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36화
<카르바노그의 무딘 창>을 어떻게 써먹을지 궁리하던 태현은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렇게 머리를 굴려야 써먹을 수 있는 아이템보다는 그냥 평범하게 성능 좋은 아이템이 더 낫지 않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의문!
태현은 워낙 쓰레기 같은 직업이나 아이템이 나와도 ‘이걸 어떻게든 쓸 수 있을 거야’ 하는 사람이었다.
잔에 상한 우유가 반쯤 담겨 있을 때 일반인은 ‘에이 우유가 상했네’라고 하겠지만, 태현은 ‘흠 저걸 누군가에게 먹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람!
어쨌든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이제까지는 그냥 받아들였는데, 생각해보니 괜히 억울해졌다.
중앙 대륙의 유명한 교단 관련 아이템들은 그냥 다 평범하게 성능 좋은 아이템인데, 왜 태현과 관련된 신들은 다 성능이 이상하단 말인가!
“태현 님.”
“응?”
고민하던 태현에게 이다비가 말을 걸었다. 태현이 몸을 돌리자 이다비가 한 걸음 물러섰다.
“잠깐. 그 창은 좀…….”
“안 찔러, 안 찔러. 왜 찌르겠어 내가?”
“……나는 뭔데 이 자식아?”
넘어진 케인이 꿍얼거렸지만 태현은 무시했다.
“오크들의 보물 창고를 털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랬지?”
“카라그가 난리를 쳐서 박살이 났겠지만, 보석이나 광석 같은 건 장비 아이템과 달리 잘 안 부서지니까 창고 잔해 뒤지면 나오지 않을까요?”
“아, 그렇긴 하겠네.”
상인 직업답게, 이다비는 이야기를 듣고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거기 카라그가 자리 잡고 있다며?”
악마의 피를 받아들이고 맛이 가버린 카라그는 박살 난 최심부 요새에 남아 그대로 자리를 잡아버렸다.
즉 창고의 아이템을 발굴하려면…….
카라그와 맛이 간 오크 친구들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오싹-
케인과 에드안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둘 다 무언가를 직감한 것이다.
“안 시키니까 걱정 마라.”
“진짜? 진짜지?!”
“믿고 있었습니다, 태현 님!”
케인과 에드안은 격하게 반응했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템 좀 더 챙기자고 거기 가는 건 너무 위험하지. 그 정도로 만만한 놈도 아니고…….”
거기 창고에 무슨 목숨을 걸 만큼의 아이템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긴 하네요.”
“그렇지. 만약 하려면 일단 케인을 앞으로 세워서 미끼로 삼은 다음 에드안을 들여보내서 잔해더미를 뒤지게 하는 식이겠지만…….”
“…….”
“…….”
묘하게 구체적인 계획!
“안, 안 시킨다면서?”
“아니, 그냥 한다면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는 거잖아?”
‘……우르크 지역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해!’
케인은 결심했다.
우르크 지역은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 * *
“어? 어디 가냐?”
“…….”
바닥에 누워서 뒹굴거리는 케인을 보며, 태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취업 못 한 아들을 쳐다보는 부모님의 기분!
“촬영하러 간다.”
“뭐? 촬영? 맛있는 거 사와! 근데 뭔 촬영?”
“광고 모델. 이세연이랑 같이 찍어야 해.”
“헉, 부럽다! 왜 너만 좋은 거 해…… 으아악! 으악! 왜, 왜?!”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떠들던 케인은 태현한테 멱살을 잡혀 앞뒤로 흔들렸다.
“야, 캡슐 들어가. 게임 안이면 패도 괜찮으니 편한데.”
“네가 말하면 진심 같으니까 무섭다고!”
“진심이거든?”
태현이 케인을 괴롭히는 동안, 최상윤이 하품을 하며 안에서 나왔다.
“뭐야, 케인이 또 케인했어?”
짧은 사이 숙소에 퍼진 유행어!
“나 촬영하러 갈 테니까 둘이 알아서 놀고 있어.”
“오. 스폰서 따오는 거야?”
“뭐?! 스폰서?! 진짜?!”
스폰서!
그건 뭔가 잘나가는 것 같은 게임단의 상징!
……까지가 케인의 상상력의 한계였다.
벌떡 일어서는 케인. 태현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라.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거 없으니까.”
“그래도 그게 어디야! 아, 맞다 저번에 <혼자 사는 인간들> PD님이 전화해 주셨…… 으아아! 왜?! 왜?!!?”
다시 케인은 멱살을 잡혀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피곤한 거 아니야. 그냥 케…… 아니, 게임단 놈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지.”
“하긴. 너 같은 경우는 감독이나 코치 없이 너희들끼리 훈련 메뉴 짜고 진행해야 하니 몇 배로 힘들겠네.”
이세연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순간 어라 싶었다.
그들이 뭐 훈련을 하고 있었나?
‘잠, 잠깐. 훈련도 따로 시켰어야 했나?’
생각해 보니 다른 게임단들은 눈에 불을 켜고 각종 대회를 준비하고 있을 텐데, 팀 KL은 너무 안일하게 있는 거 아닌가?
“기존 게임단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신생 게임단을 만들었을 때에는 좀 놀랐는데…… 보니까 알아서 잘 하고 있는 모양이네.”
“물, 물론이지.”
“……?”
이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태현의 목소리가 좀 갈라졌던 것이다.
“방금…….”
“너도 게임단을 만들지그래?”
재빨리 화제를 돌리는 태현! 이세연은 의심하지 않고 넘어갔다.
“나는 무리야. 지금 스케줄이 안 그래도 빡빡하거든.”
“아, 예. 그러시겠죠. 게임도 하고 방송도 하고~ 잠깐. 때리지는 말자.”
태현의 옆구리를 찌르려 손을 들었던 이세연은 손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너 여기 브랜드 모델 한 적 있어?”
“……보통 오기 전에 좀 찾아보지 않아? 응. 있지.”
프로스다스 브랜드는 판온 관련 이벤트를 많이 하는 브랜드였다. 이세연 같은 유명 랭커+유명 방송인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때?”
“전체적으로 어떠냐고? 그냥 무난해. 촬영장 분위기도 재밌고. 담당하는 분도 재밌고. 너도 여기하고 사이좋게 해서 나쁠 건 없을 거야. 나는 전속 계약은 안 했지만 꾸준히 시즌 촬영은 하고 있거든.”
이세연의 말에서는 연예인 선배로서의 진지한 충고가 느껴졌다.
물론 태현이 그런다고 ‘감사합니다, 선배님!’ 할 사람은 아니었다.
“전속 계약 아니었어?”
“아니었어.”
“전속 하기에는 좀 부족해서?”
“……저쪽 전속 해주기에는 내가 아까워서! 이게 좋은 마음으로 충고를 해줘도 진짜!”
“윽.”
이세연의 공격이 옆구리에 박혔지만, 단련한 덕분에 태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쪽이 부족하냐는 질문이었는데…….’
* * *
둘을 맞이한 프로스다스의 김 팀장은 이동팔 대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느끼한 미남 느낌!
“대표님은 잘 지내시지?”
“물론이죠.”
“한번 뵙고 싶은데 서로 바빠서…… 참.”
‘형제는 아니겠지?’
태현은 실례되는 생각을 했다. 순간 김 팀장이 고개를 돌려 태현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앗. 들켰나?’
“오오…….”
“……?”
“사진으로 봤을 때 괜찮다 싶었는데 역시 괜찮군. 운동을 하나?”
“아, 예.”
“얼굴도 괜찮고…… 왜 이런 얼굴을 가졌는데 더 빨리 유명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그야 메이크업…….”
“어허. 서로 비밀은 건드리지 말자.”
태현과 이세연의 대화를 듣던 김 팀장은 웃었다.
“둘이 생각보다 친하구나? 잘됐네. 화제성도 있고, 같은 회사기도 해서 불렀지만 호흡 안 맞으면 이쪽에서도 피곤하거든. 호흡 맞으면 우리야 고맙지.”
“예? 누가요?”
“호흡 안 맞는데요?”
“그래. 그래.”
김 팀장은 따뜻한 눈빛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태현은 갑자기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저 눈빛을 최근에 어디서 봤더라?
이세연과 방송이 나간 직후에 김태산이 와서 ‘녀석, 사귀냐?’ 했을 때 보내던 눈빛!
“어쨌든 같이 잘 해봐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 촬영장만큼 모델들이 좋아하는 곳이 드물어. 훈훈하고 스텝들 일 처리 잘하고 무엇보다 디자이너가 내놓는 옷이 좋으니까. 페이 좋은 건 덤이지.”
“디자이너요?”
“나.”
“……아, 네.”
태현은 굳이 지적하지 않는 친절함을 발휘했다.
“자. 여기가 이번에 촬영할 촬영장. 저쪽이 드레스 룸, 저쪽 두 곳이 휴게실이고…….”
“화장실은 어디 있나요?”
“……저 뒤에. 지금 갔다 오려고?”
“아뇨,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촬영장은 스텝들이 온갖 기자재를 옮기며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김 팀장은 태현의 페이스에 흔들리지 않고 카탈로그를 건넸다.
“자, 이거 읽어보고. 하긴 다 읽어보고 왔겠다. 그렇지?”
“……그렇지?”
이세연은 태현을 봤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훑어보고 왔어.”
“정말?!”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네가 내 입장이 되어봐…….”
“오기 전에 읽어봤다니까. 생각보다 멀쩡하던데?”
태현은 프로스다스가 판온 관련 신상을 출시한다는 말만 들어서 이상하고 괴상한 옷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코스프레 같은 갑옷이나 그런 것들!
그런데 카탈로그에 나온 옷들은 언제 어디에 입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옷들이었다.
세련된 디자인에, 뛰어난 기능성. 거기에 판온을 하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세세한 포인트까지.
과연 잘나가는 브랜드는 이유가 있구나. 이런 걸 내놓으니 잘 나가지!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너, 모르고 있구나?”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안 봤으면 자기 탓이지.”
“아니, 카탈로그 봤다니까.”
“그거 말고, 내가 예전에 찍은 화보들을 봤어야지.”
이세연의 짓궂은 말에 태현은 순간 움찔했다. 그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타탁-
태현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세연은 잽싸게 손으로 막았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두 분, 이쪽으로 와주세요!”
사진작가가 둘을 부르자 태현은 아쉽게 폰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 * *
사진작가는 흐뭇하게 웃었다.
태현의 동작에서 처음 사진 찍는 모델의 풋풋함과 긴장이 느껴졌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문 모델이 아닌 사람을 데려와서 화보를 찍는 이상, 이 정도는 당연했다.
여기 있는 스태프들도 다 그 정도는 감수하고 하는 것이다.
‘요즘 프로들만 찍다가 이런 사람을 보니 신선한…… 응?’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포즈.
딱 거기까지가 지나자 태현은 대충 알았다는 듯이 척척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누가 보면 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모델 같은 편안함!
‘긴, 긴장감하고 풋풋함 어디 갔어?’
얼굴 되고, 안 그래도 장신인 데다가 비율까지 좋으니 누가 보면 정말 프로 모델인 줄 알 것이다.
“옆으로 쓰러지면 되나요?”
“아, 아니. 그러실 것까지는…….”
김 팀장은 사진작가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이야, 진짜 모델 같네.”
“그렇죠?”
“사실 사진 봤을 때는 이세연하고 안 어울리지 않을까 했는데…… 충분히 어울리고도 남겠어.”
프로게이머 같은 사람들을 모델로 데리고 올 때, 회사에서 외모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것까지 바라면 너무 도둑놈 심보였으니까!
원하는 건 화제성, 그거 하나였다.
그렇지만 태현과 이세연은 화제성은 화제성대로 터뜨리고 있는 데다가 외모로도 어디 가서 밀리지 않았다.
선남선녀 그 자체!
‘계약 조건을 좀 바꿔서라도 둘을 전속으로 잡아놓고 싶어지는데…….’
결과물을 보면 다른 회사들도 군침을 흘릴 것 같았다.
“이제 커플촬영으로 들어갈게요!”
“……?”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태현이 ‘……?’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이세연은 오히려 살짝 부끄러워졌다.
이런 촬영에서 둘이 같이 찍는 사진은 당연히 있는 건데, 저런 ‘왜 우리가?’하는 눈빛은 왜 보내는 거야?
“커플촬영이라니…… 같이 사진 찍힌 건 판온 1에서 너한테 망치를 휘두르던 것 정도밖에 생각 안 나는데.”
“넌 참 한결같아서 편해.”
“응?”
“아무것도 아냐. 자. 앞으로 걸어가!”
“너한테 뒤 보이면 좀 무서운…… 야, 치지는 말자! 네크로맨서가 왜 물리 공격이야?”
“현실은 게임 밖에 있어요. 김태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