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24화
“그리고 그쪽은 아쉬운 소리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 협박을 해도 되나요?”
‘아차!’
앨콧은 아차 싶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 여기 있는 태현 패거리한테 부탁을 하러 온 거였는데!
맨날 협박만 하고 다닌 탓에 습관처럼 협박부터 나온 것이다.
“아, 아니, 그건 농담이었어.”
“네. 재밌는 농담이었고 태현 님한테 전해 드릴…….”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제발 그건 전달하지 마!”
사실 태현은 앨콧한테 화낸 사실 따위는 이미 잊고 있었다.
그 뒤 바로 어떻게 된 일인지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막을 모르는 앨콧에게 지금 상황은 절박한 상황!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야 한다!
그 절박한 모습을 보고 이다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뭘 당했길래 이렇게 겁을 내지?’
이다비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현 공포증!
어쨌든 앨콧이라는 좋은 패가 들어왔는데 당연히 써먹어 줄 생각이었다.
이다비는 태현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응? 걔? 걔 좀 이상한 놈이야. 나 노리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막 자기는 엄청 착한 놈이라고 거짓말을 하더라고.
-만난 적 있었던 거 아니에요?
-나랑 만난 적이 있었나? 난 나한테 진 사람들까지 일일이 기억하지는 않아서.
-…….
‘이러니까 죽이려고 100명이 오는 거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이다비는 말하지 않았다.
태현을 배려해 주는 상냥한 마음!
-어쨌든 알아서 써먹어.
-네? 진짜 그래도 돼요?
-써먹어, 써먹어.
-파워 워리어 길드 일로 써먹어도 되나요?
-알 게 뭐야. 마음대로 써먹어.
앨콧도 모르는 사이 정해진 그의 운명!
-그보다 지금 <붉은 바위 요새>로 가려고 하는데, 여기 너무 챙길 게 많다.
-네?! 어딘데요!?
반짝이는 이다비의 눈빛!
-오크 대족장 천막 옆 창고.
-……왜 거기 있으세요?
-그러게. 나도 오려고 온 건 아닌데…… 일단 최대한 빼돌리고 남은 건 다른 곳에다 숨겨뒀다가…… 아니, 어떻게 해야 할까…….
태현은 고민하며 창고들을 훑어보았다.
원래 바로 <붉은 바위 요새>로 떠나려고 했는데, 그의 발목을 이 창고들이 붙잡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대한 창고들!
태현의 눈에는 마치 ‘가져가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덜컹-
<흑철과 루비로 만든 오크식 대검>, <고대 오크의 일곱 가지 금속으로 만든 중갑옷>, <오크식 대형 발리스타>, <분노의 비약>…….
무기, 갑옷, 화살, 포션 등 가지각색 아이템들이 가득 찬 창고!
-췩. 건드리지 마라, 마법사.
“아, 안 건드려. 애초에 마법사인 내가 왜 너희들 장비를 보겠어?”
-취익. 수상하다. 마법사가 왜 전사들의 장비를 이렇게 쳐다보는 건가?
“오해라니까.”
침착을 되찾은 태현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머리는 팽팽하게 굴러가는 중!
‘지금 내가 착용하고 있는 갑옷은 <오스턴 왕가의 비전 갑옷>이고, 무기는 <유성>과 <에다오르의 뜨겁게 끓어오르는 진홍빛 대검>을 번갈아 쓰고 있지.’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은 구경도 하기 힘든 훌륭한 아이템들이었다.
특히 <오스턴 왕가의 비전 갑옷> 같은 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구할 수 없는, 왕궁 창고에서 훔쳐…… 아니, 받아온 장비!
레벨 100도 안 되는 태현이 레벨 100 중후반대를 넘는 랭커들과 맞먹는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으니, 태현이 얼마나 좋은 장비들을 끼고 있는지 알 만했다.
‘방랑자 세트 덕분에 외투, 벨트, 장갑, 신발은 신경 안 써도 되니까 갑옷과 주무기 정도만 신경을 쓰면 되겠지.’
방랑자의 세트.
태현이 초반에 구해서 아직까지 쏠쏠하게 쓰고 있는 세트 아이템이었다.
착용 스탯 제한이 좀 변태적이라는 게 단점이었지만 태현처럼 강제로 균형 잡힌 스탯 성장을 하는 플레이어에게는 단점도 아니었다.
‘에다오르의 대검은 좋긴 하지만, 언젠가는 못 쓸 무기지.’
에다오르의 대검이나, <갈그랄의 저주가 서린 칼날 장갑> 같은 아이템들은 퀘스트 아이템이었다.
언젠가 봉인된 에슬라를 풀기 위해 바쳐야 할 아이템!
정말 강력한 장비기는 했지만 여기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이템 설명들에 <만약 손에 넣었다면 되찾기 위해 찾아올 것이다. 반드시!>가 달려 있는 것도 찜찜하고…….’
아이템에 이런 설명들이 달려 있으니, 이런 무기를 갖고 있거나 사용하면 악마들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최대한 주의하고는 있었지만…….
‘역시 <유성>을 녹인 다음, 새로 얻은 재료를 구해서 다시 무기를 만들어야겠어. <철벽>도 지금 안 쓰고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녹여서 다시 만들고…….’
다른 전투 직업 플레이어와 달리, 태현은 직접 자기 장비를 만들 생각이었다.
설마 판온 1에서 대장장이 직업을 키우던 전략을 판온 2에서 다시 하게 될 줄이야.
‘근데 내가 만드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단 말이지.’
대장장이 기술, 기계공학 스킬도 고급까지 찍은 상황.
대장장이 기술 스킬이야 벌써 최고급까지 바라보고 있는 대장장이 랭커들에 비하면 밀리겠지만, 태현에게는 그들에게 없는 몇 가지 요소들이 더 있었다.
기계공학, 행운, 신성.
이런 속성들이 장비에 반영되고, <아키서스의 화신>인 태현의 직업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려면 역시 좋은 재료들이…….’
흑철, 진은, 백금, 오리하르콘, 아다만티움, 각종 보석들 등!
대장장이 랭커가 마음만 먹으면 길드 창고를 거덜 낸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좋은 장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 비용이 드는 것!
‘1에서는 장비 하나 만들려고 길드 세 개를 털었었나…….’
당한 사람들이야 아직도 이를 갈고 있겠지만 태현은 아련한 추억처럼 떠올렸다.
어쨌든 이 오크들의 창고에서 챙길 수 있는 건 모조리 챙겨놔야 했다.
태현은 예감하고 있었다.
이번 퀘스트가 끝나면, 일이 어떻게 풀리든 이 오크들의 동네가 멀쩡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췩. 마법사! 저리 가라! 네 눈빛은 어쩐지 사악하다!
“칫.”
하도 높은 악명 스탯 때문에 오크들한테도 불신받는 태현이었다.
* * *
“정말로?”
“네. 제가 잘 말해드리면 태현 님은 분명 이해해 주실 거예요. 사실 원래 마음은 착하시거든요.”
“뭐? 그게 무슨 개…… 아, 아니지. 그, 그래.”
앨콧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지금 이다비가 태현에게 말을 전할 수 있다는 걸 알아서였다.
‘김태현이 착하다니 미쳤냐?’
김태현이 게임을 잘한다.
이건 앨콧도 인정할 수 있었다.
김태현이 머리를 잘 쓴다.
이것도 인정할 수 있었다.
김태현이 착하다.
이건 절대 인정 못 해!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받아들이지…….’
“그래서 내가 뭘 해야 되지? 이번 퀘스트만 도와주면 되겠지? 나도 바쁜 사람이야.”
“네. 네. 이번 퀘스트 도와주시고 다른 작은 퀘스트들만 몇 개 도와주시면 되겠네요.”
“뭐? 왜 퀘스트가 늘어…….”
“싫으신가요?”
“……나면 돕는 맛도 있어서 좋겠네. 흥.”
앨콧은 투덜거렸지만 거절하지는 못했다.
이다비가 언제 어떻게 태현한테 말을 전할지 몰라서 무서웠던 것이다.
‘안 되겠다. 다른 식으로…….’
그 대신 앨콧이 선택한 건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데 말이야. 나도 좀 진짜 바빠서…… 다른 퀘스트들은 줄여주면 안 되나?”
“무슨 일로 바쁘신데요?”
이다비의 질문. 앨콧은 별생각 없이 대답하려고 했다.
이다비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경솔한 짓!
“찾는 아이템이 있어서.”
“무슨 아이템이죠?”
“어, 그건 좀…… 내 퀘스트인데…….”
밖으로 나갔던 앨콧의 정신이 살짝 돌아왔다. 그러나 이다비는 능숙했다.
“아. 말하시기 싫으시면 말 안 해도 괜찮아요. 제가 아는 거라도 있으면 도와드리려고 했죠. 파워 워리어 길드는 길드원들 숫자가 많다 보니 아는 게 많거든요.”
“……!”
그 말에 앨콧은 혹했다.
원래라면 자기가 무슨 퀘스트를 하는지는 무조건 숨겼을 것이다.
혹시라도 다른 경쟁자한테 들어갈 경우 방해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다비는 아무리 봐도 경쟁자로 보이지는 않았고, 파워 워리어 길드는 길드 같아 보이지도 않는 집단이었다.
“……<카르바노그의 무딘 창>이라는 아이템인데.”
“그렇군요!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바로 전해 드릴게요!”
뒤에 ‘태현 님한테!’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다비는 생략했다.
앨콧은 그것도 모르고 고마워했다.
“그래? 고마워. 잘 부탁하지!”
* * *
장쓰안이 이끌고, 앨콧까지 합류한 대규모 파티.
단순 계산으로 랭커는 두 명이었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다른 랭커들도 ‘어? 저 둘이 있네? 뭐 좀 되는 퀘스트인가 본데?’ 하고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우르크 지역에 온다는 건 기본적으로 레벨 100을 넘기는 고렙 플레이어라는 뜻!
물론 태현만 빼고 말이다.
“나를 따라와라! 거기 탱커들! 내 앞에서 방패 들어! 위에서 날아오는 공격 막아줘야지!”
“케인 님은 자기가 직접 막았는데.”
“맞아. 역시 장쓰안은…….”
“아, 아니. 그놈은 탱커 직업이고 난 딜러 직업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어처구니없는 트집에 장쓰안도 당황!
그러거나 말거나, 공성전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췩, 발사! 발사!
붉은 바위 요새.
말 그대로 붉은 바위로 만들어진 벽을 갖고 있는 요새였다. 바위를 깎아 만든 탓에 어지간한 공격은 다 막아냈다.
[케켄누그의 화염 창을 사용했습니다. 붉은 바위 암벽이 튕겨냅니다.]
[공성추의 화살을 쏘았습니다. 붉은 바위 암벽이 튕겨냅니다.]
“저거 뭐 이리 튼튼해?”
“왕국 근처의 오크 요새 생각하면 안 되겠다! 여기는 진짜 장난이 아냐!”
상황을 깨달은 플레이어들은 웅성거리며 의견을 나눴다.
중앙 대륙의 왕국 근처에 있던 오크 요새나 여기 와서 털어먹은 작은 마을과는 차원이 다른 방어력!
여기서부터는 대족장과 족장들이 직접 이끄는 우르크 지역의 오크들의 영역.
그들의 힘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역시 성벽을 넘어야 하나?”
“성벽 타고 넘는 거 어려울 거 같은데…….”
-췩! 침입자 놈들, 발걸음 멈췄다! 공격! 공격!
“으헉! 고개 숙여! 고개 숙여!”
“힐 좀! 여기 힐 좀!”
매서운 화살 공격!
투박한 화살들이지만 쏘아 보낸 오크들의 레벨이 높았는지 데미지가 묵직하게 박혔다.
“뭔 성벽에 있는 오크 궁수들 레벨이…….”
“100은 당연히 넘고, 120? 130?”
“사제들, 탱커들한테 버프 좀 걸어주세요!”
요새 벽 밑에서 치열하게 혈전이 벌어졌다.
화살은 기본이고 날아드는 바윗덩어리에 오크 주술사들의 공격까지.
사제 플레이어들이 많아 버티고는 있었지만 더 이상 접근하지는 못했다.
“장쓰안 님! 여기서 어떻게 하죠?”
“장쓰안! 어떻게 해야 하냐! 진척이 없어!”
“장쓰안! 빨리 지시를 내려줘!”
“음, 음, 그러니까 그게…….”
동시에 쏟아지는 압박. 장쓰안은 순간 당혹했다.
넓은 전장, 수십 곳이 넘는 곳에서 일어나는 싸움.
여기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그, 그러니까…….”
-야, 요새 문 열 거니까 요새 문으로 와라.
그 순간 날아온 태현의 귓속말.
장쓰안에게는 마치 구원의 말처럼 들렸다.
“……요새 문으로 가자!”
“???”
“미쳤냐?”
“야, 정신 차려 장쓰안!”
장쓰안의 이름을 듣고 모인 랭커들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리 잃을 게 많은 랭커들!
이런 무모한 결정을 받아들일 리…….
“문, 문이 열렸다!”
“가자! 지금 가야 해!”
우르르 몰려드는 플레이어들!
-췩?! 문을 누가 연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