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75화
순간 에반젤린의 얼굴에 질린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리 보스 몬스터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 HP에 이 회복력은 정말…….
정말 잡으라고 만든 거 맞아?
그 순간 갈르두가 검을 휘둘러서 주변에 폭발을 일으켰다.
“이런! <태양의 굴절!>”
스미스가 재빨리 탱킹 스킬을 사용하며 막아냈지만, 갈르두가 원한 건 그 짧은 틈이었다.
-일어나라!
“막아!”
촤아악-
[갈르두가 부하들을 불러냅니다!]
다행히 모든 부하를 전부 불러낸 건 아니었다.
폭탄 함정으로 인해 하도 전력이 많이 날아가서 그런지, 나온 건 갈르두를 따라다니던 정예 부하들 정도!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히 압박이 됐다. 그들도 만만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 있을 때에는 해적단의 선장이었지만 죽고 나서는 내 노예가 된 자들이여! 가서 죽여라!
선장 복장을 하고 무기를 휘두르는 정예 전사들이 덤벼들자, 순식간에 플레이어들이 밀려났다.
“제가 막겠습니다. 날 따라와라!”
아농 백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다시 덤벼들었다.
콰직!
완전히 중무장한, 번쩍거리는 군마용 갑옷을 입은 말들이 해적 전사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그 틈을 타 아농 백작과 기사들은 무기를 휘둘러 닥치는 대로 전사들을 두들겨 팼다.
“잘했다, 아농 백작!”
태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달려들었다. 부하들만 맡아주면 갈르두를 상대하는 건 한층 쉬웠다.
랭커들과 고렙 플레이어들이 앞에. 나머지 전력은 뒤에서 원거리 공격.
그 많은 전사들을 데리고 온 갈르두가 혼자 포위망에 갇혀 꽁꽁 묶여 두들겨 맞고 있었다.
갈르두는 맞으면서도 매섭게 반격해왔지만, 스미스와 에반젤린이라는 두 랭커 탱커가 있는 상황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았다.
재수가 정말 없는 플레이어나 맞고 로그아웃될 뿐!
-크악, 크악, 크아악! <심해 마수 소환>!
“……!”
바다 쪽 함선에서 거대한 굉음과 함께 붉은 크라켄들이 나타났다.
거대한 문어처럼 생긴 전투형 마수들!
시간만 주면 잡을 수야 있지만, 지금 갈르두가 원하는 건 바로 그 시간이었다.
내버려 두면 마수들이 달려들어서 이 포위망을 붕괴시킨다!
“태현 씨. 어떻게 합니까?!”
스미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 마라. 준비해 놓은 게 있지.”
“……?”
스미스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직도 숨겨 놓은 패가 있었다고?
대체 그게 뭐지? 그럴 만한 건 안 보였는데…….
“가자!”
“……???”
요새 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뛰쳐나온 대장장이들!
그걸 본 스미스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저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마수들을 상대한단 말인가?
폭탄을 던지려고 해도 가기 전에 로그아웃 당할 것이다.
“태현 씨! 저건 좀…….”
“저걸로 어떻게 막으려고!”
* * *
“준비됐냐?”
“오케이! 날려!”
뛰쳐나온 대장장이들은 곧바로 달려가지 않았다.
달려가 봤자 마수들이 원거리 공격을 하면 바로 죽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대신 선택한 방법은 바로 기계공학이었다.
<사람도 날리는 투석기>!
폭탄 말고 다른 걸 만든다는 게 슬프고 괴로웠지만 그들은 참았다.
더 크고 더 강한 폭탄을 날려서 터뜨릴 기회를 위해!
그들은 폭탄을 잔뜩 몸에 매단 후 투석기 위에 올라갔다.
“지금!”
투웅-
투석기가 힘차게 돌아가고, 그 위에 탄 대장장이들이 강하고 빠르게 날아갔다.
슈우우욱-
“3, 2, 1…….”
펄럭!
공중에서 날아가던 대장장이들이 <조잡하게 만들어진 일회용 글라이더>를 폈다.
이것도 기계공학 아이템!
날아다니는 탈것에 비해 쓰기가 어려워서 별로 찾는 사람도 없는 아이템이었지만, 이럴 때는 쓸 만했다.
애초에 일회용으로 쓰려고 만들었으니 공격에 맞아서 부서져도 괜찮은 것이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날아가는 대장장이들을 보며 기겁했다.
“쟤, 쟤네들 뭐야?”
“후후후…….”
그 모습에 가브리엘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건 우리가 자랑하는 자폭 전투의 새로운 경지…… ‘비행 자폭’이다.”
“…….”
“…….”
그 말을 들은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슬슬 뒷걸음질 쳐서 거리를 벌렸지만 가브리엘은 눈치채지 못했다.
“기존의 자폭 전투는 상대방을 방심시켜야 하거나, 상대방을 함정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거리를 좁히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으면 한 번에 거리를 좁혀서 자폭을 시도할 수 있…… 다들 어디 갔지?”
그들이 떠드는 사이 대장장이들은 쏜살같이 날아갔다.
-케에에에에에엑!
접근하는 적을 눈치챈 마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공격을 퍼부었지만, 대장장이들은 요리조리 기동하며 공격을 피했다.
퍼석!
몇 명은 스친 공격에 맞아 글라이더가 부서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왔으니까!
“간다!”
“낙하! 낙하!”
그들은 떨어짐과 동시에 마수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최대한 가까워진 그때에 바로…….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자폭!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HP가 0으로 되어…….]
대장장이들은 레벨 업과 동시에 로그아웃!
바다에서 기어 나오려던 마수들이 일제히 제압당한, 막강한 화력이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리고 할 말을 잃었다.
레벨 100도 안 되는 비전투 직업이 보여준,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
“저, 저게…….”
“무슨…….”
상황을 보고 있던 이다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있잖아요.”
“네?”
“대장장이들이 꼭 타서 같이 날아갈 필요 없이, 시한폭탄 같은 걸 만들어서 날려 버리면 되지 않나요? 그러면 같이 죽을 필요가…….”
“……!”
가브리엘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이다비는 그걸 보고 설마 싶었다.
설마 정말 저 생각을 못 했다고?
“아, 아니. 그러면 조준이 부정확하잖습니까. 조준이 생명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물론 가브리엘과 대장장이들은 전혀 그런 이유로 한 게 아니었지만.
“그렇긴 하네요.”
“그리고 그렇게 하면 멋이 없고…….”
이게 진짜 이유!
“네?”
이다비는 순간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 * *
“태현 씨.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분들은 정말 대단한…….”
“말할 시간에 갈르두나 패라.”
태현은 행운의 일격을 중첩시키면서 갈르두를 후려 팼다.
퍽! 퍼퍽! 퍼퍽!
-이 쥐새끼가……!
갈르두는 워낙 HP가 높고 회복 속도가 빠르다 보니, 어지간한 공격은 피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한 가지 피하는 게 있다면, 태현의 창 공격!
무조건 태현만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이렇게 숫자가 많은데 나만 신경 쓰냐?’
태현은 입맛을 다셨다.
지금 상황만 보면 갈르두를 압도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갈르두에게 데미지를 입혀야 하는데 갈르두는 압도적인 HP와 회복력으로 버티고 있었고, 오히려 조금씩 소모되고 있는 건 공격대 쪽이었다.
태현이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어서 갈르두를 무너뜨려야 했는데 갈르두는 태현만 무조건 경계하고 있었다.
‘도발을 너무 많이 했어!’
덕분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갈르두라는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수비나 회피에 덜 신경을 써도 됐지만,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공격이었다.
-크아앗! <심해의 저주>, <망자의 저주>, <바다 마수의 저주>…….
쾅! 쾅! 쾅!
태현만 집요하게 노리며 저주를 퍼붓는 갈르두!
태현은 공격을 포기하고 회피에 전념했다. 괜히 공격 좀 더 넣겠다고 나대다가 로그아웃 당하는 수가 있었다.
왼쪽, 위, 그다음은 우측 대각선 뒤…….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저주를 피하는 태현의 모습에 공격대 플레이어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대체 어떻게 피하는 거지?”
물론 태현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너희 어그로 안 끄냐?!”
태현은 날아오는 저주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탱커들에게 외쳤다.
“끌, 끌고 있어! 끌고 있는데……!”
“갈르두가 저희를 안 봅니다!”
완전히 무시 수준!
태현은 고민했다.
‘지금 아키서스의 저주를 써야 하나?’
아키서스의 저주.
하나의 상대와 싸울 때는 거의 사기 수준의 저주 스킬이었다.
문제는 지금 아키서스의 저주를 써도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아키서스의 저주는 행운 관련 저주.
태현이 알기로, 행운이 낮으면 나타나는 효과는 스킬이 실패하고 맞는 데미지마다 치명타가 터지고 장비가 쉽게 망가지고 등등…… 이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갈르두는 지금 쓰는 스킬이 태현에게 날리는 저주 정도였고, 나머지 공격대는 평타만으로도 충분히 압도하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치고는 쓰는 스킬이 상당히 적은 편!
무턱대고 아키서스의 저주를 썼다가는 행운 스탯만 잃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꼴이 될 수 있었다.
‘고대의 망치로 무기부터 부숴야 하나? 부하들을 못 살리게? 놈이 날 경계하고 있어서 무기 바꾸고 덤벼들면 대응하겠지. 그렇다면 역시 저주를…….’
1초 사이에 태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 *
아탈리 왕국 해안가 공방전은 수십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유명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곧 있을 대회를 준비하느라 힘을 아끼고 있는 지금, 오랜만에 나타난 대형 이벤트!
게다가 참가한 랭커들의 이름도 쟁쟁했다.
태현은 물론이고 케인, 스미스, 에반젤린, 앨콧, 크로포드 등등.
수십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생중계를 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고 있는 생중계 방송은 하나였다.
파워 워리어 길드 방송!
-안녕하십니까. 최민수입니다! 지금 날아간 대장장이들은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가 자랑하는……!
방송 위치도 위치고, 이번 공방전에 관련된 각종 고급 정보들을 아낌없이 풀어내는 파워 워리어 길드 방송은 다른 방송과 차원이 달랐다.
저 기사단은 무슨 기사단이냐, 지금 나타난 골렘은 무슨 골렘이냐, 이 요새는 언제 어떻게 지은 요새냐…….
태현에게 허락받고 들은 정보로 쏠쏠하게 남겨 먹는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
“시, 시청자 수 10만 명 돌파!”
“신기록…… 신기록……!”
길드원들은 손이 벌벌 떨리는 걸 느꼈다. 이게 빅 이벤트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천장을 뚫고 올라갈 줄이야!
“더 해봐요, 최민수 씨! 뭔가를 더 해보라고요! 지금이 기회야!”
“뭘 더 해?! 지금 최선을 다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최민수는 당황했다. 물론 그도 지금 이렇게 기회를 얻었을 때 더 크게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만한 게 없었다!
“아무 말이나 해볼까?”
“무슨 아무 말?”
“저기 있는 랭커들에 대한 소문이라던가…….”
“……뒷감당할 수는 있고?”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진지하게 공방전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건 바로 대형 길드 플레이어들!
“……말도 안 돼. 이 정도였다고?”
“어떻게 이렇게 많은 플레이어들을 모았지? 김태현은 길드도 없는데…….”
“플레이어도 플레이어지만, 다른 게 더 대단해. 저 골렘은 어떻게 구한 거지? 무슨…… 거기에 저 폭탄의 양은 대체 뭐야? 기사단은 아직도 부릴 수 있었고?”
그들은 경악의 눈으로 공방전을 지켜보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영지의 전투력!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는 일반적인 도시나 성과 달랐고, 시설도 부족한 편이라 깔보고 있었는데 막상 공방전이 시작되니 무슨 숨겨진 전력들이 샘솟듯이 나왔다.
그리고 그 전력들 하나하나가 보는 사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전력이었다.
‘우리가 만약 공성전을 벌인다면 이길 수 있을까?’
아무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