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21화
태현은 멈칫했다.
지금 태현이 걱정하는 건 크게 다친 오크 대족장이 깨어나서 ‘상처가 다 나았으니 날 엿 먹인 인간 놈들을 죽여야겠군! 오크들을 전부 불러라!’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몬로소가 저렇게 오크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서 부려먹는다면?
‘여기 가장 가까운 건 오스턴 왕국이니까 그놈들이 가장 먼저 털리지 않나? 내 영지까지 오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
태현은 순식간에 계산을 끝냈다.
“역시 몬로소 님! 저는 따라갈 수 없는 완벽한 계산입니다!”
“후후. 뭘 좀 아는군.”
“그러면 오크들을 손에 넣으신 다음 이 주변을 공격하실 겁니까? 오스턴 왕국 같은?”
“흠…… 오스턴 왕국 좋겠지.”
“오스턴 왕국이 좋습니다! 그놈들, 아주 만만한 놈들이라니까요!”
“그래?”
몬로소는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우르크 지역에서 나와 대륙의 중앙으로 진출하려면 가장 먼저 오스턴 왕국과 만나게 되어 있었다.
저렇게 추천까지 하다니 솔깃한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모험가 놈들이 점령한 영지들이 있는데, 그곳은 훨씬 더 만만하죠. 크헤헤.”
“그런……! 더 말해보도록!”
평소 싫은 놈들을 손도 안 대고 쓸어버리기 위해 혓바닥을 놀리는 태현!
그러나 너무 과했다.
태현의 말을 들은 몬로소가 무릎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니…… 이거 더 기다릴 수 없겠군. 지금 당장에라도 이끌고 가서 쳐야겠어!”
“좋은 생각이십니다. 어? 그런데 지금 오크들을 전부 손에 넣으신 겁니까?”
“아니. 대족장도 아직 저항하고 있고, 대족장의 직속 부하들과 족장 중 몇 명만 손에 넣은 상황이지.”
“……그런데 어떻게 공격하시려고요?”
“남은 오크 놈들을 빨리 손에 넣어야지! 오크 놈들도 일단 내가 대족장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내가 협박하면 적당히 굴복할 거야.”
“어…….”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몬로소의 말은 일단 틀리지는 않았다. 대족장에게 전권을 위임받았으니, 말을 하면 어느 정도는 먹힐 것이다.
근데 뭘로 협박하려고?
‘내 말을 안 들으면 맛없는 악마의 피를 먹게 하겠다는 걸로 협박하려나?’
“근데 뭘 가지고 협박하시려고요?”
“압도적인 힘으로 협박해야지. 오크들한테 가장 잘 먹히는 거니까. 흠…… 악마를 소환해야겠어.”
“아니, 아까는 악마 소환할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이야기고. 지금 너의 말을 들어보니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스턴 왕국이 그렇게 먹기 쉬운 상황이었다니!”
“…….”
태현은 가끔 스스로의 화술 스킬과 <아키서스의 화신>이라는 직업 보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잊게 되었다.
자기도 예상치 못한 효과가 나타나는 수준!
‘아, 아니. 아직 망한 건 아니야. 악마를 소환하더라도 나하고 상관없는 악마를 소환하면 그만이지.’
“헤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무슨 악마를 소환하실 겁니까? 역시 다루기 쉽고 반항하기 힘든 약한 악마가…….”
“아니지! 그런 악마를 소환해 봤자 오크들이 겁을 먹을 리 없잖아! 역시 강력한 악마가 좋겠지.”
“저런! 그런 악마를 소환하는 건 힘든 일입니다! 아무리 몬로소 님이라도 그런 악마를 소환했다가는……!”
“날 의심하는 것이냐? 후후. 물론 강력한 악마를 소환하는 건 힘든 일이지.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정보를 얻었다.”
“……?”
“악마 중, 에다오르라는 악마가 인간에게 크게 당해서 부상 입은 상태라고 하더군. 그 정도 악마라면 소환하기 쉬울 거다. 게다가 인간에게 당했으니 어떻게든 대륙으로 소환되고 싶어 할 테니, 내가 더 유리한 입장에서 계약할 수 있지.”
“…….”
“사실 에다오르를 소환하려고 준비하다가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네 말을 들으니 결심이 섰다! 커다란 걸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걸 해야지!”
“…….”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꼴!
하필이면 왜 에다오르란 말인가.
‘날 만나면 죽이겠다고 지X을 할 텐데…….’
태현은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몬로소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다오르와 관련이 있는 아이템이나, 하다못해 에다오르가 원한을 가진 인간 놈만 있어도 훨씬 더 소환이 쉬울 텐데 말이다.”
움찔!
태현은 순간 몸을 떨었다.
<에다오르의 뜨겁게 끓어오르는 진홍빛 대검>을 갖고 있고, 에다오르가 원한을 갖고 있기도 한 태현!
‘이 자식 설마 눈치채고 꺼낸 말은 아니겠지?’
태현은 슬쩍 몬로소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몬로소는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오크 놈들의 피를 많이 바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아주 합리적인 방법이십니다!”
태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을 바친다거나 태현의 대검을 바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역시…….
‘에다오르가 소환되면 날 죽이려고 하겠지?’
몬로소가 에다오르와 태현 사이에서 태현을 지켜줄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뭐? 이놈이 그놈이라고? 하하, 이놈을 줄 테니 내게 영원한 충성을 바쳐라!’라고 말하면 말했지.
‘결국 이놈도 믿고 있을 수는 없는 놈이고…… 에다오르 소환되기 전에 죽이고 튀어야 하나? 그러면 오크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제정신을 차리나?’
태현은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꼬였다는 걸 깨달았다.
몬로소를 죽이면?
-속박에서 풀려난 오크들이 태현한테 ‘감사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도와줬으니 대족장의 아들을 죽인 원한 정도는 잊어드리죠! 덤으로 대족장에게 거대한 상처를 입힌 원한도요!’라고 할 리는 없을 테니, 목숨 걱정부터 해야 했다.
그렇다고 몬로소를 내버려 두면?
-소환된 에다오르가 ‘하하, 우리가 한때 싸웠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서로 화해할까?’라고 할 리는 없을 테니…….
‘젠장. 오크들을 최대한 박살 낸 다음 몬로소를 죽여야 하나?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일단 몬로소가 소환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정신없게 만들어야 하는데…….’
고민하던 태현은 순간 번뜩이는 걸 깨달았다.
지금 오스턴 왕국 퀘스트 때문에 몰려든 플레이어들.
다들 흩어져서 화력이 집중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화력을 집중시킨다면 어마어마한 힘이 될 것이다.
‘길드 동맹이 없는 게 아쉬울 때도 있네.’
길드 동맹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앞장서서 플레이어들을 이끌었을 텐데.
지금 길드 동맹 없이 다 흩어져 있으니, 모으려면 꽤나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려나…… 아. 케인이 있었지? 지금 플레이어들 잘 이끌고 있으려나?’
케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나름 유명한 랭커였고, 지금 성공적으로 플레이어들을 이끌고 있지 않은가.
케인이 ‘모여라! 대박을 노려보자!’하고 선동하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케인이라서 좀 불안하긴 하지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케인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취익! 잡아 왔다! 우리가 잡아 왔다!”
“췩. 이 건방진 놈! 태워 죽일 놈! 찢어 죽일 놈! 간을 꺼내 먹을 테다!”
“히, 히익!”
“……??”
태현은 뒤에서 들리는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 웬 모험가가 잡혀 온 모양이었다.
태현은 쯧쯧 혀를 찼다.
얼마나 멍청하면 잡혀 왔을까!
보통 플레이어들이 싸우다가 HP가 다 닳아서 죽으면 죽었지, NPC한테 포로로 잡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보통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해서 뭘 하지도 못하고 포로로 잡히는 게 대부분!
“멍청하기는. 우르크 지역에서 사냥할 때는 주의를 했어야지. 싸우다가 죽는 것도 아니고 포로 상태로 잡히다니. 어떤 멍청한 놈이…… 응?”
태현은 말하다가 멈칫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장비였던 것이다.
-케인. 너 잘하고 있냐?
-어, 어? 물, 물론이지! 지금 플레이어들이 날 부르고 있네!
-이다비 불러서 진실 대조시키기 전에 당장 털어놔라.
-……나 오크들한테 잡혔어…….
-그래. 보인다.
-응? 너 어딘데?
-네 앞. 이 자식아.
-구, 구해줘!
-기다려. 인마.
태현은 한숨을 한 번 푹 쉬었다. 케인한테 일을 시키려고 했더니 저렇게 잡힐 줄이야.
“췩! 몬로소, 우리는 잡아 왔다!”
“취익! 우리가 이놈을 처리하게 해다오! 이놈은 우리의 원수다!”
“응? 뭔 원수인데?”
몬로소는 케인이 누군지 몰라서 물었다.
“췩! 대족장님의 아들을 죽인 원수다!”
뜨끔!
태현은 움찔했지만 굳이 수정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어떻게 끼어들겠는가.
“뭐? 그런 놈이었나? 그러면 데리고 가서 태워 죽이든 찢어 죽이든…….”
“잠깐! 몬로소 님!”
“……?”
“제가 데리고 가서 놈을 고문하고 싶습니다. 놈이 알고 있는 정보가 있을 겁니다. 제게 맡겨주신다면 확실하게 정보를 빼내겠습니다!”
“췩! 오크의 원수는 오크가 직접 처리해야 한다!”
“아닙니다! 누가 더 고문을 잘할지, 그게 중요합니다!”
“흠…….”
[매우 높은 악명을 갖고 있습니다.]
[칭호……]
[……]
[몬로소가 당신을 선택합니다.]
이제까지 쌓은 악명과 협박!
이런 부분에서는 정예 암살자보다 더 신뢰받는 태현이었다.
“이 일은 이 인간에게 맡기도록 하지.”
“췩! 몬로소!”
“시끄럽다. 내 명령을 무시할 생각이냐?”
몬로소는 말과 함께 거대한 해골 목걸이를 꺼내서 흔들었다.
“……?”
“췩…… 알겠다.”
‘아. 저게 대족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인가?’
태현은 거대한 해골 목걸이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저런 아이템이라면…….
‘무조건 훔쳐야지!’
오크 선조들의 해골 목걸이:
대대로 대족장에게 전해져 내려온, 대족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해골 목걸이다.
[현재 조건을 충족하지 않아 <오크 선조들의 해골 목걸이>의 세부 상태를 볼 수 없습니다.]
[악명이 오릅니다.]
숨만 쉬어도 오르는 악명은 무시하고, 태현은 아이템의 메시지창을 읽었다.
태현 정도 대장장이 기술 스킬인데도 못 본다는 건, 특정 조건이 없으면 아예 못 보는 아이템이 분명했다.
‘뭐 오크 대족장이라도 되어야 하나? 어쨌든 내가 저거 착용하고 다닐 것도 아니고…… 뺏어서 권위만 쓰면 그만이지.’
태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몬로소는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놈에게 사악한 흑마법의 정수를 퍼부을 생각입니다. 크흐흐! 만약 저항할 경우 언데드로 만들어서 되살리겠습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군. 그대로 하도록!”
태현은 붙잡힌 케인을 끌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오크들은 불만 섞인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결국 말을 꺼내지 못했다.
* * *
“컥! 크악! 크어억!”
[아키서스의 노예에게 교훈을 내렸습니다. 신성이 오릅니다.]
[힘이 오릅니다.]
‘……?’
일단 케인을 몇 대 패던 태현은 메시지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케인을 공격했다고 신성이 오르지?
“잠, 잠깐만. 왜 패는 거야?”
“네가 괴로워하는 소리가 밖에 들려야 할 거 아니야.”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까 내가 그냥 소리쳐도 되는 거 아니야?”
“어허. 그러면 디테일이 안 살지.”
“어차피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그냥 기분만 더럽…… 억! 으헉!”
태현은 몇 대 더 팼다. 신성 스탯이 더 이상 오르지 않을 때까지.
밖을 돌아다니던 오크들은 그 소리를 듣고 수군거렸다.
“췩, 정말 짐승 같은 놈이다. 몬로소가 말하는데 저놈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엄청나게 악명이 높은 놈이라더군.”
“취익. 그게 정말인가? 나도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을 태워 죽이고 언데드로 만드는 놈이라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