도 본선 1차전부터는 방송 나오는 거 알지?”

“너 다른 팀들 방송은 보지도 않을 거잖아.”

“아, 아니거든.”

“…….”

“…….”

서로 잠깐 침묵하고 나서, 태현은 입을 열었다.

“어쨌든 폭탄을 쓰긴 썼다 이거지? 이야. 생각보다 사람이 추하네요. 남의 아이템 사서 깼으면서….”

“쓸… 쓸 수도 있지! 너도 언데드 소환 스킬 썼잖아!”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세연은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우길 수밖에 없었다.

“어라? 언니. 그런데 남이 만든 아이템을 사서 쓴 거랑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스킬을 쓴 건 경우가 다르지 않나요?”

옆에서 듣고 있던 보라가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냉정한 지적이 가능!

이세연은 아픈 곳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태현은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뭘 좀 아는군. 그런데 그쪽은 누구지?”

“…파이브 걸즈의 보라잖아…!”

하연은 이를 갈며 말했다.

태현이 요즘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그렇지, <파이브 걸즈>도 요즘 만만치 않게 잘나가는 아이돌이었다.

심지어 같은 회사 소속!

그런데 저렇게 ‘너희는 누구니?’ 같은 태도로 나오니 열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이래서 세연 언니가 저 자식 이름만 말하면 화를 내는 거구나!’

뒤늦은 깨달음!

하연은 왜 이세연이 태현 이름만 나오면 유치해지는지 알 것 같았다.

“아, 걸즈 파이브의 음… 레드?”

“보라!!”

“심지어 그룹 이름도 틀렸어.”

이세연은 옆에서 중얼거렸다. 저거 일부러 틀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태현의 얼굴을 보니 정말로 헷갈리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다른 데에는 엄청 머리 굴리면서 자기가 관심 없는 부분은 무슨….’

“그래, 그래. 보라. 알고 있었어. 어쨌든 간에 이분이 아주 맞는 소리를 하네. 이세연은 내가 만든 아이템을 사서 잘난 척을 했고, 나는 이세연한테 받은 거 하나 없지. 그 차이가 아주 크다고.”

“네, 네가 만든 게 아니라 그 영지에 있는….”

“걔네들한테 물어봐라. 걔네들이 누구 제자인지.”

태현은 뻔뻔하게 그렇게 말했다.

제자라고 해놓고 딱히 가르쳐준 건 별로 없긴 했지만, 대장장이들은 태현을 스승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사람이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말이야. 그렇죠?”

마지막 말은 보라에게 한 말이었다. 보라는 당황해서 하연 뒤로 숨었다.

“……?”

“겁이 좀 많은 애야.”

“……!”

태현은 보라가 왜 겁을 먹었는지 깨달았다. 태현의 얼굴을 보고 겁을 먹은 것이다.

옆에서 이세연이 고소하다는 듯이 웃었다. 태현이 이세연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너 대회 때 두고 보자.”

“설, 설마 파는 폭탄에 무슨 짓을 하려고? 난 이미 다 구매했으니까 의미 없는 짓이야.”

“그런 얕은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좋은 아이디어긴 하네. 앞으로 참고하지.”

“…….”

원래 다른 사람들이 ‘두고 보자’고 하면 별로 안 무서웠지만, 태현이 ‘두고 보자’고 하면 정말로 무서웠다.

결국 이세연이 한 발짝 양보했다. 한번 마음먹으면 정말 끝을 모르고 날뛰는 태현과 달리, 이세연은 양심과 상식이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리 정정당당하게 하자.”

“그래. 그래. 물론이지.”

“…내가 뭘 해야 화를 풀래?”

“과거로 돌아가서 나한테 문자를 보내는 널 쏴.”

“그런 말도 안 되는 거 말고!”

* * *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즘 가장 뜨거운 아이돌 <파이브 걸즈>의 두 분, 그리고 가장 뜨거운 프로게이머 두 분을 모셨습니다! 이렇게 모시기도 쉽지 않은데, 저희 프로그램이 참 뜨긴 떴어요!”

MC의 소개와 함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능숙한 말솜씨에 방금까지 싸웠던 태현과 이세연도 작게 웃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 우리 두 분은 다른 의미로 뜨겁던데요?”

“?” “?”

“프로게이머 선남선녀 커플로 말이에요! 하하하!”

‘죽여 버릴까?’

‘죽여 버려야지.’

꽉-

하연과 보라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태현과 이세연의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것을!

‘무서워!’

“두 분의 인연은 판온 1 때부터라고 들었는데, 역시 싸우다 보면 정이 드는 건가요?”

“아… 하하하. 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이세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모습에 태현은 감탄했다.

과연 연예인은 다르구나!

태현 본인이었다면 ‘오냐 내가 널 팰 테니까 어디 한번 정 드나 봐라!’라고 했을 테지만, 이세연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넘기고 있었다.

솔직히 존경심이 드는 프로 의식이었다.

물론 이세연은 이세연이고 태현은 태현이었다.

“네? 전 정 안 들었는데요.”

“…….”

이세연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MC는 폭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이세연 씨만 일방적으로 정이 드신 건가요?”

“까득… 아뇨. 까드득. 말만 이런 거지 카메라 안 돌아가면 친하게 지내요.”

“아닌데? 무슨 소리야? 정은 무슨 정?”

“아하하하. 농담도 적당히 해.”

이세연은 태현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서로 장난치는 친근한 사이로 보였다.

콰직!

‘와우.’

태현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손톱에 살기를 담아서 찌르고 있었다.

‘무슨 암살술이냐?’

‘너는 아프지도 않아?!’

‘하하. 내가 운동 한 게 몇 년인데 이거 가지고 그러겠어?’

양성규의 체육관에서 어렸을 때부터 온갖 고통을 다 겪은 태현에게 있어서 이 정도 고통은 엄살떨 정도도 되지 않았다.

“휘이익, 두 분. 여기 와서까지 그렇게 뜨거우시면 안 됩니다! 저희는 그런 프로그램 아니에요!”

MC의 말에 이세연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놓았다.

태현이 헛소리만 안 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안 갔을 텐데!

“자, 저 아름다운 섬의 풍경을 보십시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으십니까?”

“두근거리기는 무슨, 고생만 잔뜩 할 텐데….”

“대체 이런 섬들은 어떻게 계속 찾아내는 거예요?”

MC의 말에 고정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투덜거렸다.

태현은 뒤에 펼쳐진 섬을 훑어보았다. 아름답기는 했지만 확실히 여기서 1박 2일을 보내려면 고생은 고생일 것 같았다.

‘뒷산을 보니 가파르고 울창하니 저기서 움직이려면 고생 좀 할 거 같고… 날씨도 쌀쌀한 편이니 자는 것도 귀찮겠네.’

게다가 <생존의 법칙>은 제작진이 짜증 날 정도로 출연자들을 굴리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냥 여기서 버티는 것도 힘들었지만 추가로 미션들까지 내주는 것!

‘아까 스태프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저 산에 동물도 좀 푼 것 같던데. 설마 잡아서 먹으라고 하려나?’

태현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어서 짐작만 했지만, 실제로 예전 방송에서 몇 번 있었던 것이다.

‘저것 봐. 당황했네. 귀여워라.’

‘처음 출연하면 어쩔 수 없지. 낄낄. 이해한다.’

신연주와 MC는 기분 좋게 웃으며 태현을 쳐다보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당황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판온 대회나 방송에서는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태현이 저렇게 당황하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원래 처음 나오는 이상 어리바리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

그에 비해 고정 출연진들은 경험이 많아서 한층 여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도 힘들고 빡센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경험을 몇 번 해봤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흥. 두고 보자. 이따 시작만 하면 망신을 줄 테니.’

최창성은 태현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초대받은 게스트들을 은근슬쩍 골리는 것도 이 프로그램의 재미 중 하나!

물론 심하지 않게 장난 수준으로 하는 정도였지만, 최창성은 이 기회를 잘 살려 태현을 망신을 줄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질투가 나는데 이세연 같은 미녀와 저렇게 친하게(최창성이 보기에) 노는 걸 보니 더 배가 아팠다.

촤아아악-

PD와 스태프들이 모래사장에 이것저것 잡동사니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태현이 그걸 보고 물었다.

“저건 뭐야?”

“…제발 출연하는 프로그램 한 편 정도는 보고 오자. 이거 시작하기 전에 고르게 해주는 거잖아.”

톱, 망치 같은 공구 세트들부터 라면이나 쌀 같은 먹을 것까지. 종류별로 다양했다.

‘아하. 여기서부터 잘 골라야 한다 이거군.’

태현은 금세 알아차렸다. 딱 봐도 쓸모가 적어 보이는 양초나 넥타이 같은 물건들.

저건 꽝이었다. 케인이나 고를 물건!

시작부터 저런 걸 잡고 시작하면 일이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뭐가 좋아 보여?”

“흠….”

“역시 인스턴트 같은 게 편하겠지?”

이세연이 가리키며 물었다. 태현은 고개를 저었다.

“왜?”

“라면 별로 안 땡겨.”

배부른 태현의 소리에 이세연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지금 땡기고 안 땡기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아니, 억지로 먹어야 해? 며칠 전에도 먹었다고.”

“애초에 저거 가져오고 싶다고 가져올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 저 사람들 이겨야 해. 우리 넷이서 전략을 잘 짜야….”

“김 PD. 그래서 이번에는 종목이 뭐야?”

MC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언제나 귀찮은 미션과 종목으로 출연진들을 괴롭게 만드는 PD였다.

“이 날씨에 수영 같은 거 시키기만 해봐. 절대로….”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새로 온 분들도 많으니 처음부터 힘 뺄 생각 없습니다. 처음은 바로… 퀴즈입니다!”

“?”

“퀴즈면… 다행인가?”

다들 놀란 얼굴이었고, MC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주 너 퀴즈 잘 했니?”

“전혀… 창성이 너는?”

“저, 저도 퀴즈는 좀.”

“그나마 춘식이인가.”

“춘식이가 공부를 좀 하긴 하지. 저쪽은….”

MC는 힐끗 시선을 돌렸다.

태현, 이세연, 파이브 걸즈의 하연과 보라.

제일 똑똑해 보이는 건 역시 이세연이었다.

이세연이 방송을 시작할 때, 학력 좋고 얼굴 되고 게임 실력까지 되는 걸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너무 압도적으로 불리한데?”

“맞아. 몸을 쓰는 걸 해야 좀 나은데.”

“김 PD! 이거 너무 차이 나잖아! 우리도 저런 브레인 하나는 붙여 줘야지!”

상황을 깨달은 MC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약간 억지 같아 보여도 이런 걸 기분 나쁘지 않게 해내는 게 그의 능력이었다.

“우리라뇨, 벌써 팀이 갈렸나요?”

“그런 것 같은데?”

“에이, 새로 오신 분들이랑 원래 있던 분들이랑 나뉘어서 팀 맺은 거면 저쪽이 불리할 텐데, 그 정도 핸디캡은 감수하세요. 아니면 좀 섞든가. 그러실래요?”

PD는 영 밸런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이세연한테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러나 이세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희는 괜찮아요.”

“한 명도요? 너무 불리하실 텐데.”

“전혀요.”

“앗. 그러면 나 가도 되나?”

태현의 물음에 이세연은 살기 섞인 눈빛으로 대답했다.

‘와, 카메라 안 잡히는 각도에서 노려보는 거 봐.’

그러나 MC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거 퀴즈는 너무 불리하잖아. 우리 하나도 못 맞추면 어떡해?”

“그러면 어떻게 하자구요?”

“이세연 씨만 빼줘! 그러면 나중에 다른 미션 할 때 우리도 한 명 뺄게!”

그 말에 이세연은 고민했다. 딱 봐도 그녀들이 불리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빠지면… 하연이나 보라가 잘 맞출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이세연은 빤히 태현을 쳐다보았다.

“뭘 봐?”

“네가 퀴즈를 잘 했었나?”

저번에 퀴즈 방송에서 다 맞추긴 했지만 그건 대부분 판온 관련 문제였다.

“찍기는 잘 하지.”

“…그냥 내가 해야겠….”

이세연은 마음을 바꿔 그냥 진행하자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와 태현이 이야기하는 사이 PD와 MC는 이야기를 끝내고 있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아차. 늦었다!’

이제 태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