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80화
“대학생이 자기 과 행사 나오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냐?”
“교수님. 요즘 트렌드는 자기가 할 일 각자 알아서 하는 겁니다. 과 행사고 뭐고 그렇게 끈끈하게 하는 거 아주 옛날 유행이에요. 구식이라구요.”
나가기 싫다!
귀찮아!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그건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우리처럼 숫자 적은 과는 좀 끈끈해도 돼.”
김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번 해에 신입생 애들 중에 너한테 관심 있는 애들이 많아서 귀찮아 죽는 줄 알았다. 내가 왜 술자리 나갈 때마다 네 이야기를 해줘야 하냐? 응?”
그리고 이게 본심!
태현이 본격적으로 정체를 까고서 활약을 한 다음부터, 태현은 확실하게 유명해지고 있었다.
물론 태현의 일화를 잘 아는 동기들은 굳이 술자리에서 태현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달랐다.
-그 선배는 어딨나요?
-그 선배는 언제 복학하나요?
-그 선배랑 게임 같이 할 수 있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 선배가 동환이 형 죽빵을 날렸다는 데 진짜인가요? 혹시 그때 찍은 영상 없나요? 다시 보고 싶은데!
-이런 미친놈이!
기껏 지도 교수라고 술자리에 찾아갔는데 하라는 전공 이야기는 안 하고 판온 이야기만 계속하니 김 교수도 슬슬 지겨웠다.
‘내가 왜 팀 KL의 각 대회 성적 예상과 그에 따른 구도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어, 술자리에서 얼마나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아오…….”
김 교수는 생각이 나서 몸서리쳤다.
하도 많이 들어서 관심도 없는 팀 KL과 대회 계획과 향후 전망에 대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팀 KL의 팀원은 누구인지, 확충 계획은 없는지, 알고 보니 대학 후배 한 명이 새로 들어갔다는데 그게 진짜인지…… 으으…… 이 또라이 같은 놈들…… 얘네 왜 국문학과 온 거지? 가상현실공학과를 가라고.”
“가상현실공학과 애들만 판온 하는 건 아니니까요.”
“내가 그걸 몰라서 물었겠냐? 어쨌든 네가 나와서 질문받아.”
“교수님.”
“왜?”
“어쨌든 싫습니다!”
“……난 가끔 네가 너무 당당해서 싫을 때가 있단다.”
하기 싫은 건 정말 죽어도 안 하는 태현의 성격상, 나가서 질문받는 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김 교수는 전략을 바꿨다. 살살 꼬드기기로.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라. 선배 좋은 게 뭐겠냐?”
“좋은 선배란 보이지 않는 선배 아닐까요?”
“야!”
협박, 구걸, 강요, 애원 등 온갖 수단을 다 하고 나서야 김 교수는 태현의 입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라는 답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 태현의 입에서 저런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거의 성공이나 마찬가지!
김 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을 담은 눈물은 언제나 효과가 있었다.
‘후. 덕분에 다음 개강총회부터는 사람이 모자라지는 않겠군.’
과 대표가 ‘흑흑 교수님. 학생들을 과 행사에 부를 방법이 없을까요, 애들이 너무 관심이 없어요’라고 술 먹고 술주정을 하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태현이 나온다면 안 나오던 놈들도 우르르 몰려나올 것!
‘동환이는 부르지 말아야겠군.’
* * *
“앗. 그 손에 들고 있는 건 뭐냐?!”
케인은 깜짝 놀랐다.
태현이 손에 들고 있는 건, 멋을 아는 몇몇 패션 리더들만 본다는 그 패션 잡지!?
태현도 그런 걸 본다니!
“너도 그런 걸 봐?!”
케인의 말을 들은 최상윤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넌 좀 봐야 하지 않냐?”
“무, 무슨 의미냐?”
패션 센스를 지적받은 케인은 움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은 잡지를 옆 탁자에 올려놓고서 앉았다.
“내가 보는 게 아니라 받은 거야. 저번에 광고 찍은 거 나온 거라.”
“앗! 나도 볼래!”
“옛다.”
케인에게 잡지를 던진 태현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런데 저거 나온 지 며칠 됐던데 왜 너희들은 아무도 몰랐냐?”
“그야…….”
“우리는…….”
“게임밖에 몰라서요?”
케인, 최상윤, 정수혁이 차례대로 말했다. 이럴 때는 착착 맞는 호흡!
태현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셋은 갑자기 억울해졌다.
너도 같이 게임 했잖아!
태현이 고개를 저으며 지나가자 셋은 잡지를 읽어보며 핸드폰을 들었다.
“헉. 이 화보 올라온 거 연예 기사란에 있었잖아? 왜 난 몰랐지?”
연예 쪽 기사 순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세연-김태현 화보’ 관련 기사들!
“넌 날씨 기사만 보니까 그렇지.”
“그건 그래.”
“와. 둘이 정말로 사귀는 건가? 이 부러운 자식!”
케인은 투덜거렸다. 최상윤은 ‘세상에 이렇게 멍청한 놈이 있다니’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넌 여기서 같이 살면서 둘이 사귄다고 생각하는 거냐? 진짜로?”
“어? 가능하지 않아?”
“……어떻게? 가상으로 사귀냐? 안 만나고?”
“판온에서 만나는 거지!”
“판온에서는 네가 가장 많이 붙어 다닐 텐데.”
“아, 그러네.”
케인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태현이 이세연과 만났다면 그가 못 봤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귄다고 하잖아.”
“인터넷…… 기사를…… 다 믿는 놈이…… 어디 있어…….”
“그럴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정수혁은 케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묘하게 친절한 그 태도에 케인은 수상쩍어했다.
태현과 지내면서 배운 게 있다면, 친절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
‘얘는 왜 이래?’
정수혁이 케인을 응원해 주는 이유는 하나.
‘이제 애인 없는 사람은 저 말고 케인 씨밖에 없습니다!’
태현은 물론이고 최상윤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그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케인밖에 없었다.
케인은 그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고맙다?”
* * *
“피디님. 기사 보셨어요?”
“어, 김태현 씨? 이제 완전히 연예인이라고 봐도 되겠어!”
“그렇죠?”
“그래. 난 또 방송 나오는 걸 싫어하나? 생각했는데 이렇게 나오는 거 보니까 그냥 쑥스러워서 거절한 것 같아.”
태현이 듣는다면 기겁할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혼자 사는 인간들> PD!
“오해도 풀렸겠다 진지하게 계획을 짜보자고.”
“예!”
PD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획을 구상했다.
컨셉은 태현을 주인공으로 삼은, 팀 KL의 일상이 될 것이다.
선수가 직접 프로게임단을 만들었다는 파격적인 발표!
문제는 그런 파격적인 발표를 한 이후에 팀 KL은 별다른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무슨 팀 홈페이지를 만들거나 SNS 계정을 만들거나 해서, ‘우리들이 뭐 하고 있어요’, ‘우리들 오늘 훈련했어요’, ‘우리들 이런 숙소에서 이렇게 지내요’ 하는 식으로 광고를 하고 팬들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하는데…….
팀 KL은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신비주의 마케팅인가?]
[팀 KL. 트렌드와는 ‘반대’로 간다! 과잉 홍보의 시대에 오히려 신선한 신비주의 마케팅.]
……같은 기사들이 나올 정도.
물론 그런 건 아니었고, 다들 별생각이 없어서였다.
그렇지만 그런 사정을 다들 알 리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 싶었지만 판온에서 보면 다들 화기애애하게 잘 돌아다녔고…….
결국 팬들의 궁금증은 한계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궁금해요! 공식 계정이라도 하나 만들어주세요!
-화보만 찍지 말고 뭐 하는지 좀 알려줘! 어떻게 된 게 다른 플레이어 개인 방송에서 보는 게 더 많은 거 같아!
-방송용 홍보 계정 만들면 무조건 구독할 텐데 대체 왜 안 만드는 겁니까?
이럴 때 태현 위주로 팀 KL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주는 방송을 한번 시원하게 한다면?
‘아. 대박이 보이는군. 아주 좋아. 이걸 바탕으로 다른 프로그램 여럿에…….’
* * *
“왜 갑자기 소름이 돋지?”
“뒤에서 에드안이 울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냐. 내가 그런 걸로 소름 돋을 사람이 아닌데.”
둘의 대화를 듣던 케인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야. 그런데 거기 가면 내 저주도 풀 수 있는 거 아냐?”
“풀고 싶어?”
“아, 아니. 꼭 풀고 싶은 건 아니고…….”
풀고 싶기도 한데 또 막상 풀려니 아쉬운 게, 복잡한 마음이었다.
“일단 아탈리 왕국 수도 가서 언론 플레이…… 아차, 아니, 다른 귀족 NPC들 만나서 설득부터 해야겠다.”
유배지고 뭐고 간에 다른 교단들이 호시탐탐 아키서스 교단을 노리고 있는 상황.
일단 불부터 꺼야 했다.
다른 교단들에게는 중앙 대륙 널리 퍼진 신전들과 세력이 있다면, 태현에게는 혓바닥이 있다!
“잠깐, 잠깐! 인간!”
“응?”
태현을 부른 건 스타우였다.
“내 괴식 요리를 아무도 안 먹는다!”
“……어쩌라고?”
너무 당연한 소리!
그러나 스타우에게는 당연한 소리가 아니었다.
“약속하지 않았나! 인간!”
“배우겠다고 약속했지 네 요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먹이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리고 먹였다가는 별로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스타우는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안 그래도 덩치가 작은 고블린이 저러니 더 안쓰러워 보였다.
“기껏 재료도 많이 얻었는데…….”
해변에 널려 있는 건 저주받은 해적 전사들의 시체밖에 없는데, 거기서 재료를 얻었다면…….
태현은 깊이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응?’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
태현은 스타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 마라.”
“……?”
“네 요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먹여주고 싶은 거지?”
“그렇다, 인간! 괴식 요리의 장점을 알려주고 싶다!”
“후후. 걱정 마라. 너한테 딱 좋은 자리가 있지.”
태현과 스타우의 대화를 듣던 다른 플레이어들은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
“…….”
* * *
“앗! 태현 님!”
“안녕하세요, 태현 님! 덕분에 열심히 요리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요리사 플레이어들은 태현을 보자마자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다른 영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지원!
그러나 태현의 귀에는 ‘덕분에 (네 재료로) 열심히 (사치스러운) 요리하고 있습니다!’로 들렸다.
태현은 침착을 잃지 않고 요리사 플레이어들에게 대답해줬다.
이제 너희들도 곧 끝이다!
“하하.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런데 그 고블린은 누구인가요?”
“놀라지 말라고. 무려…… 고블린 부족 내 최고 요리사야.”
“……!”
“……!!!”
“……!!!!!”
요리사 플레이어들은 깜짝 놀랐다. 부족 내 최고 요리사라니.
그런 NPC는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만나려면 몇 개의 연계 퀘스트를 깨고 깬 다음 찾아가서 ‘위대한 요리사님! 제게 요리 스킬의 비전을 알려 주십시오!’ 이래야 하는 것!
그런데 그런 요리사 NPC가 이렇게 쉽게 나타나다니.
“말도 안 돼! 그런 NPC가 이렇게 있다니……!”
“태현 님, 감사합니다! 흑흑! 역시 저희 같은 초보자들을 생각해 주시는 건 태현 님밖에 없어요!”
“응? 그런데 고블린 종족도 요리사가 있었나?”
요리사 중 한 명이 뭔가 이상한 걸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다른 요리사들이 그를 구박했다.
“왜 그래! 고블린도 요리사 있을 수 있지!”
“맞아! 저분이 앞에 계시는데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어떻겠어! 사과해!”
“이 못된 녀석! 네 종족 엘프 골랐다고 이러는 거야?”
“아, 아니…… 미안…… 그냥 별생각 없이 떠올라서 한 말이었어…….”
기껏 얻은 기회를 놓칠까봐 요리사들은 필사적이었다.
태현은 스타우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 요리사들은 매일 플레이어들에게 요리를 제공하는 요리사들이야. 너도 여기에 끼어서 같이 일하면 될 것 같아.”
“인간……!”
[괴식 요리사 스타우가 크게 감동합니다!]
[친밀도가 최대치에 도달합니다.]
태현의 시커먼 속셈도 모르고 감동하는 스타우!
스타우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약속하겠다. 인간!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보여주겠다!”
“그래! 스타우! 힘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