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73화
카르바노그가 신전 한구석에 자리 잡아준 덕분에, 영지에는 어마어마한 보너스가 들어갔다.
그렇지만 태현 개인으로 봤을 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키서스나 사디크에 비해 확실히 떨어지는 전투 능력!
기껏해야 있는 권능이 <토끼 지배>였으니…….
안 그래도 갈르두와 싸워야 하고, 앞으로는 교단과 마찰이 있을 수도 있는 태현에게 필요한 건 전투력이었다.
‘확인.’
조금 더 깨어난 카르바노그의 무딘 창:
내구력 ∞/∞, 공격력 0.
스킬 ‘카르바노그의 발목 공격’ 사용 가능. 스킬 ‘카르바노그의 진심 저주’ 사용 가능.
카르바노그의 인정을 받아야 착용 가능.
카르바노그의 성물 중 하나인 카르바노그의 창이다. 비록 날이 무뎌져 있지만 그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 카르바노그의 인정을 받은 자만이 이 창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카르바노그가 정체를 드러냈기에 창의 힘은 조금 더 늘어났다.
아이템 등급:전설
이름이 좀 달라지고, 스킬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카르바노그의 진심 저주>
창의 힘을 모두 사용해 상대를 1분간 토끼로 만듭니다. 상대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창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 * *
카르바노그가 영지에 끼친 영향을 자세하게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태현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갈르두가 언제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지가 뭐가 달라졌나 확인하다가 대비에 늦는다면 그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었다.
땅, 땅, 땅-
해안가에는 요새 작업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다행이군. 아직 안 쳐들어왔나.’
“이봐. 맥크레니 상단주에게 가서 해적들이 여기로 상륙할 거라고 말해줘. 왕국의 도움을 가능하면 전부 받고 싶거든.”
“예. 알겠습니다.”
“잘 부탁하지.”
공적치 포인트를 쓰지 않고 부탁하는 것이라 어떻게 굴러갈지 태현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왕국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은 있었다.
이건 태현의 영지를 방어하는 전투기도 했지만, 더 크게 보면 갈르두라는 해적이 아탈리 왕국을 침범하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당연히 계속 있으면 왕국에서도 왕국군을 움직일 것이다.
문제는 그게 언제 오느냐!
빨리 와서 같이 싸워주면 태현으로서는 정말 좋겠지만, 최악의 경우 일이 다 끝나고 나서나 올 수도 있었다.
갈르두야 여기를 점령하러 온 게 아니라 태현의 목을 치러 온 것이었으니 영지만 불태우면 얌전히 물러날 테고.
그러면 태현만 피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 아예…… 다른 영지를 휘말리게 할 수는 없나?’
이 와중에도 물귀신 작전을 쓸 수 없나 고민하는 태현이었다.
가능하면 내 영지보다는 다른 귀족의 영지에서 싸웠으면 좋겠다!
‘여기 해안가 요새가 박살 나면……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가 아니라 남쪽에 있는 다른 귀족의 영지로 후퇴하면…… 갈르두가 쫓아오려나? 아니면 날 무시하고 골짜기로 가려나?’
태현의 생각에 갈르두는 태현을 쫓아올 것 같았다. 태현은 그만큼 갈르두를 열 받게 했던 것이다.
‘좋아. 해안가가 뚫리면 다른 귀족 영지로 튀어야겠군.’
다른 귀족 NPC들이 들었다면 당장 기사단을 이끌고 태현을 족치러 왔을 것!
* * *
끼이익, 끼익-
“올려! 더 올려!”
“목책은 충분해! 불에 안 타게 보강까지 다 했어!”
“여기 있는 벽에 뭐라도 좀 더 붙이자! 전부 다 갖고 와!”
“앞에 해자는 이 정도면 되나?”
“좋았어! 계속 파!”
바다와 맞닿아있는 넓은 해안가.
거기를 지나 위로 올라오면 앞에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는 요새가 나왔다.
“근데 더 높게 쌓는 게 낫지 않나?”
“낮게 여러 겹 쌓으래. 뭐 생각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라고 한 거겠지?”
“하긴. 난 티켓만 받으면 돼.”
요새 벽은 높게 쌓는 대신, 낮게 여러 개 쌓았다.
벽 하나가 점령당하더라도 다음 벽으로 후퇴해서 싸울 수 있도록!
“여기 망루, 사다리 없는데?”
“아차. 사다리 갖다 놓아야겠다.”
“어…… 저거 배 같은데?”
“여기 지나가는 배가 한두 척이야? 일이나 도와.”
“아니, 이쪽으로 오고 있잖아.”
“……!”
시력 좋은 궁수 플레이어가 가장 먼저 발견하고 외쳤다.
“적이다!!”
멀리서 갈르두의 대함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돌격이다!”
“그렇다! 바로 돌격이다! 우리의 뜨거운 심장과 뜨거운 피를 갈르두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것이다!”
“해적 지도자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돌격 명령을!”
갈르두가 나타났다는 말에 우르르 달려와 눈빛을 빛내는 해적 NPC들.
태현은 그들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뭔 개소리냐?”
“그러니까, 돌격을…….”
“왜?”
“돌격이…… 멋있으니까요?”
“뜨겁고…… 어…… 피도 끓고…….”
“애들아.”
이제 아쉬운 게 없는 태현은 해적들을 상대할 때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우르크 앞바다에서는 해적들한테 잘못 굴면 배에서 던져질까 봐 조심했지만, 여기는 태현의 영지였다.
전혀 눈치 볼 이유가 없는 것!
“내가 명령 내리기 전까지는 입 닥치고 가만히 있자.”
“…….”
“…….”
“……사람이 달라졌어…….”
해적 하나가 투덜거렸지만 태현은 무시했다.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해적들이 당신의 말을 확실하게 듣습니다.]
[고급 전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해적들이 당신의 말을 존중합니다.]
“김태현 백작님.”
“아. 아농 백작.”
태현은 재빨리 태도를 바꾸었다.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아농 백작!
이번 한 번을 쓰면 더 이상 힘을 빌릴 수 없다는 게 아까웠지만, 그렇다고 태도를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언젠가 뜯어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아농 백작은 존경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해적들의 습격에 막기 위해서 이렇게 직접 나서시다니…… 백작님은 모든 귀족의 모범이십니다.”
“내가 좀 그렇지.”
앞뒤가 많이 생략되었기에 아농 백작은 태현이 ‘순수한 마음으로 아탈리 왕국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고 생각했다.
“이번 한 번이 백작님과의 마지막 인연이라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아쉬우면 더 도와줘도…….”
“그건 안 됩니다.”
“쳇.”
“방금 ‘쳇’이라고 하셨습니까?”
“잘못 들었겠지.”
태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아농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제가 저희 기사단의 위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무슨 위력?”
“바로 돌격입니다. 저 해적선에서 사악한 해적들이 내리면 바로 돌격을…….”
“아, 필요 없다고!”
“……?!”
* * *
‘이놈이고 저놈이고 돌격을 왜 이렇게 좋아해?’
기껏 해안가에 잔뜩 폭탄을 매설하고 함정을 파놓은 상태.
그런데 돌격은 무슨 돌격이란 말인가.
확 저승으로 돌격시켜 버릴까 보다!
“태현 님. 플레이어 중에 몇 파티가 먼저 나가서 선공을 가하고 오겠다고…….”
“내가 가서 대가리에 선공 가하기 전에 입 다물고 있으라고 전해. 이것들이 주제 파악을 못 하고…… 가봤자 죽기밖에 더해?”
“……정, 정말 그렇게 전할까요?”
“어. 그렇게 전해.”
커다란 이벤트를 앞두고 태현의 성질은 매우 날카로워졌다.
옆에서 지나가던 앨콧은 그걸 보고 침을 삼켰다.
저건 판온 1 때 많이 보던 개 같은 모습!
‘상, 상대하지 말아야겠다.’
삐걱-
“……!”
하필 지나가던 길에 나뭇가지가 있어서 부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앨콧?”
“어, 네?”
무심코 나오는 존대!
“왜 존대해? 평소처럼 굴어.”
“어, 응.”
“그리고 조용히 좀 걸어라. 시끄럽잖아.”
“네…….”
그러는 사이 파워 워리어 길드원은 가서 말을 전했다.
“대가리에 선공 가하기 전에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하시는데요?”
물론 그 반응은 격했다.
“웃기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역시 이건 좀 심했다니까…….’
파워 워리어 길드원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울상을 지었다.
아무리 태현이라도 저렇게 말하면 플레이어들이 화를 낼…….
“김태현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맞아! 그 김태현 님이 그런 품위 없는 소리를 할 리가 없지! 너 이 자식. 어디서 수작이야! 네가 도중에 말을 바꾼 거지!”
“…….”
파워 워리어 길드원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이 자식들은 눈깔을 폼으로 들고 다니나?
“……그러고 보니 제가 잘못 들었던 것 같습니다. 놈들의 대가리에 선공을 가하고 오라고 하셨네요.”
“역시!”
“김태현 님은 우리를 믿고 계셨어!”
“가자!”
* * *
“어? 뭐야? 저것들. 왜 뛰쳐나가?”
태현은 짜증 섞인 얼굴로 요새 앞을 노려보았다. 케인이 옆에서 대답했다.
“멋대로 튀어나왔나 본데?”
“꼭 말 더럽게 안 듣는 놈들이 있지.”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해. 난 분명히 경고했어.”
자기 주제 파악 못 하고 날뛰는데 태현이 가서 구해줄 생각은 없었다.
한편, 갈르두의 함대 쪽에서는 다른 고민이 일어나고 있었다.
-크으으으…….
-갈르두 님. 무슨 일이십니까?
-빠르게 왔다고 생각했는데도 그새 이렇게 요새가 만들어지다니…… 하나하나가 얄밉고 짜증 나는 놈이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정말 하나하나가 얄밉고 짜증 나는 놈…… 어떻게 할까요? 돌려서 다른 상륙 지점을 찾아볼까요?
-내가 저딴 놈의 얕은 수작이 두려워서 배를 돌릴 것 같으냐!
쾅!
-죄, 죄송합니다!
-배를 돌려서 다른 곳에 내려 돌아가는 건 저놈이 바라는 거일 거다. 정면으로 가서 뚫는다. 놈에게 힘의 격차를 보여준다!
-예!
-그렇지만 수상하군…….
원래 갈르두의 성격이었다면 바로 해안가에 배를 붙이고 내려서 돌격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강력하기에 오만한 성격, 그게 바로 갈르두였다.
그러나 태현에게 엿을 먹었기에 갈르두는 태현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진 상태였다.
보스 몬스터의 성격도 바꿀 정도로 세게 후려갈긴 뒤통수!
-저 해안가에 무언가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겠…… 음?
“와아아아!”
“가자! 가자!”
한 파티는 말을 타고, 다른 파티는 뛰어서 돌격하고 있었다.
해안가에 내리는 갈르두의 부하 전사들에게 한 방 먹여주고 돌아올 생각!
미친 생각 같았지만, 그들에게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먼저 그들은 갈르두와 직접 싸워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옛날 동영상 정도만 찾아봤을 뿐.
그러니 갈르두와 만났을 때 그들의 스탯이라면 일단 온갖 페널티부터 받고 시작한다는 걸 몰랐다.
그리고 그들은 갈르두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보통 이런 대규모 싸움에서 보스 몬스터는 뒤늦게 나타나는 법이니, 처음에는 좀 약한 몬스터들만 나올 것 아닌가.
그렇다면 선공을 가하고 튀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공적치 포인트는 포인트대로 챙기고, 이런 거대한 싸움에서 인상은 인상대로 남기고.
“이거 방송 찍고 있는 거 맞지?!”
“찍고 있어! 가자!”
“김태현도 우리가 하는 걸 보고 감탄할지도 몰라! 진짜 그럴 거 같은 기분이…….”
-……함정이 아니었군.
갈르두는 의심을 버리고 말했다. 저런 같잖은 놈들의 돌격이라니.
심지어 뒤에 요새를 내버려 두고!
이건 여기 모여 있는 전사들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해안가에 함정이 있나 싶었는데, 그냥 준비가 덜 된 게 분명했다.
-오합지졸들이 아닌가. 어디서 저런 놈들을 데리고 오다니. 김태현 그놈도 많이 절박했나 보군.
-갈르두 님의 위엄에 겁을 먹은 게 분명합니다!
-그렇겠지. 으하하하! 저놈들을 쓸어버리고 돌격해라!
끼이익-
배에서 마법 대포의 포구가 불쑥 튀어나왔다.
덤벼드는 플레이어들은 그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다.
“해적 왜 안 내리냐?”
“빨리 내려라! 돌격 보너스 받고 때려야 데미지가…….”
슈웅- 쾅!
[HP가 0으로 내려가 사망합니다.]
[HP가 0으로 내려가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