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93화
“아니 왜. 빌릴 수도 있지.”
“네가 ‘빌린다’고 하는 건 빌리는 게 아니잖아!”
이세연은 판온 1을 했었기에 태현이 어떤 의미로 말하는지 알았다.
저 빌린다는 건 강제로 빌린다는 것!
이세연이 옆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은 무시하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누구 던전을 빌려야 할지 모겠는데. 제비뽑기할까?”
“그냥 빌려달라고 하면 안 됩니까?”
정수혁이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이세연은 안도했다. 그래도 멀쩡한 사람이 한 명은 있구나!
“안 돼. 빌려달라고 하면 그쪽에서 쑥스러워서 거절할 거라고.”
“…….”
“음. 길드 동맹은 지금 건드리기 좀 그렇지?”
평화 협정을 맺은 상태에서 괜히 태현이 먼저 깨뜨릴 필요는 없었다.
지금 시간이 필요한 건 태현이었으니까.
“좋아. 아주 공평한 방법으로 정해야겠다.”
“……?”
태현은 말과 함께 핸드폰을 꺼냈다. 이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짓을 하려는 거지?
태현은 기사 목록을 켜고 전 세계의 게임단 중 가장 태현의 이름을 많이 언급한 게임단을 찾았다.
-김태현, 우리가 무너뜨린다!
-김태현의 활약은 우연일 뿐!
-김태현 개X끼! 저주할 테다!
‘응?’
태현은 순간 잘못 봤나 싶었다. 다시 보니 마지막 건 기사가 아니라 태현을 욕하는 게시판 글이었다.
“좋아. <베이징 파이터즈>군. 내 이름 많이 썼으니 나도 던전 좀 써도 되겠지.”
“…….”
“…….”
“뭐야, 불만 있는 사람 있어?”
“아니!”
“없어!”
“없습니다!”
바로 튀어나오는 대답들! 태현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세연에게 말했다.
“우리 팀 참 호흡 잘 맞지 않아?”
“……그, 그래.”
“좋아. 이번 퀘스트만 끝내면 <베이징 파이터즈> 전용 던전 가봐야겠다. 이다비한테 어디 있나 물어봐야지.”
“응? <파워 워리어> 길마?”
“어.”
“상인 직업이지? 팀에 넣어도 괜찮겠어?”
“뭐 어때. 다 쓸모가 있는 법이지.”
게임단에 소속된 플레이어 중 전투 직업이 아닌 플레이어는 매우 드물었다.
대회에서 비전투 직업은 너무 불리했던 것이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계산한 게 있는 모양이네.”
“……물, 물론이지.”
“……?”
이세연은 태현이 살짝 말을 더듬는 걸 보고 ‘설마 아무 생각 없이 넣은 건 아니겠지?’라고 의심했다가 멈췄다.
아무리 그래도 ‘그’ 김태현이 저런 계산 하나 하지 못했겠는가.
“근데 그 길마는 어디 있어? 다른 숙소에서 지내나?”
“어……. 음……. 어. 그렇지.”
“뭐야, 너희들만 이런 좋은 숙소에서 지내는 거야?”
“아, 아니. 거기도 좋다고.”
“너 오늘 좀 이상해.”
* * *
태현과 이세연의 대화를 흐뭇하게 듣던 PD.
옆의 스태프가 말을 걸었다.
“PD님. 그러고 보니 게임단 훈련하는 것도 방송에 넣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그렇지.”
여기 게임단 사람들이 다 캡슐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는 바람에 잊고 있었다.
“……설마 또 캡슐에 들어가서 안 나오는 거 아니겠지?”
“그렇게 되면 그냥 게임 내 훈련 영상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것도 그렇겠군. 좋아.”
PD는 태현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
“……?”
-훈련 방식도 좀 말해주세요!
“어…….”
“왜?”
“훈련하는 것도 담고 싶다는데…….”
“보여주면 되잖아?”
“……비밀이거든.”
이세연 앞에서 ‘우리 사실 훈련 같은 거 안 하고 있었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 문제!
“아, 확실히 그것도 그렇겠네. 너희 팀 정도면 안 그래도 견제하려는 팀 많으니까.”
그러나 이세연은 다른 의미로 이해한 것 같았다. 태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그래서 안 보여주려는 거야.”
“……너 오늘 진짜 좀 이상한데…….”
* * *
어쨌든 이세연 덕분에 PD는 만족스러워하며 돌아갈 수 있었다.
억지로 체육관에 가서 선수들을 잡고 팰 필요도 없었고.
덕분에 체육관의 선수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다음에 연락드릴 테니 스튜디오로 나와주시죠.”
“네? 왜요?”
“예? 스튜디오에서 이거 찍은 거 보면서 얘기는 하셔야죠.”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태현 씨, 설마 저희 프로그램을 한 번도 안 본 건…….”
이세연이 재빨리 태현의 옆구리를 찌르며 수습에 들어갔다.
“그냥 잊고 있었던 거겠죠. 얘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하. 그런 거였습니까? 어쨌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태현 씨. 방송 기대하셔도 좋을 거 같아요!”
PD는 유쾌한 얼굴로 돌아갔다. 태현은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퀘스트…….”
“응? 넌 왜 같이 안 갔냐?”
“…….”
이세연이 옆에 있는 물병을 들어서 태현을 후려치려고 하자, 최상윤과 정수혁이 급히 말렸다.
“도와준 거 물어내.”
“하하, 연예인이 방송 출연하면 좋은 거지. 왜 그래?”
“아. 그래?”
이세연은 상냥하게 웃었다. 태현은 그 웃음에서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몰랐네. 잘 알겠어. 삼촌한테 전달해 줄게.”
“참고로 난 연예인이 아닌…….”
“너 정도면 충분해. 겸손해할 필요 없어.”
“삼촌한테 이르는 건 너무 치사하지 않냐?”
“안 치사한데? 억울하면 너도 이르던가.”
“알겠어. 뭐가 궁금한데? 퀘스트 뭐?”
“이번에 해저 왕국 열렸는데 거기 관심 없냐고 물으려고 했지.”
“관심 없어. 지금 다른 걸로도 충분히 바쁘거든.”
“아. 아탈리 왕국에서 퀘스트 깨고 있었다고 했나?”
“잠깐.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네가 당당하게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알아서 글 올리거든? 김태현 봤다고.”
교단들을 이간질하고 다닐 때는 가면을 쓰고 다니지 않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본 플레이어들이 게시판에 ‘나 오늘 김태현 봤다!’고 올린 것!
“네가 해저 왕국 안 간다니 아쉽게 됐네. 길드 동맹이 너무 유리하려나…….”
이세연은 아쉽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길드 동맹이 잘나가는 건 그녀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네가 가는 건?”
“나도 지금 퀘스트 깨고 있는 게 있어서 무리야. 어려운 퀘스트여서 도중에 다른 거 할 여유가 없어.”
“무슨 퀘스트길래?”
“악신 믿는 교단 추적해서 토벌하는 퀘스트인데……. 등장하는 적들이 다 만만치가 않더라고. 너는 무슨 퀘스트 하고 있어?”
“비밀인데.”
“…….”
자기 궁금한 건 다 물어봐놓고 입을 싹 닦는 태현에게 이세연은 살의를 느꼈다.
“농담이야. <해적왕의 영원한 유배지> 갔다 오려고.”
“거기는 왜?”
“갇혀 있는 플레이어들이 있잖아. 구해줘야지.”
“그래서 거기는 왜?”
전혀 안 믿는 이세연!
“퀘스트가 나와서.”
“아, 그렇다면 말이 되네.”
* * *
“이 짐은 여기에 놓도록.”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저기가 좋은 거 같아.”
“다시 생각해 보니까 저기 망루 위가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니군. 갑판 밑에 집어넣어라. 내가 이런 지시를 내리는 동안 왜 아무도 조언을 안 해준 거야? 파이토스 교단은 정말 형편없군!”
“…….”
“…….”
원정대의 지휘권을 맡은 태현.
태현은 각 교단이 내놓은 함선 중 굳이 파이토스 교단의 함선에 탔다.
데메르 교단 함선에 타는 게 가장 평화롭고 좋았겠지만…….
[파이토스 교단 성기사가 당신을 매우 싫어합니다.]
[파이토스 교단 사제가 당신을 매우…….]
[…….]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은 파이토스 교단을 갈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사기 친 것 때문에 관계는 최악이었다. 여기서 좀 더 괴롭힌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촤아악-
[<동풍의 가호>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배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교단의 함선들은 플레이어들이 구할 수 있는 배보다 한 수 위였다.
게다가 사제들이 달라붙어 각종 신성 스킬들을 써주니 속도나 방어력 면에서는 더더욱 뛰어났다.
“주변에 배들이 왜 이렇게 많지?”
“해저 왕국 가는 거 아닙니까?”
“우리도 해저 왕국 가면 안 되냐? 여기 전력 이끌고 가면 대박일 텐데.”
“퍽이나 먹히겠다. 안 돼.”
교단 NPC들 중 갑자기 ‘해저 왕국 가서 왕위를 얻자!’이러면 받아들일 NPC들이 별로 없었다.
옳다구나 하고 반대하면 반대했지!
태현이 일행과 떠드는 사이, 파이토스 교단 고위 사제인 후고가 못마땅한 얼굴로 다가왔다.
“김태현 백작. 지금 뭐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후고 사제! 이번 원정대 지휘를 맡은 나한테 무례하게 말하는 건가?! 설마 아니겠지?!”
태현은 너무 깜짝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후고 사제는 이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김태현 백작님. 지금…… 뭐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주를 풀기 위해 유배지로 가려면……. 빠득빠득……. 지도가 필요합니다.”
“유배지로 가려면 지도가 필요하다니. 너무 뛰어난 의견이군.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의견 같…….”
“지도가 필요하다 이겁니다! 지도를 구하실 방법은 있으십니까!”
“음. 후고 사제는 있나?”
“지금 시중에 돌아다니는 유배지 지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태현은 순간 움찔했다. 그 가짜 지도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지도들을 구해서 어디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별로 효과 없을 것 같은데.”
“원정대의 지휘를 맡으신 분이 그런 무책임한 소리를 하시다니.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적어도 그 지도들을 구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가짜일 수도 있잖아.”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저는 저희 성기사들을 불러 모아 지도를 확인할 테니 백작님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십시오!”
“그렇게 할까?”
“……?!”
후고 사제는 깜짝 놀랐다. 김태현 백작이 미쳤나?
그러나 후고 사제는 금방 표정을 수습했다. 그의 눈빛에는 교활한 빛이 맴돌았다.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돌아간 후고 사제는 부하들을 불러놓고 외쳤다.
“기회다! 김태현 백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명백한 실수다. 원정대의 지휘를 맡은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 저렇게 안일하게 굴다니. 다른 교단들이 다 데메르 교단처럼 자기한테 꼬리를 치는지 아는 게 분명하다. 너희들은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서 지도를 갖고 와라. 지도만 얻으면 데메르 교단을 제외한 다른 교단들을 불러 김태현 백작의 지휘권을 뺏을 수 있다. 무능한 지휘관은 필요 없으니까!”
“예!”
뒤에서 살벌한 대화가 벌어지는 걸 본 최상윤이 중얼거렸다.
“야, 쟤네들이 너 쫓아내려고 하는 거 같은데?”
“내버려 둬. 어차피 못 할 테니까.”
태현은 품속에 있는 진짜 지도를 꺼냈다.
가짜 지도를 만들게 할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태현 님! 태현 님!
-……?
-저, 파워 워리어 길드의 최민수라는 플레이업니다!
-어……. 근데? 왜 이다비가 아니라 나한테 귓속말을?
보통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이다비에게 보고하거나 말했지 태현에게 직접 말을 걸지는 않았다.
-정말 급한 상황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크흑!
-……?
-드래곤…….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
정말 밑도 끝도 없는 말에, 태현은 당황했다. 뭔 드래곤?
* * *
[<아란티스 왕이 숨겨 놓은 편지>를 얻었습니다.]
[퀘스트 정보가 추가되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편지를 얻은 유 회장.
그렇지만 유 회장은 새로 전직한 직업의 스킬들이나 확인해 보며 낚시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대성통곡을 하며 서럽게 매달렸다.
-으헝헝! 어르신! 이런 기회를 놓치면 저희는 평생 후회할 겁니다!
-그 편지가 얼마나 대단한 아이템인지 아십니까!
-제발 한 번만 가서 확인해 봅시다! 어르신! 낚시는 거기서 해도 되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