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79화
“김태현 백작. 아무리 브랑송 님의 뒤에 숨어도 계속 피할 수는 없을 거다. 너 같이 잡스러운 신을 모시는 교단이 카르바노그의 성물을 갖고 있는 걸 찬성할 교단은 없으니까! 우리는 물러나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와. 정말 사디크 교단 같군.”
<카르바노그의 성물을 지켜라-대륙 교단 퀘스트>
파이토스 교단의 NPC들은 당신에게 말싸움으로 진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대륙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신인 카르바노그와 그 성물은 모든 교단의 관심사!
세력이 비교적 작고 약점이 많아 보이는 아키서스 교단이 성물을 갖고 있는 걸 두고 볼 교단은 거의 없을 것이다.
파이토스 교단은 다른 교단들을 모아 아키서스 교단을 공개적으로 공격하려고 한다.
교단 회의에 참석해서 반박하거나, 그 전에 다른 교단들을 설득해서 막아라.
보상:?, ????, ?????
‘근데 내 약점을 잡으려면 사디크 교단을 잡는 게 낫지 않나?’
태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설마 다른 교단도 태현이 사디크 교단 성기사들을 영지 내에서 <사디크 교단 성기사였던 아키서스 교단 성기사>로 부려 먹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파이토스 교단 NPC들은 ‘흥! 두고 보자!’라고 외치며 사라졌다.
브랑송은 분한 얼굴로 말했다.
“김태현 백작! 저 건방진 사제들이 그대를 괴롭히려고 한다면 말해주게! 귀족들을 모아 그대의 힘이 되어줄 테니!”
“감사합니다! 브랑송 님! 흑흑! 저는 그저 명예롭게 살려고 했을 뿐인데…….”
“내가 그대의 마음을 잘 알지!”
브랑송은 몇 번이고 태현을 위로해준 다음 함선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후. 눈물 연기도 힘들군.”
“그 정도면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옆에서 구경하던 이다비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전리품 정리는 다 끝났나?”
“네. 지금 다들 나눠서 가져가고 있어요.”
“……너 지금 저거 혼자 못 먹어서 아쉬워하고 있는 거 아니지?”
“아, 아, 아, 아, 아니거든요.”
드물게 엄청나게 당황하는 이다비!
속으로 ‘아, 저걸 독점할 수 있었다면 대박이었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방송으로 대박을 쳤는데, 괜한 탐욕이 들킨 것 같아 이다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지는 않…….”
“좋아. 확인하러 가자.”
“네? 뭘요?”
“에드안이 챙긴 장비.”
“……!”
이다비는 그제야 태현이 왜 저렇게 여유로웠는지 깨달았다.
이미 저기 해적선에 들어 있는 아이템과 골드보다 훨씬 더 귀한 아이템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건 바로 갈르두의 장비들!
하나하나가 현재 플레이어들의 수준에서 구할 수 없는 수준의 유니크한 아이템들이었다.
원래 보스 몬스터를 잡아도 장비는 운이 좋으면 한두 개 나오는데, 태현은 지금 갈르두가 입고 있던 장비들을 모조리 뺏어 온 상태!
“보러 가죠!”
이다비도 그런 장비는 보고 싶었다.
상인 직업은 고급 장비를 보고 확인할수록 스킬이 늘었던 것이다.
“응? 근데 에드안 어디 갔냐?”
“그러게요?”
“너희, 에드안 못 봤냐?”
“태현 님…….”
“으헉!”
태현은 깜짝 놀랐다. 에드안의 모습이…… 괴상했던 것이다.
마치 저주받은 해적 전사들처럼, 온몸에서 문어 다리 같은 촉수가 줄줄 뻗어 나온 모습!
“몹인 줄 알았네.”
“전 케인 씨인 줄…….”
“…….”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냐뇨! 그 해적 놈 장비를 훔치고 돌아오니까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흑흑! 도와주세요!”
“음. 다가오지 말아줄래?”
“태현 님!!!”
“알겠어. 알겠어. 소리 지르지 말고 장비만 보여줘.”
영원한 불사의 목걸이:
[현재 걸려 있는 저주로 아이템 설명창을 볼 수 없습니다!]
잔혹한 영웅의 커틀라스:
[현재 걸려 있는 저주로 아이템 설명창을 볼 수 없습니다!]
두 개뿐만 아니라, 갈르두가 끼고 있던 갑옷과 각종 보호구도 다 저주가 걸려 있었다.
저래서는 아이템 확인, 착용은 물론이고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해 보였다.
에드안은 갖고만 있었는데도 저렇게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끝나지 않은 저주-해적왕의 저주 퀘스트>
대해적, 갈르두는 바다의 저주를 받아 영원히 흉측한 모습으로 떠돌아다니게 된 전사다.
오랜 시간 동안 바다를 방황하는 동안 그의 장비에는 그의 저주가 옮겨붙었다.
욕심을 부려 그의 장비를 탐한 모험가에게는 그 영원한 저주가 내려질 것이다.
저주를 풀고 싶다면 <해적왕의 영원한 유배지>로 들어가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라.
보상:?, ???, ?????
‘이런.’
태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템을 사용하든, 팔든, 하여튼 뭘 하려면 저주를 해제해야 했다.
그리고 저주를 해제하려면 <해적왕의 영원한 유배지>로 가야 하는 상황!
태현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바다는 안 가고 싶은데.’
바다에서 그 고생을 한 데다가, 지금은 해야 할 퀘스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키서스 교단 관련 퀘스트도 깨야 하고, 다른 교단 놈들이 걸어오는 시비도 받아줘야 하고, 길드 동맹이 날뛸 때를 대비해서 영지도 강화해야 하고, 거기에 아키서스 권능에 카르바노그 권능도 신경 써줘야 하고…….
‘아니. 카르바노그 권능은 굳이 안 찾아도 되겠다. 다른 거 먼저 찾아야지.’
쿨하게 카르바노그 권능 스킬은 우선순위에서 빼는 태현이었다.
어쨌든 <해적왕의 영원한 유배지>는 해야 할 일 목록 가장 밑에 있는 수준!
태현은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에드안.”
“……?”
“잘 어울린다.”
“……네?”
“그치? 이다비? 잘 어울리지?”
“잘, 잘 어울리네요!”
“……태현 님. 설마 안 풀어주시려고 이러는 건…….”
“…….”
“태현 님!!”
* * *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잘 가. 고생 많았어.”
태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떠날 준비를 하는 스미스와 악수를 나눴다.
사실 스미스 같은 랭커야말로 이번 퀘스트에서 가장 이득을 본 랭커였다.
깔끔하게 갈르두도 사냥해서 경험치도 받았겠다, 다른 경쟁자들이 이상한 유배지로 끌려가는 동안 운 좋게 피하지 않나…….
‘얘도 끌려갔으면 좋았을 텐데.’
태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채 스미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이제 갈 거야.”
“가세요. 누가 뭐래?”
“그런데 있잖아…….”
힐끔힐끔 태현의 눈치를 보는 에반젤린!
“……?”
“혹시 <고블린 만능 제작기> 나도 좀 해볼 수 있어?”
“…….”
왜 고블린 만능 제작기에 다들 집착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태현은 굳이 묻지 않았다.
그냥 받아들이고 이용할 뿐!
탁-
태현은 손을 내밀었다. 에반젤린은 그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이것이 힘든 퀘스트를 같이 한 동료 사이의 우정인가!
살짝 뭉클해질…….
“잠깐,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이건…….”
“그래. 돈 내놓으란 뜻이었지.”
“…….”
* * *
오랜만에 대형 퀘스트를 끝내고, 태현은 상쾌한 마음으로 숙소 밖을 나섰다.
태현의 전공 담당 교수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지?’
“위험하다.”
“네? 뭐가요?”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위험하다’고 말하는 김 교수!
“네 대학 생활이.”
“……아, 네.”
너무 밑도 끝도 없이 시작하는 말이라서 태현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지금 계속 휴학하고 있지?”
“네. 그렇죠.”
“곧 다가올 내년에도 휴학할 생각이었지?”
이제 한 해도 다 끝나가고, 며칠 후면 새해였다.
“그랬죠.”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해는 바쁜 해가 되리라.
게임단도 직접 만들어서 끌고 나가야 하고, 대회도 참가해야 하고…….
당연히 휴학은 물론!
“너 내년에 휴학 못 해.”
“네?!”
“규정이 바뀌었어. 휴학 기간에 제한 있는 걸로.”
“아니, 뭔…… 대학이 이렇게 선량한 학생을 괴롭혀도 되는 겁니까!”
“……네가 선량한가?”
“등록금 꼬박꼬박 내고 다녔으면 선량한 거죠!”
“시끄러. 내가 바꾼 거 아니니까 따지려면 총장한테 가서 따…… 너 어디 가냐?”
“총장님한테 가서 따지라면서요? 갔다 오겠습니다.”
“야, 야! 미쳤냐!”
김 교수는 식겁해서 태현의 팔을 붙잡았다. 이 자식은 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5분 정도의 설득을 통해 김 교수는 간신히 태현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 봐라.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계획을 세우면…… 요즘 시대가 좋아져서 다 대부분 인강으로 처리할 수가 있어요. 학교를 굳이 안 나와도 된다고.”
“근데 일주일에 하루는 나와야 하잖습니까.”
“하루는 양보해! 넌 전공까지 인강으로 때울 생각이냐!?”
“제 입장에서는 가상현실 기술 나온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이렇게 직접 얼굴 보는 거에 집착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냥 판온에서 강의를…….”
김 교수는 태현을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약간 미친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네가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길을 가는 건 알겠는데 다니고 있는 이상 이 정도는 해야지. 이 녀석아.”
“으음…… 뭐 다른 제도 없습니까? 저처럼 선량한 학생을 구원해 줄…….”
“없어.”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태현은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하루, 1교시에는 학교를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끄으으윽…… 크흑흑…….”
“그게 그렇게 괴로워할 일이냐?”
김 교수는 당황이 반, 어이없음이 반 섞인 얼굴로 태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회에서 안 좋은 성적 거두면 학교 탓할 겁니다.”
“그, 그만둬라. 그러지 마.”
안 그래도 요즘 한국대학교 차원에서 이미지를 만들겠다고 이것저것 하고 있는데 태현이 대회에서 ‘한국대가 날 망쳤어!!’이러면 별로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다.
‘저 친구 무슨 과지?’→‘국어국문학과입니다’→‘담당 교수가 누구더라?’→‘안 돼!’
김 교수는 태현을 달래며 말했다.
“야, 너는 잘하니까 학교 다니면서도 잘할 거야. 맞다. 이거 봐라. 너 나온 거 나도 봤어. 아주 잘 찍혔던데?”
어린아이도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화제 전환이었지만, 김 교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손에는 태현과 이세연이 나온 화보 잡지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뭡니까?”
“응? 아니, 너 나온 거잖아?”
“제가 나왔다고요? 뭐 약점 같은 거 공략한 잡지인가?”
“……패션 잡지야…….”
“……??”
태현의 얼굴을 보고 김 교수는 깨달았다.
이 녀석…….
자기가 나온 광고도 까먹고 있었어!
“아아. 그거요. 알고 있었죠. 하도 바쁘고 정신없어서 잊고 있었네요.”
아무래도 거짓말 같았지만 김 교수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어쨌든 화제는 성공적으로 돌렸으니까.
“저 좀 읽어봐도?”
“설마 한 번도 안 읽은…… 됐다, 읽어라.”
“하하. 감사합니다.”
태현은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잘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이 이렇게 따로 나온다는 건 상당히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이세연은 어떻게 적응하고 다니는 거지?’
“그런데 태현아.”
“네. 듣고 있습니다.”
말하면서 태현은 화보를 훑어보았다.
‘으엑.’
손발이 오그라드는 낯간지러운 문구들!
<두 선남선녀> 같은 문구는 애교인 편이었다. 태현은 질린 표정으로 페이지를 촥촥 넘겼다.
<판온 1 때부터 호흡을 맞춰온 두 커플은…….>
‘뭔 호흡? 서로 죽이려는 호흡을 말하는 것인가?’
아무리 옷을 팔아먹어야 한다고 해도 그렇지, 미디어가 이렇게 진실을 왜곡해도 된단 말인가!
태현은 분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악플 달아야지.’
광고주가 듣는다면 기겁할 생각!
그사이 김 교수는 자기가 할 이야기를 다 했다.
“내년에 복학하면 과 행사는 좀 나와 줘라.”
“네. 네?”
“너 분명 ‘네’라고 말했다?”
태현은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뭔 뜬금없는 소리?
“아니,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