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15화
“아, 아니…… 네가 독립하려고 가상 친구를 만든 줄 알았지…….”
옆에서 듣던 이다비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태현 님, 가상 친구도 있어요?”
“그런 거 없어.”
당황했던 김태산은 이다비와 이다비 동생들을 보고 헛기침을 하고 몸가짐을 바로 했다.
“아,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 시간에 이렇게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닌데. 난 또 태현이가 나 놀리려고 거짓말한 줄 알고…….”
“……?”
“……???”
이다비 가족 세 명은 태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의 뜻은 하나였다.
‘아버지랑 이러고 놀아요?’
그러나 태현은 당당했다.
-이러고 놀 수도 있지!
그러는 사이 이다비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하는 김태산을 내버려 두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아니에요. 저희가 신세를 지고 있는걸요. 오늘 정말 태현 님에게 신세를 많이 졌…….”
‘태현이 저놈이 어떻게 저렇게 예의 바른 여자애와 친해진 거지?’
김태산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태현이 끼어들었다.
“아니야. 이 시간에 찾아오는 건 확실히 예의가 아니지.”
김태산은 울컥해서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은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 카드 주시죠. 이제부터 이다비랑 동생들이 살 건데 아버지가 갖고 있으면 불안해할 거라고요.”
“이, 이 자식……!”
사랑에 빠지면 부모도 못 알아본다던데, 설마 태현이 이럴 줄이야!
아니, 생각해 보니 태현은 원래 이러긴 했지만…….
김태산은 투덜거리며 카드를 건넸다.
“옛다. 됐냐?”
“감사합니다. 아버지.”
김태산은 이다비와 동생들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태현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저 사람이 그거냐? 응?”
“……?”
“있잖아. 그거…… 알면서 왜 그래!”
“컥!”
김태산은 자기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다는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별생각 안 하고 있던 태현은 옆구리에 주먹을 맞고 신음을 내뱉었다.
“조, 조폭한테도 맞은 적 없는데…….”
“아. 미안하다.”
“아버지…… 제발 힘 조절 좀…….”
“네가 자꾸 말 돌리니까 그렇지!”
“아버지가 자꾸 말을 이상하게 하니까 그렇죠! 그게 뭔데요!”
둘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아니, 둘이 사귀냐고 이 자식아!!”
처음에는 조용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태현이 대답을 안 하자 김태산도 답답해져서 목소리가 커졌다.
마지막 말은 거의 외치는 수준!
“풉!”
“…….”
저 멀리 있던 이다비가 다시 물을 마시다가 목에 걸리는 소리를 냈고, 떠들던 이다비와 동생들은 조용해졌다.
김태산도 그걸 눈치채고 얼굴을 붉혔다.
조용히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래서는 그냥 눈치 없는 아저씨 아닌가!
“미, 미안하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리고 안 사귀는데요.”
“뭐? 진짜? 그러면 이세연이야?”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거기서 그러면 이세연이 나옵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아, 아니야? 난 네가 이세연 같은, 너보다 훨씬 예쁘고 착하고 성격 좋고…….”
“…….”
태현은 김태산이 그를 공격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
“……그런 애하고 열애설이 났는데 부정한 이유가 다른 사귀는 사람이 있어서 아닌가 했는데.”
“이세연이랑 그런 사이가 아니라서 부정한 게 아닐까요? 보통 그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까?”
“크흠. 그래서 사정이나 말해줘라. 어떻게 된 건지.”
“어떻게 된 거냐면…….”
태현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다비는 게임에서 만났는데, 이것저것 도움도 많이 주고 여러모로 사람도 괜찮아서 친해졌고, 그런데 얘가 좀 치사하게 도움 안 받으려는 게 있어서 사람 풀어서 뒷조사를 했는데…….
“뭐라고?”
“뭐가요?”
“아, 아니. 잠깐만. 나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가?”
김태산은 혼란스러워했다. 방금 뭔가 이상한 말이 나오지 않았나?
“두 분 다 뭐 좀 마시면서 이야기하세요.”
“아. 고마워.”
이다비가 와서 음료수를 주자, 태현은 감사해하며 받았다. 김태산도 얼떨결에 받았다.
“어, 저, 그, 저기, 그쪽도 알고 있는 건가?”
“뭐가요?”
“저기, 이, 그, 내…….”
“아버지. 이다비가 이상하게 보잖아요.”
“너 때문이잖아!!”
김태산은 기가 막혀서 외쳤다. 괜히 잘못 말했다가 태현이 이상한 놈으로 찍힐까 봐 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그…… 얘가…… 그쪽을…… 뒷조사…….”
“아, 사람 풀어서 뒷조사한 거요? 들어서 알고 있어요.”
“……괜, 괜찮은 건가!?”
“다른 사람이면 아니지만 태현 님이 한 거니까 괜찮아요.”
“?!?!”
이다비는 다시 돌아가고, 김태산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둘이 대체 무슨 사이야?!’
“아버지 때문에 설명이 끊겼잖아요.”
“어, 어? 그래. 미안하다. 그래서 다음은?”
뒷조사를 했는데 악질적인 놈들이 있어서 변호사 아저씨부터 시작해서 아버지 친구분 중 가능한 인맥에 모두 연락하고, 유 회장한테도 연락을 해서…….
“쿨럭, 쿨럭!”
유 회장까지 나오자 김태산도 사레가 들렸다.
“왜요?”
“아…… 아니야. 계속해봐.”
그래서 다 일이 끝났는데 혹시 모르니까 이사시키고 저도 이 근처에서 지내면서 상황 좀 보려고…….
여기까지가 태현의 설명이었다.
김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의 의미가 아니라 혼이 빠져서 기계적으로 끄덕인 것이었다.
“일단…… 잘했다. 정말…… 완벽하게 일 처리를 했구나?”
“감사합니다?”
“내가 그렇게 가르치긴 했는데…….”
일을 크게 벌이면 확실하게 끝내라.
김태산이 버릇처럼 말하긴 했어도 태현이 진짜 저렇게 확실하게 끝낼지는 몰랐다.
들어보니 관련자들은 거의 영원히 감옥에서 썩을 게 분명했다.
“잘하긴 했고, 친구를 위해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그렇지. 그런데…… 근데 진짜 친구 사이라고?”
김태산은 고민하다가 말을 멈췄다.
요즘 애들은 친구 걱정을 저렇게 진지하고 격렬하게 하나?
아니, 내 아들이니까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네. 왜요?”
“음…… 아니다. 아냐. 어쨌든 잘 알겠다…… 윤희한테는 내가 말하마.”
“네? 제가 말할게요. 왜 아버지가?”
“가만히 있어, 인마!”
김태산은 벌컥 소리쳤다. 태현은 분명 사실 그대로만을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그러면 뒷감당은?
김태산이 뒤집어쓰게 될 게 분명!
왜 잘못은 태현이 했는데 가만히 있던 그가 혼나야 한단 말인가.
“어쨌든 나, 간다. 그…… ‘친구’ 잘 보살펴주고…….”
“아, 같이 나가죠.”
“뭐?”
“저도 어차피 밑으로 가서 숙소 준비해야 하잖아요. 앞으로 거기서 지낼 텐데.”
“……진짜 친구 사이인가?”
“네?”
“아무것도 아니야. 인마.”
김태산이 가고 나서 뭐 오붓하게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이 나간다는 태현의 말을 듣고 김태산은 ‘설마 진짜 친구인가?’ 싶었다.
‘그래…… 태현이 저놈 인간관계 이상한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김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그렇게 그 날 밤은 끝이 났다. 정말 길었던 밤이었다.
* * *
“축하한다. 케인.”
“뭐? 뭔데? 설, 설마 대족장한테 가서 자폭시키려고…….”
“……아니야. 인마. 게임단 만들었고 숙소 구했으니까 오라고.”
“뭐!? 진짜?!”
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소가 어디냐면…….”
“잠깐만, 나 말 좀 하고 올게!”
“동생아! 드디어 내가 게임단에 들어가게 됐다! 저번에 ‘오빠는 왜 그러고 살아’라고 말했던 거 취소해! 이 자식아!”
-정말 게임단 맞아? 어느 게임단인데?
“그, 그게…… 게임단 이름이…….”
-……오빠. 아무리 그래도 사기는 치면 안 돼…… 내가 너무 심하게 말하긴 했지만…….
“아니, 거짓말 아니야! 진짜라고! 내가 대회 우승한 것도 봤으면서!”
-그건 그렇지만…….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태현은 살짝 미안해졌다.
가족들 사이에서 얼마나 구박을 받았으면……
“나, 나 왔다. 어쨌든 그래서 어디라고?”
“주소 보내놨고, 오면 말해. 서류 줄 테니까. 너처럼 게임단 들어갈 애들 몇 명 부를 수 있어.”
“숙소가 넓나 봐?”
“음…… 이다비네 집보다는 작지만…….”
“이다비 집이 왜 나와?”
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이다비 집이 나오지?
“아. 별거 아니야. 어쨌든 오라고.”
“그래. 지금 간다!”
케인은 신이 나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동생이 ‘괜찮은 거 맞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여동생도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리라!
* * *
“어, 어, 어…….”
“죄송하지만 무슨 일로 오셨죠?”
“어, 그게, 저. 그게…….”
직원이 나와서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케인을 쳐다보자, 케인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여기는…….
‘강, 강남 하이팰리스!’
부자들과 연예인들만 산다는 바로 그 초호화 아파트 아닌가!
케인은 깨달았다.
태현이 그를 속인 것이다.
‘너무하잖아…… 김태현! 내가 뭘 잘못했다고! 헉. 잠깐만. 내가 뒷담 깐 게 걸렸나!?’
되레 찔린 케인. 그러나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가 이렇게 당할 만큼 잘못을 하지는 않았다.
뒤에 짐을 잔뜩 짊어지고 있는 케인은 횡설수설하며 여기 어떻게 오게 됐는지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직원의 눈빛은 수상쩍게 변했다.
급기야 품속에서 무전기를 꺼내 드는 직원! 그 순간 태현에게 전화가 왔다.
-야, 언제 와?
“이, 이 나쁜 자식아!”
-……?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건데!”
-……일단 ‘이러는 게’ 뭔지 좀 설명해 줄래?
“여기가 숙소일 리가 없잖아!!”
“숙소 맞는데 이 자식아.”
“?!?!?!”
갑자기 전화가 아닌 앞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케인은 기겁했다.
태현이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속인 게 아니었어?”
“와, 날 그렇게 생각한 거야? 갑자기 빈정 팍 상하는데. 나는 누굴 위해서 이렇게 좋은 숙소를 구했는데…….”
딱히 케인 때문에 구한 숙소는 아니었다. 주로 이다비 때문이었지.
그러나 케인이 그런 사정을 알 리는 없었고, 케인은 매우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 난 그것도 모르고……!”
“됐어. 나 빈정 상했어.”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크흑흑! 이 입! 이 입이……!”
보안 직원들은 기묘한 눈빛으로 두 남자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태현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김태산의 아들인 데다가, 이번에 방송으로 유명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잠깐, 그러면 저 사람은 케인인가?
-아. 그렇겠네. 수상한 잡상인인 줄 알았는데. 케인이겠네.
-그런데 방금 숙소라고 한 것 같은데…….
-잘못 들었겠지. 이런 곳을 숙소로 쓰는 게임단이 어디 있겠어?
“일단 올라가자고. 짐 풀어야 하니까.”
“넵!”
“존댓말 쓰지 마. 재수 없어.”
“응…….”
케인은 시무룩해져서 태현의 뒤를 따라갔다.
* * *
“헉……!”
“헉 소리를 몇 번이나 내는 거야?”
입구에서부터 시작해서 엘리베이터, 현관, 거실까지. 케인은 볼 때마다 기겁해서 깜짝 놀랐다.
“정말 우리가 이런 곳에서 사는 거야?”
“어. 캡슐은 여기다 놓으면 되겠지.”
“내, 내가 이렇게 호화로운 곳에서 살게 되다니……!”
‘이다비가 펜트하우스에서 지내는 건 굳이 말해줄 필요 없겠군.’
태현은 케인이 행복해하는 걸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찰칵, 찰칵-
“뭐 하냐?”
“동생한테 사진 찍어서 보내주려고!”
“희한한 짓을 하네.”
“동생도 이걸 보면 믿어주겠지!”
케인은 신이 나서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오빠.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그런 짓은 그만둬!]
“……혹시 동생 불러도 되냐?”
“응? 뭐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짐 풀어놓고 각자 방 잡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