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611화
“어떡하지? 어떡하지??”
“진정해. 지금 당황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잖아. 사실 던전 공략하는 건 기본기만 탄탄하면 연습은 금방 할 수 있어. 사실 연습보다는 평소 실력이나 운이 더 필요하기도 하고.”
던전을 공략하는 데 필요한 능력은 다양했다. 레벨, 장비, 판단력, 협동심, 파티원 등.
이런 것들만 미리 갖추고 있으면 수십 번 던전 공략을 연습한 팀과 그리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원래라면 하나의 팀으로 던전을 수십 번 공략하며 철저하게 합을 맞춰온 팀이 유리하겠지만….
대회에서의 던전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랜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케인은 전혀 진정하지 않았다.
“난 평소 실력이 없는데!”
“…그, 그래.”
지나치게 솔직한 케인의 반응에 최상윤도 당황!
사실 케인이 이렇게 당황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태현이야 원래 자신감 빼면 시체였고, 정수혁은 ‘선배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겠지!’란 생각이었고, 최상윤은 태현 파티에 합류하기 전에는 혼자 돌아다니며 온갖 던전을 깬 경험이 있었지만….
케인은 원래 PVP를 주로 뛰던 플레이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던전을 아예 안 깬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한 편이었다.
“일단 장비나 고르라고. 알겠지?”
* * *
‘그렇지만 대회를 생각하면 일반적인 갑옷보다는 좀 다른 걸 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지금 갑옷도 잘 쓰고 있는 데다가, 태현에게는 방어력이 필요한 경우가 적었던 것이다.
압도적인 행운 스탯과 회피율을 뚫고 들어올 만한 몬스터는 소수였고, 그런 몬스터를 대비하기 위해 방어력을 높이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보다 레벨이 낮은 태현의 약점은 바로 최대 HP였으니까!
차라리 공격하기 전에 먼저 잡거나 회피할 다른 수단을 만드는 게 좋았다.
‘던전 대회에서는 온갖 아이템 사용이 가능하니… 기상천외한 짓들이 나오겠지.’
참가할 정도면 기본적인 실력은 모두 확보된 팀일 터.
거기서 어떻게 더 시간을 단축시키는지도 승부의 요소겠지만, 누가 더 숨겨진 수를 많이 갖고 나오느냐도 승부의 요소!
‘32개의 팀이 토너먼트식으로 진행되니까, 결승까지 간다고 쳤을 때 던전 공략을 5번은 해야 하지. 특수 아이템이 있어도 팍팍 쓰지는 못할 거야.’
포션이나 각종 소모성 아이템 사용이 가능하지만, 던전 대회는 한 번 하고 끝나는 대회가 아니었다.
이기고 올라가면 다음 팀과 다시 시간 기록을 겨루는 것이다.
전략적인 아이템 사용이 필요!
‘오리하르콘 화살이 딱인데.’
즉사 스킬이 드문 판온에서, 태현은 <오스턴 왕가의 오리하르콘 석궁>이라는 사기적인 무기를 갖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행운 스탯이 높은 태현에게만 사기적인 무기!
아쉽게도 창고에는 오리하르콘 관련 아이템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챙겨볼까….’
* * *
“이제 곧 대회군요.”
“그래. 다들 열심히 뛰고 있네.”
최명성 팀장은 커피를 홀짝이며 화면을 쳐다보았다.
판온의 곳곳에서 대회를 준비하는 팀들이 눈에 들어왔다.
윤주환은 상사를 보며 물었다.
“사내에 소문이 돌던데, 회사에서 이번 대회에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고….”
“기대할 만하지. 그럴 만한 대회잖아. 한국에서 열렸던 게 컸어.”
공식으로 진행된 게 아닌, 한국의 한 방송사가 맡아서 진행한 투기장 대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관심을 끌어모은 대회였다.
-한국의 작은 방송사가 진행을 맡았는데도 이 정도라면, 공식 진행으로 하면 대체 어느 정도의 반응이 나올 것인가?
“팀장님은 뭐 들으신 거 없어요?”
“뭘? 대회 구성? 구성이야 너도 알고, 던전이야 나도 모르지.”
판온 직원들 사이에서는 가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일자리’라는 농담이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판온 내부 일은 판온 AI가 알아서 하니 직원들이 할 일이 없는 것!
물론 농담이었다. 그것 말고도 할 일은 많았다.
이번 대회 던전도 AI가 알아서 맡아서 짜게 되어 있었다.
“아뇨. 그거 말고요. 이번 던전 대회에 참가하는 팀들 중에 누가 이길 거 같은지….”
“너도 참 쓸데없는 걸 궁금해한다. 그거 듣는다고 의미가 있냐? 다 한가락 하는 팀들이니 누가 이길지 알 수 없지.”
“김태현 팀도요?”
“팀 KL? 김태현이 대단하긴 한데… 음. 글쎄다. 워낙 변수가 많아서.”
최명성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팀원들도 탑급 랭커들과는 거리가 멀고… 다른 대형 게임단들은 프로 감독, 코치 불러서 훈련하고 있잖아. PVP 형식의 대회라면 김태현이 어떻게든 끌고 가겠지만 던전 공략이라면 김태현도 힘들지 모르지.”
“확실히 들어보니 팀 KL은 우승 후보와는 거리가 머네요.”
“아니. 거리가 멀다는 건 아니고 그냥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아. 네.”
우승 후보와 거리가 멀다고 하니 정색하는 상사를 보며 윤주환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현은 지금쯤 바쁘겠군. 다른 선수들과 달리 게임단 관리도 직접 고민해야 할 테니까.”
* * *
-프로스다스 쪽으로부터 정식 스폰서십 제안이 왔다. 그리고 몇 군데 더 온 곳이 있는데, 여기는 일단 보류하자. 지금 신생이라고 대충 찔러보는 느낌이야.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같은 느낌?
-네. 저도 그렇게 급한 건 아니니까 일단 프로스다스 쪽 제안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냐? 내가 찾아보니 이번 해에 대회가 이것저것 많던데.
정 변호사에게 전화를 받은 태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물, 물론이죠.
-그러냐? 하긴 게임은 네 전문이니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정 변호사가 보기에, 팀 KL 쪽으로 스폰서십 제안은 더 올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게임단에 비해 규모도 작고 새로 생긴 만큼, 적은 비용으로 광고 효과를 누리려는 기업들이 탐을 낼 것이다.
이런 제안들은 잘 걸러내야 했다.
-어? 유성에서도 게임단을 만든다네. 저 친구 너랑 사귄다는 그 친구니?
-…네??
태현은 뭔 개소린가 싶었다. 순간 확 와닿는 게 있었다.
설마…!
태현은 전화를 끊고 TV 화면을 켰다.
-이번 유성 프로게임단 부활 소식을 두고 많은 팬들이 환호성을….
-유성 프로게임단이 정말 준비를 착실하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활 소식과 함께 발표한 내용을 보면 ‘요즘 판온이 인기니까 다시 만들어보자’ 같은 안일한 기획이 아니에요. 판온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기획입니다. 예전 유성 프로게임단 팬들은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만 간다면 저번처럼 허무한 성적을 내지는 않을 겁니다.
-이세연 선수를 주장으로 모셔온 것도 그렇습니다. 지금 판온에서는 탑급 선수 중 하나거든요. 사실 전 김태현 선수와 이세연 선수가 같은 팀에서 뛰는 걸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그랬다면 적이 없었겠어요.
-하하. 물론 해외의 다른 선수들도 뛰어난 선수들이 많지만 정말 대단하기는 했을 것 같….
‘이거였군.’
이세연이 왜 의미심장하게 ‘후후 나중에 널 놀라게 해주지’ 같은 눈빛으로 쳐다봤는지 알 것 같았다.
게시판을 보니 벌써 이번 발표 소식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해외 게시판에서도!
그만큼 이세연의 이름이 대단했던 것 같았다.
-유성 게임단이 뭐하던 게임단이야?
-그, 예전에 성적 너무 안 좋아서 해체됐던 곳 있어.
-유성 까지 마라! 성적은 안 좋았지만 팬 서비스는 좋았다고!
-근데 김태현은 섭외 안 했나? 둘이 같이 뛸 줄 알았는데.
-소문에 김태현이 자기가 직접 팀 이끌고 싶어서 제안을 거절했다던데.
-그게 말이 돼? 왜 사서 고생을.
-맞아. 그냥 헛소문이겠지.
‘진짠데….’
그렇게 이상한가? 태현은 괜히 떨떠름해졌다.
“들었냐!? 이세연이, 이세연이!”
“들었어.”
“들었습니까?!”
“들었다고.”
“들었….”
“아, 들었다고!!”
차례대로 호들갑을 떠는 팀원들을 보며 태현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뭐가 중요해!”
“아니… 엄청 무섭잖아.”
“그리고 넌 이세연한테 진 적도 있고.”
“……!”
케인은 기겁해서 최상윤을 쳐다보았다.
‘한 대 맞으려고 작정했나?’
물론 태현은 최상윤을 치지 않았다. 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라? 저 정도는 괜찮나? 나도 저 정도는 해도 되나 보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걱정 마. 이세연 빼고는 별 볼 일 없을 테니까.”
최상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세연이 별 볼 일 없다는 소리는 안 하는군.’
“그런데 목록에 류태수 선수가 있네요.”
“류태수 선수라면….”
태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원래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류태수는 기억하고 있었다.
투기장 대회에서 만난 팀 에이트의 주장!
물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판온 1때부터 태현의 광팬이었다는 점이었다.
태현이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진짜 김태현의 팬이다!’라고 했다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둘!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네.’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김태현 선수셨군요, 그, 팬이었, 죄송, 으. 어….’, ‘아, 네. 괜찮….’ 같은 말만 반복해야 했던 그 순간!
아무리 태현이라도 그의 팬에게 모질게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단 실력은 괜찮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태현 님 못 넣었다고 대체로 넣은 거 아닐까요? 스타일 비슷하니까.”
“그건 그거대로 기분이 좀….”
태현은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아니 대체할 게 없어도 뭘 그런 걸 대체해?
하지만 이세연의 기분에 비하면 그건 복잡한 수준도 아니었다.
* * *
“저기, 주장님. 김태현 선수는 어떻습니까?”
“여기서 김태현 선수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다고 보십니까?”
“저번에 김태현 선수하고 같이 방송에 나가셨던데….”
“이거 잡지 사진 찍을 때….”
‘죽일까?’
이세연은 솟구치는 살의를 삼켰다.
팀의 주장이라는 건 정말 쉬운 게 아니구나!
사실 류태수는 좋은 선수였다. 성실하고, 기본적인 능력 있고, 지시를 잘 따라주고…
게임단 팀원으로서 중요한 건, 게임 실력도 실력이지만 개인으로서의 인성과 팀워크였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팀워크가 안 맞으면 위험!
투기장 대회 때 도동수(그리고 김태현)를 보며 그걸 뼈저리게 느낀 이세연이었다.
그런 면에서 류태수는 나름 한 팀의 주장이었는데도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거나 하지 않고 이세연의 명령을 잘 듣고 있었지만….
그녀를 너무 귀찮게 만들었다.
시간만 되면 쪼르르 와서 ‘김태현 선수는 어땠나요?’라고 묻는 것!
이쯤 되자 김태현이 매수한 첩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얘는 왜 여기 없어도 나를 화나게 만드는 거지?’
만약 태현이 꾸민 거라면 솔직히 감탄할 수 있을 것 같다!
* * *
“응? 이세연이 문자 보냈네?”
“이번 발표 관련 문자에요?”
“아니. 그냥 ‘네가 시켰지?’라는데?”
“뭘?”
“음.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 일단 아니라고 해야지.”
뭔지 모를 때는 일단 부정하고 본다!
“좋아.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모두 캡슐로 가자. 다음 퀘스트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이번에는 정말 던전 돌면서 합 맞춰보자고.”
“예!”
“좋지!”
각자 흩어져서 캡슐로 향하는 도중, 케인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이세연이 찾아왔을 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온 게 분명….
‘그러고 보니 저번에 다른 놈들 던전 빌린다고 하지 않았나?’
오싹!
지금 생각하니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