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610화
그렇다고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용히 태현에게서 거리를 벌린 플레이어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야. 너희 계속 아키서스 교단 있을 거냐?”
“음… 잘 모르겠는데….”
“김태현이 나중에 찾아오면 어떡하지?”
“어차피 이제 김태현도 안 보이고, 설마 교단 나간다고 김태현이 우리를 추적해서 찾아오겠어? 김태현이 얼마나 바쁜 놈인데.”
“맞는 말이다.”
크로포드는 대화에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아까 플레이어들이 삼삼오오 흩어져서 떠날 때 크로포드는 이 일행을 따라왔었다.
이유는 하나!
써먹기 위해서였다.
‘아키서스 교단을 나가고 싶은데… 페널티가 신경 쓰인단 말이지….’
다른 교단과는 확실하게 다르다는 게 알려진 지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말 한 번 안 들었다가 비싼 마법을 날려 버릴 정도라면, 교단을 나갈 경우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역시 이런 건 자기가 하는 것보다 남한테 시키는 게 제일!
사실 앨콧을 꼬셔볼 생각이었는데, 그건 포기했다.
-싫, 싫어.
-너 김태현한테 쫄았냐?
-아, 아니거든?
-그러면 나가자니까.
-아! 싫다고! 저리 가라고!
이쯤이면 되겠지 도발했는데도 한사코 거절하는 앨콧!
크로포드도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놈들을 꼬드겨서 실험해 볼 수밖에.
“김태현이 얼마나 바쁜데 이걸로 쫓아오겠냐?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크로포드가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포드의 이름도 있지만, 그들 모두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한 번 탈퇴해 보라고.”
“그래. 그래.”
크로포드의 속셈을 눈치챈 플레이어들은 가장 둔한 한 명을 집중적으로 노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되나 실험해 볼 생각!
“좋… 좋아. 간다!”
[아키서스 교단을 탈퇴하시겠습니까? 탈퇴할 경우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아키서스가 매우 분노합니다.]
[무작위로 저주가 내립니다! 주의하십시오!]
“뭐야? 뭐야? 어떻게 됐어??”
“야! 말 좀 해봐!”
옆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더 조마조마해져서 캐물었다.
탈퇴하지 않은 그들은 어떤 메시지창이 떴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저주가 내린다고… 주의하라는데?”
“그게 다야?”
“저주 정도면 괜찮은데? 다른 교단 고위 사제한테 부탁만 하면….”
웅성웅성-
다들 ‘이 정도면 견딜 만하지 않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크로포드는 얼굴이 심각했다.
전혀 만만한 저주 같지 않았던 것이다.
명령을 거절했을 때도 저주였는데 탈퇴했을 때도 똑같은 저주가 나올 리 없었다.
분명 훨씬 더 사악한 무언가가 분명!
마법사 랭커로 쌓은 시간은 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뭔 저준데? 뭐 달라졌냐?”
“글쎄….”
[아키서스의 저주로 마계의 문이 열립니다. 강제로 끌려갑니다.]
플레이어 주변에 마계의 문이 열리더니, 플레이어를 끌어들이고는 사라졌다.
팟!
“?”
“????”
“……!!”
방금 일어난 일을 깨달은 남은 사람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으… 으아아아아!”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진정해! 미친놈들아! 아직 안 죽었어!”
크로포드는 플레이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소리쳤지만 이미 패닉에 빠진 플레이어들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김태현이 우릴 감시하고 있었어!’ 같은 헛소리를 하면서!
“아무리 김태현이라도 감시하고 있다가 다른 곳으로 보낼 능력이 있겠냐! 돌아와! 이것들아!”
크로포드의 목소리는 헛되게 맴돌 뿐이었다.
* * *
경비병을 보낸 태현은 후련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걸 본 케인이 수군거렸다.
“이세연이랑 똑같다고 하면 좋은 거 아냐? 왜 화를 내는 거지?”
“사실 이세연이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지.”
최상윤은 판온 1때부터 랭커였던 플레이어였기에 이세연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방송 같은 데에서는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게임 잘하고 머리까지 좋고… 하여튼 완벽한 이미지였지만, 최상윤이 보기에는 이세연도 김태현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뒤끝 하나는 제대로인 데다가 승부욕은 또 더럽게 센 인간들!
홱-
앞에서 걸어가던 태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최상윤이 움찔했다.
설, 설마 이 자식 내 속마음을 읽은 건 아니겠지?!
“방금 이세연 소리가 나온 거 같은데….”
“아, 아니야.”
“그래?”
태현은 다시 돌아서서 걸어갔다.
케인은 믿기 힘들다는 듯이 말했다.
“이세연 성격이 안 좋다니!”
“안 좋다기보다는 좋은 편이 아니라고. 네가 적으로 만나보면 알게 될걸. 아까 도망친 놈들도 분명 이세연과 부딪힌 적이 있는 놈들이겠지.”
최상윤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한번 적으로 만나면 잊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했다.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적으로 만난 건데!”
“이 자식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꼈네. 이세연한테 한 대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렇지만… 이세연이 김태현 같다는 건 너무하잖아!”
“음. 그건 확실히….”
최상윤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진심 어린 말!
“게다가 이세연이 김태현 같은 사람이라면 저번 방송 촬영할 때 도와주러 왔겠어?”
“네?”
옆에서 걷던 이다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방송이요? 화보요?”
“아니. 화보 말고… 숙소에서 <혼자 사는 인간들> 찍었다고 했잖아.”
“…이세연 씨 왔다는 소리는 안 했었는데요.”
“어? 그랬나? 뭐 별로 중요한 거 아니잖아.”
“…그게 안 중요하면 대체 뭐가 중요한….”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다비는 고개를 돌리더니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태현과 같이 걸어갔다.
케인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어? 내가 뭐 잘못한 건가?”
“음. 넌 정말….”
“?”
“눈치가 없구나.”
“왜 시비야!?”
* * *
“…그러니까 그 PD는 방송 윤리라고는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시청률에 눈이 먼 망자 같은 사람이야.”
“…아, 네.”
이세연이 방송에 나온 것에 대해 슬쩍 떠보려고만 했는데, 이세연을 포함해서 PD까지 욕하는 걸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쌓였던 불만을 탈탈 토해내는 태현!
솔직히 말해서 이런 모습만 보면 태현과 이세연이 매번 기사에 열애설이 터지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다비는 안심하지 않았다.
원래 싸우다가 정드는 게 사람 아닌가!
완벽한 예시가 이다비의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뭐 잘못한 거 아니지? 이다비.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 시켜서 악플 다는 건 그만둬줘…! 그거 정말 멘탈 깨진다고!”
케인은 이다비가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고개를 돌리자 안절부절못했다.
어지간한 PVP보다 더 무서운 게 파워 워리어!
같이 일해온 케인이었기에 그 무서움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좋아. 난 들어가서 보고 좀 하고 올 테니까 싸우지 말고 있어.”
“…….”
“…….”
“너희 분위기가 뭔가 이상한데?”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잘 다녀오세요!”
* * *
“소식은 들었다. 김태현 백작. 그대야말로 왕국의 충신이로다!”
[성공적으로 원정대를 이끌고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다미아노 2세가 당신을 극찬합니다.]
[원정대 중 파이토스 교단 NPC 일부가 사망했습니다. 보상이 조금 감소합니다.]
[아탈리 왕국 공적치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원정 도중 어려움은 없었는가?”
“파이토스 교단 측 인물들이 제 지휘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기는 했지만 괜찮습니다.”
“?!?!”
공은 공, 사는 사.
태현은 이런 부분에서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후고 사제는 속으로 후회했다.
목숨 한 번 구해줬다고 저 인간한테 친절하게 굴다니!
“파이토스 교단!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이야기하면 길어지는데….”
“듣고 싶지 않다! 후고 사제. 그대와 그대의 사람들은 여기 있을 자격이 없다. 밖으로 나가라!”
회의장 밖으로 쫓아내는 건 굴욕 중의 굴욕이었다.
후고 사제와 파이토스 교단 NPC들은 울상이 되어 밖으로 물러났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도록. 백작.”
태현은 후고 사제에게서 얻은 정보를 그대로 다미아노 2세에게 전했다.
물론 후고 사제에게서 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대는 이걸 어떻게 알았지?”
“감히 폐하를 위협하려는 적이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직접 발로 뛰어서 얻었습니다!”
“역시 김태현 백작이로다!”
다미아노 2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렇지만 걱정할 거 없다. 반역자 안토니오의 아들 도미닉이 제법 똑똑한 놈이긴 해도 놈은 아무것도 없는 놈. 하물며 짐이 있는 이곳을 노릴 수야 없겠지.”
“아니, 폐하. 저번에도 그러다가 사디크 교단 같은 곳에서 보낸 암살자한테….”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걱정 말고 물러가게, 백작. 짐을 건드릴 사람은 이 왕국에 아무도 없으니!”
‘아, 괜히 불안해지네.’
태현은 떨떠름한 눈으로 다미아노 2세를 쳐다보았다.
보통 저렇게 말하는 놈은 가장 먼저 죽던데!
그렇다고 할 일 많은 태현이 다미아노 2세한테 바짝 붙어서 24시간 동안 지켜줄 수도 없는 일이고….
다미아노 2세가 자기 목숨을 알아서 챙기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태현의 든든한 뒷받침인 다미아노 2세가 죽으면 태현도 상황이 많이 귀찮아질 것이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미리 끝내놔야지….’
태현은 이번 퀘스트에서 얻은 장비들을 전부 경매장에 올려 버리고, 남은 공적치 포인트를 쓰기 위해 왕궁 창고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관리인!
현재 태현이 아탈리 왕국 내에서 어떤 위치인지를 알려주는 반응이었다.
‘보자, 어떤 게 좋을까….’
현재 가장 태현에게 쓸 만한 아이템은 뭘까?
태현은 이번에 새로 얻은 스킬들까지 포함해서 고민했다.
사디크의 화염 룬은 사실 아직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스킬이었다.
폭탄에 쓰려고 해도 애매한 게, 글자가 사라지기 전까지 계속 화염을 분출하는 스킬이니만큼 폭발하면 스킬이 끊길 가능성이 높았다.
폭발하기 전에 쓰면 효율이 안 좋았고….
‘싫어하는 놈 영지 가서 불 지를 때 쓰라는 건가?’
어디에다 글자 새겼는지만 안 들키면 한동안 불장난은 거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들키지 않는 건 힘들 것 같은데….’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불이 나고 있는 곳의 중심을 찾지 못할 리는 없는 것!
헤매기야 하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역시 방어구가 무난하겠지.’
검은 <대만불강검>, 창은 <카르바노그의 창>이 있는 지금, 무난한 건 방어구였다.
언제 뭘 골라도 손해 보지는 않는 선택!
현재 태현의 갑옷은 <오스턴 왕가의 비전 갑옷>인 매우 좋은 장비였지만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하면 더 좋은 갑옷을 구해도 나쁠 건 없었다.
이제 곧 던전 공략 대회가 열릴 테니까.
‘…음. 새삼 걱정되기 시작하는군.’
남들 합 맞추는 동안 태현 일행은 퀘스트 깨고 있었으니….
태현은 이번 보상만 끝내고 던전을 공략하면서 연습하기로 마음먹었다.
…남의 던전을!
* * *
“이게 좋을까? 아니, 역시 이게 좋은가? 공속 생각하면 이게 더 좋은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건 방어 무시 데미지 옵션도 있고….”
“…혼자 못 고르냐?”
최상윤은 어이없다는 듯이 케인을 쳐다보았다. 그들도 공적치 포인트 보상을 받은 걸 바꾸기 위해 창고에 들어와 있었다.
“아, 사람이 고민할 수도 있지!”
“고민이 좀 심한 거 같은데… 아. 맞다. 고민되면 PVP보다 몬스터 사냥하는 용도로 맞춰라.”
“왜?”
케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물론 몬스터 사냥 용도로 맞추는 것도 좋았지만, 태현과 같이 다니는 만큼 케인은 다른 플레이어와 싸울 일이 더 많았던 것이다.
“곧 던전 대회 있잖아. 안 나가냐?”
“…헉!”
‘이 자식 잊고 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