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98화
드래곤한테 원하는 건 사실 많았다.
골드 좀 빌려줄 수 있냐, 드래곤이면 보석이나 아티팩트 많이 갖고 있을 텐데 뭐 갖고 있는 거 없냐, 대륙에 오스턴 왕국이라고 리치가 돌아다닐 정도로 아주 사악하고 타락한 곳이 있는데 거기를 무너뜨려 줄 수 있냐…….
그렇지만 이런 부탁들은 지금 쓰기 아쉽거나, 아니면 드래곤이 안 들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아키서스에 관한 정보!
잊기 쉬웠지만 태현의 직업은 <아키서스의 화신>이었고, 캐릭터의 성장은 직업의 성장과 동일했다.
오케노아스는 대륙에서 가장 많은 걸 알고 있는 NPC 중 하나일 테고, 다른 교단의 도움을 받기 힘든 태현은 이럴 때 도움을 받아둬야 했다.
-미안하군……. 아키서스의 흩어진 권능은 나도 모른다……. 그건 아키서스가 직접 한 일이라…….
‘이런.’
태현은 아쉬워했다. 오케노아스도 모른다니.
-신의 일에는 대륙의 존재가 끼어들면 안 되는 법……. 게다가 아키서스는 교활하고 영리한 신이라 마음먹고 했다면 내가 알 수가 없다…….
“아키서스와 무슨 일 있었습니까?”
-무슨 일은 없었고……. 아키서스가 다른 신들을 속인 것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지…….
“…….”
-그리고 다른 드래곤들이 아키서스를 믿지 말라고……. 아키서스가 무슨 계약을 하자고 제안해도 믿지 말라고 하는 말 정도…….
‘악담이잖아?!’
말만 들으면 아키서스를 좋게 생각하는 게 이해가 안 갈 정도!
“아키서스한테 원한 있으신 건 아니시죠?”
-내가……? 내가 안 당했는데 왜…….
논리적인 사고방식!
태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륙에 신들이 있었을 때의 일들을 기억하는 드래곤은 많지 않다……. 대륙에 신들이 있었을 때도 드래곤은 신들과 부딪히는 일을 피했지……. 그래도 신은 신이니까……. 드래곤은 강하지만 신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아주 예전에는 대륙에 신들이 직접 내려와 있었다고 들었다.
이제는 몇몇 소수의 신들을 제외하고 전부 떠났지만!
그래서 카르바노그 같은 약한 신도 나타났을 때 그런 소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키서스가 아니었다면 신들은 싸우지 않았을 거고……. 떠나지도 않았겠지……. 덕분에 우리 드래곤들은……. 편하게 대륙에서 지낼 수 있었다…….
“……?”
아키서스가 신들을 싸우게 해서, 결과적으로 대륙에서 신들이 떠났단 말인가?
‘이건 절대 말하지 말아야겠군.’
다른 교단들이 안다면 아키서스 교단을 당장 악신 교단으로 지정해도 이상하지 않을 비화!
-아키서스의 권능은 도와줄 수 없지만……. 다른 건 도와줄 수 있다……. 너는 언령 마법을 쓸 줄 알더군…….
“……!”
-인간치고는 드문 힘인데…….
화술 스킬을 최고급까지 찍는 사람은 없었으니, 오케노아스의 반응도 당연했다.
-언령 마법을 가르쳐 줄 사람을 만나는 건 불가능할 테니, 내가 가르쳐줄 수 있다…….
[오케노아스가 <언령> 스킬의 지도를 맡습니다.]
[훈련장으로 이동합니다.]
[훈련하는 동안 거둔 결과에 따라 스킬 경험치가 달라집니다.]
[얼마든지 훈련을 그만두고 나갈 수 있습니다.]
파아앗!
오케노아스는 그대로 있었지만, 태현 주변의 바닷물이 사라지고 공간이 생겨났다.
-언령은……. 말의 힘……. 말하는 대로 힘을 불러내는 마법이다……. 네 수준으로는 한 소절로도 벅차겠지만……. 해봐라…….
파파팍!
마법 훈련용 허수아비들이 튀어나왔다.
[언령 스킬을 사용해서 허수아비를 제압하십시오!]
현재 태현의 언령 스킬은 딱 한 소절만 가능한 레벨.
그걸로 허수아비를 제압하는 건 쉽지 않았다.
-<파이어>, <파이어>, <파이어>!
화르륵!
허공에서 불이 피어오르더니 허수아비에게 작렬했다.
그렇지만 허수아비는 보통 튼튼한 게 아니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MP가 10% 미만입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회복해야겠군.
[MP가 전부 회복됩니다!]
보면 볼수록 탐나는 드래곤의 힘!
오케노아스가 반쯤 감긴 눈을 뜨며 물었다.
-그거 사디크의 화염 아닌가……? 어떻게 쓰는 거지……?
“뺏었습니다.”
-역시……. 아키서스…….
“…….”
-계속하도록…….
-<타격>, <타격>!
허수아비들이 불에 버티자 태현은 방식을 바꾸었다. 언령 스킬을 한 번 쓸 때마다 퍽퍽 소리가 나며 허수아비들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걸 본 오케노아스가 은근하게 말했다.
-지루한 것 같은데……. 그만두고 나가도 된다…….
“하하, 무슨 소리를.”
태현은 오랜만에 의욕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런 식으로 보통 깰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면 태현은 오히려 더 힘이 솟구치는 타입이었다.
어디 한번 해보자!
-아……. 아니…….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는 없고……. 적당히 포기해도…….
-<저주>, <저주>!
* * *
[아란티스의 새로운 국왕이 탄생했습니다!]
[모두 경배하십시오!]
“뭐여 XX?!”
“장난해?!”
아란티스 왕국 주변에서 서로 찌르고 죽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뜨는 메시지창에 경악했다.
“너냐?! 네가 가져갔냐!”
“으악! 나 지금 싸우고 있는데 어떻게 왕관을 가져가!”
“저놈이 수상해! 죽여!”
패닉에 빠진 플레이어들!
그러나 그 패닉은 얼마 가지 않았다. 명령을 받은 경비대들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멈춰라! 싸움은 금지다!”
“……!”
“에이……. 방해되게…….”
플레이어들은 투덜거리면서 멈췄다.
어인 경비대들이 달려왔지만 겁먹는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벌금이나, 심하면 감옥에 잠깐 있는 정도일 테니까.
“왕국 내에서 싸움을 한 사람은……. 사형이다!”
“?!?!?!?!”
“뭐???”
“아니 세상에 그딴 법이…….”
“잡아서 죽여라! 즉결 처형이다!”
순식간에 무기를 들고 덤비는 어인 경비대들!
플레이어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진짜로 죽이려고 하잖아?!”
“어떤 놈이 국왕 됐는데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누가 국왕이 되었든 간에, 이런 건 상식 밖이었다.
보통 국왕이 됐으면 왕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다른 플레이어들을 받아주고 끌어들여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되자마자 이런 짓이라니.
마치 왕국의 플레이어들을 모두 쫓아버리기라도 하려는 것 같은…….
[아란티스 왕국이 새로운 플레이어 시작 지점으로 시작됩니다.]
[앞으로 플레이어들은 아란티스 왕국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란티스 왕국의 세율은 100%입니다.]
[아란티스 왕국 내에서 싸움을 벌일 경우 사형에…….]
[…….]
[…….]
“……미, 미친 건가?”
“어떤 미친놈이 왕관을 쓴 거지?”
아란티스 왕국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모두 황당하다는 듯이 메시지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왕관을 쓴 게 누군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려지게 되었다.
* * *
-파워 워리어 길드가 아란티스 왕국을 먹었다!
-아란티스 왕국의 왕관을 쓴 건 파워 워리어 길드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파워 워리어가??
-왕관만 찾으면 된다지만 그래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충격은 충격이고, 사람들은 이번 사건이 판온을 어떻게 뒤흔들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란티스 왕국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데, 아란티스 왕국에서 시작하면 뭐가 좋지?
-어부나 낚시꾼은 좋긴 하겠네.
-아무리 생각해도 중앙 대륙, 하다못해 남쪽 대륙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불리한 것 같은데.
-게다가 국왕이 미친놈이야! 누가 파워 워리어 길드 아니랄까 봐 세율을 100%로 올렸어!
버는 만큼 뺏어가는 참신한 세율!
아무리 높은 세율을 유지하는 영지라도 세율을 100%로 하는 미친놈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플레이어들 대부분은 ‘미친 짓 하네’였지만, 그래도 몇몇 호기심 넘치는 플레이어들은 ‘그래도 한 번 아란티스 왕국에서 해본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태현이 타이럼 시에서 시작했듯이, 언제나 직접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있는 법!
* * *
“흑흑흑, 어르신! 세율을 내리셔야 합니다!”
“전하! 세율을 내리십…….”
“지금 사극 흉내 낼 때냐!”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유 회장 앞에 엎드려서 빌고 있었다.
마치 폭군 앞에서 충언을 올리는 충신 같은 모습!
그러거나 말거나 유 회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분명 왕국의 왕궁이고,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 입장에서는 여기 들어온 것만으로도 엄청난 결과였지만…….
‘이러다가는 망한다!’
왕국을 손에 넣었으면 왕국을 잘 다스리고 가꿔서 천년만년 잘 먹고 살아야 하는데, 유 회장은 뭘 잘못 먹었는지 닥치는 대로 플레이어들을 쫓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흥. 싫다. 번 만큼 내야지.”
“아니, 다 뜯어가면 누가 여기서 놉니까!”
“싫으면 나가라고 해라. 그런다고 왕국 안 망하니까.”
“망해요! 그러다가 망한다고요!”
“망하면 망하는 거겠지.”
유 회장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애초에 말이다. 응? 나는 육지에 못 올라가는데 너희들은 올라갈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냐?”
“아니……. 그게 저희 잘못은…….”
“나는 여기서 계속 있어야 하는데 너희들은 육지에 올라가서 재밌게 놀고 오겠지.”
유 회장은 완전히 심기가 틀어져서 돌아앉았다.
나이 든 사람이 토라지면 무섭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유 회장의 분노를 풀 수 있을까?
“헉, 헉……. 큰일 났습니다!”
“??”
“왕국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 *
왕관을 뺏겼다고 ‘아, 그렇군요’ 하고 물러날 플레이어들은 얼마 없었다.
“잘됐다! 어디 갔나 찾기도 힘들었는데 이렇게 나와 주다니. 잡고 뺏으면 그만이지!”
“왕국이라고 해봤자 지금 막 왕위에 올랐는데, 쓸 수 있는 병사가 얼마나 되겠어? 게다가 왕국도 오랫동안 망해 있던 왕국이잖아. 충분히 뺏을 수 있다!”
“나는 길드 동맹의 느레다! 여기는 내 동생 느페! 우리를 믿고 따라오면 충분히 뺏을 수 있다!”
길드 동맹의 산적 플레이어, 느레 느페 형제!
시끄럽게 떠드는 플레이어들 앞에 그들이 나섰다. 나름 이름이 알려진 플레이어였고, 길드도 빵빵하니 플레이어들은 웅성거리며 그들을 따랐다.
“나를 따라라! 나를 따라오는 놈들한테는 보상을 약속해 준다! 왕이 되자마자 세율 100% 때리는 놈한테 뭘 기대할 수 있겠냐!”
“맞다! 맞아!”
처음에는 파티 한두 개로 시작한 모임이, 점점 시간이 흐르자 다른 파티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들 반응이 뜨겁자 느레도 신이 나서 더 크게 외쳤다.
“이건 정의로운 싸움이다! 자격도 없는 놈이 왕이 됐으니…….”
자기도 안 믿는 소리를 당당하게 외치는 느레!
느페가 옆에서 작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형.”
“……?”
“우리 앨콧 구출하러 온 거 아닙니까?”
“……그건 좀 나중에 해도 돼! 지금 앞을 보라고!”
앨콧이 들으면 이를 갈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 느레였다.
왕국 하나를 눈에 둔 상태에서 앨콧 같은 건 사소한 문제!
* * *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네! 지금 당장 준비를 하셔야…….”
“음, 왕국 뺏기면 왕관도 가져가는 건가?”
유 회장은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왕관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벗고 싶은 이 왕관!
“아직 포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전력이 있습니다!”
“맞아요, 어르신! 저희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아니……. 그럴 거까지야…….”
“아닙니다! 저희의 진심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절대 뺏기지 않으리라!
그러는 사이 유 회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왕관을 뺏길 수는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