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89화
태현의 죄책감과는 별개로 데메르 사제는 계속해서 태현을 칭찬했다.
-대륙의 영웅! 사디크의 토벌자!
-괴물을 쓰러뜨리기 위해 스스로를 아끼지 않고 나서는 이 시대의 참 인격자!
‘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태현은 살짝 의심이 들었지만, 데메르 사제에게 악의는 없었다.
그걸 깨달은 태현은 멈칫했다.
‘잠깐……. 그러면 이렇게 칭찬한다는 건…….’
태현을 이렇게 ‘대륙을 구하는 영웅!’처럼 대하는데, 그런 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뭔가 어려운 걸 시키려는 게 분명!
탁-
태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하하!”
“앗, 김태현 백작님! 말씀만 듣고 가시죠!”
“정말 급한 일이라서요!”
“그러면 나가는 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론 사제님! 여기 김태현 백작님 오셨습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데메르 사제! 교단 건물 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안에서 하론 사제가 호다닥 튀어나왔다.
“…….”
“김태현 백작님! 백작님의 영웅다운 얼굴을 이렇게 뵙게 되니 기쁘기 그지 없…….”
“……또 뭐 시키려고?”
자연스럽게 퉁명스러워지는 말투!
생각해 보니 데메르 교단이 저번에 불렀을 때도 <신 잡아먹는 괴물>을 쓰러뜨릴 때였다.
물론 태현은 그때 <권능 포식> 같은 강력한 사기 스킬을 얻는 등 쏠쏠하게 챙겼지만…….
보통 플레이어였다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플레이어 수준으로는 못 잡을 신 잡아먹는 괴물에, 마계까지 끌려갔으니…….
“아, 아닙니다. 왜 꼭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시키려고 부른 게 아니라 이거지?”
“……꼭,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 대륙의 영웅인 백작님께 부탁드릴 일이…….”
태현의 손을 붙잡으려고 하는 하론 사제. 태현은 매몰차게 밀어냈다.
“시키려는 거 맞구만! 아, 데메르 교단도 잘나가는데 알아서 좀 해! 요즘 아키서스 교단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파이토스 교단이나 다른 교단들이 계속 쪼아댄다고. 안 그래도 지금 카르바노그의 성물도 뺏기고 왔는데!”
“예? 그런 짓을 했습니까? 이런 무례한 사람들 같으니!”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파이토스 교단 욕을 끼워 넣는 태현이었다.
“데메르 교단은 날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이런 일은 시키냐? 응?”
“그, 그런……. 저희도 몰랐습니다. 다른 교단들이 하는 일을 저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태도를 보아하니 데메르 교단을 제외하고 다들 뭉친 것 같았다.
‘하긴, 데메르 교단들이야 다들 순한 놈들만 있으니 제안을 안 했나 보군.’
태현이 봐도 제안이 먹힐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에 부른 건 저희 욕심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대륙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아, 됐어. 난 지금 내 영지와 교단의 안정이 필요해.”
“그런! 마음에 없는 소리란 걸 압니다! 김태현 백작님 같은 영웅께서!”
[명성이 너무 높습니다.]
[쌓은 업적이 너무 많습니다.]
[하론 사제가 당신의 겸손한 말을 믿지 않습니다.]
“…….”
태현은 황당하다는 듯이 메시지창을 봤다. 아니, 가짜 성물로 사기 치는 건 믿으면서 이런 건 안 믿어?
“백작님. 이번 일은 아키서스의 성물과도 관련이 있는 일입니다!”
“응?”
“아키서스의 성물이 있다는 믿을 만한 기록이 있습니다!”
태현은 움찔했다. 데메르 교단이 이런 걸로 사기 칠 교단은 아니었다.
보통 이런 걸로 사기 치는 교단은 아키서스 교단!
‘진짜 성물이 있다고?’
안 그래도 요즘 태현을 공격하는 놈들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작 직업 퀘스트는 미뤄진 태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권능 스킬을 얻을 수 있는 성물 퀘스트는 당연히 감지덕지였다.
문제는…….
‘이놈들이 날 부른 걸 보니까 분명 더럽게 빡센 퀘스트 같은데…….’
태현은 입맛을 다셨다.
데메르 교단도 어디 가서 꿀리는 교단은 아니었다.
그런 데메르 교단이 태현을 불러 모은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난이도의 퀘스트라는 걸 의미했다.
저번의 <신 잡아먹는 괴물>과 달리 이번에는 쓸 수 있는 수단도 훨씬 적었다.
‘끙……. 폭딜 수단이 뭐가 남았지? 오리하르콘은 구하지도 못했고, <파이토스의 일격>은 아직 못 쓰고, 지금 5단계를 깨야 하나? 교단과 문제 처리되기 전에는 깨기 좀 그런데…….’
태현은 어려운 퀘스트를 무작정 깨러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계산은 서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슨 일인지 들어보기 전에…….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겠지?”
“앗.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대륙의 위험하고 어려운 일에 무조건 참여하시는 영웅…….”
“시끄럽고. 어쨌든 그런 어려운 일에 데메르 교단과 아키서스 교단만 참가하는 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다른 교단들도 부르자.”
물귀신 작전!
저번 <신 잡아먹는 괴물> 때 썼던 방법을 다시 한번 재활용하는 태현이었다.
얄미운 다른 교단들도 괴롭히고, 튼튼한 방패도 만들고…….
교단의 사제나 성기사 NPC들은 튼튼한 탱커 역할로는 최적이었다.
안 그래도 단단하고 HP 많아서 질긴 성기사를 사제가 계속해서 회복시켜주니까!
하론 사제는 망설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다른 교단 분들은 거절하셨…….”
“아니, 내가 거절하면 무시하면서 다른 교단 놈들은 OK냐?!”
순간 울컥한 태현!
“백작님이야 영웅이지만 다른 교단 분들은……. 그게……. 좀…….”
“치사하고 비열하고 이기적이라고?”
“그, 그렇게는 말 안 했습니다만.”
“치사하고 비열하고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더럽다는 거군. 잘 알겠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방법이 있지.”
“……그게 뭡니까?”
“국왕 폐하에게 가서 일을 키우자고. ‘좋은 일 하려는데 저놈들이 협조를 안 해줘요~’ 하면 폐하께서 돕지 않겠어?”
“아니……. 교단의 성스러운 임무에 왕국의 힘을 빌리는 그런 강제적인 짓은…….”
“정말 좋다고? 그래. 알겠어.”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래그래. 네 마음을 잘 알겠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정작 무슨 일인지는 못 들었는데?”
“<해적왕의 영원한 유배지>로 찾아가 저주를 푸는 일입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해야 하지?”
* * *
잊을 만하면 나오는 그 이름, <해적왕의 영원한 유배지>!
태현이 정색하면서 떠나려고 하자 하론 사제는 필사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 대해적 갈르두 때문에 갈 수 없었던 <해적왕의 영원한 유배지>가, 갈르두가 쓰러지고 나서 길이 열려서 찾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해적왕의 영원한 유배지>로 가서 저주받아 갇힌 사람들을 풀어줘야 합니다!
<해적왕의 영원한 유배지>에는 멍청한 플레이어들만 갇힌 게 아니었다.
먼 예전에 갈르두와 싸웠던 교단 성기사들이나 사제들도 영혼이 그곳으로 끌려가 갇혀 있었던 것!
“아니, 그런 거면 더더욱 다른 놈들도 불러야지!”
덜컥!
“김태현 백작! 여기 있었나!”
“……?”
신전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 태현은 움찔했다.
설마 사기 친 게 벌써 들켰나?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른…….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다른 교단의 NPC들이 아닌, 브랑송 제독이었다.
“이야기는 들었네! 자네가 카르바노그의 성물을 파이토스 교단에 바쳤다고?!”
“……크흑! 그렇습니다! 제독님!”
태현은 쓰러지듯이 비틀거리며 원통해했다. 옆에 있던 하론 사제는 깜짝 놀랐다.
왜 갑자기 이러시지?
“자네 같이 책임감이 넘치고 자부심이 강한 귀족이 그냥 바칠 리 없지 않나! 파이토스 교단이 협박한 것이렷다?!”
“흑흑……. 아닙니다……. 제가 바친 겁니다. 흑흑! 대륙의 평화를 위해 흑흑!”
말은 바쳤다고 하지만 얼굴은 슬픔과 분노로 얼룩진 표정!
브랑송은 바닥을 발로 쾅하고 구르더니 말했다.
“교단 놈들, 봐줬더니 아주 끝까지 기어오르는군! 감히 귀족을 핍박해?! 절대로 가만히 넘어갈 수 없네.”
“그런, 저 때문에 제독님께 어떻게 폐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귀족들의 기사단을 불러서 왕국 교단 건물을 공격하는 건 차마…….”
“그, 그런 계획은 생각 안 했다만.”
브랑송도 잠깐 당황할 정도의, 태현의 구체적인 계획!
“……이미 폐하께 말했네! 이 일을 내버려 두면 교단 놈들이 기세등등해질 걸세. 따끔하게 교훈을 내려야지! 왕국 어전 회의에서 놈들을 규탄할 걸세!”
“그런! 좀 더 폭력적인 방법이 낫지 않겠습니까?”
“……?”
“하하. 농담입니다.”
쾅!
“김태현 백작-!!!”
“……?”
또 문을 열고 들어온 불청객들!
얼굴이 시뻘게진 파이토스 교단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이었다.
누가 봐도 진실을 깨달은 얼굴!
‘이런. 들켰군.’
“감, 감,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태현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대답해 줄 사람은 여기에 있었으니까.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이 사제 놈들!”
벌컥 화를 내는 브랑송!
“브랑송 제독?! 당신이 왜 여기에?!”
“남의 교단 신전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파이토스 교단은 왕국의 법도 지키지 않을뿐더러 교단끼리의 예의도 안 지키나?!”
“아니, 여기에는 허락을 받고 들어 왔…….”
“듣고 싶지 않네! 자네들이 김태현 백작을 겁박해 그 성물인가 뭔가를 뺏었다는 건 들었네! 당장 돌려주지 않는다면 이번 왕국 어전 회의에서 그대들을 용서하지 않을 걸세!”
“어떻게 돌려줍니까! 저희는 애초에…….”
“……돌려줄 생각이 없으셨다?”
은근슬쩍 해명을 끊고 방해하는 태현! 브랑송 제독은 그 말을 듣고 더 분노했다.
“그랬다 이거지? 파이토스 교단의 무도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군! 당장 이곳에서 나가게!”
“아니, 브랑송 제독…….”
“나가게!”
[파이토스 교단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변합니다.]
[파이토스 교단의 공적치 포인트가 모조리 사라집니다.]
[파이토스 교단의 <원한의 적> 목록에 이름을 올립니다.]
[앞으로 파이토스 교단의 암살자들이 당신을 공격해 올 수 있습니다…….]
화려하게 뜨는 메시지창!
그러나 태현은 시큰둥했다.
‘뭐 암살자 덤벼오는 게 한두 번이라고.’
별로 안 무섭다! 올 테면 와봐라!
메시지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왕국 내 파이토스 교단의 명성이 매우 하락합니다.]
[왕국 내 파이토스 교단의 영향력이 매우 하락합니다.]
-갑자기 왜 이래!? 뭘 한 거야?!
파이토스 교단 플레이어들만 피를 볼 뿐!
별로 공적치 포인트를 쌓지 못한 하위 플레이어들은 대거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거 심상치 않은데 그냥 다른 교단 가는 게 낫겠다. 다른 교단 추천 좀.
-데메르 교단 좋음 ㅇㅇ. 안정적임.
-아키서스 교단은 어떨까?
-거기는 좀…….
* * *
브랑송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났지만, 파이토스 교단은 분노 그 자체였다.
세상에 자기 신의 이름을 걸고 사기 치는 놈이 있다니!
저놈은 신도로서 자격이 없다! 정말 나쁜 놈이다!
……문제는 파이토스 교단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브랑송 제독이야 원래 귀족 편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다른 교단들도 태도가 애매했다.
“으음……. 정말 창 받고 입 씻은 건 아닌가? 수상한데.”
“창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설마 곧 회의 열린다는 것 때문에 그런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니지?”
“이런 저주받을 놈들!”
다 같이 성물을 뺏으려고 하던 처지다 보니, 서로를 못 믿는 사이였다.
데메르 교단은 좀 다른 방향으로 믿지 않았다.
“김태현 백작님 같은 영웅께서 그런 짓을 하실 리 없잖습니까?”
“그놈이 뭐가 영웅입니까! 데메르 교단! 정신 차리십시오!”
“파이토스 교단이야말로 정신을 차리십시오! 김태현 백작님은 영웅이십니다! 여러분들이 거절한 <해적왕의 영원한 유배지> 토벌 성전도 김태현 백작님께서만 진지하게 들어주셨습니다!”
“그걸 믿으면 안 됩니다! 그놈의 속임수란 말입니다!”
‘후후. 개판이군.’
태현은 코밑을 쓱 닦으며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지금 왕궁 앞 교단 NPC들이 모인 장소는 개판 그 자체였다.
필사적으로 해명하는 파이토스 교단 NPC들과, ‘진짜야? 못 믿겠는데?’ 하면서 반신반의하는 다른 교단 NPC들. 그리고 콩깍지가 제대로 낀 데메르 교단 NPC들까지!
원했던 그림보다 훨씬 더 좋은 효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