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512화
태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이다비는 가정 사정을 말해주지 않았다.
별로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태현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태현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있는 것이고, 그런 걸 물어보는 건 무례한 일이니까.
그래서…….
뒷조사를 했다.
‘이다비에게는 이다비만의 방식이 있지만, 나는 나대로 방식이 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일이 터지고 나서 후회하는 건 태현의 방식이 아니었다.
언제나 모든 것에 대비하고 있는 게 태현의 방식!
그렇게 나온 결과는, 이다비의 집안 사정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안 좋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진 빚이 있는데, 이 채무를 맡았던 놈들이 꽤나 악질적인 놈들이었습니다. 원금의 몇십 배로 빚을 부풀렸더군요.
“그거 불법 아닙니까?”
-당연히 불법이죠. 그렇지만 원래 이런 사채업자 놈들은 이런 일들을 수두룩하게 합니다. 협박이 통할 상대를 골라서 하거든요. 세상일이 다 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잖습니까? 이다비 씨 집은 어린 동생들도 있고요.
이다비는 나름 능력 있는 판온 플레이어였고, <파워 워리어> 길드를 운영하면서 많은 고정 시청자들을 데리고 있는 스트리머였다.
당연히 월수입이 꽤 되는데도 전혀 빚을 갚지 못하고 있었다.
사채업자 쪽에서 이자로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젠장, 이다비.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도와달라고 하면 안 되나? 우리가 그 정도 사이도 안 돼?’
태현은 답답했지만 참았다. 괜한 동정만큼 잔인한 일도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집 주변을 지속적으로 감시해 주세요. 불법적으로 일하는 사채업자 놈들이라면 집에 가서 난리 치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할 테니까.”
일단은 참았지만, 여기서 이다비가 더 위험해진다면…….
태현은 이다비의 방식을 존중하는 걸 때려치우고 알아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지!’
-감시에는 비용이 좀 듭니다만…….
“변호사님한테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제가 누군지?”
-죄송합니다. 당연한 걸 물었군요. 알겠습니다! 즉시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심부름센터 직원은 깍듯하게 말했다. 태현 같은 거물 고객은 알아놓는 것만으로도 이득이 됐다.
* * *
그리고 지금.
감시를 맡겨 놓은 직원한테서 연락이 온 것이다.
“무슨 문제죠?”
-그 사채업자 놈들이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집에서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보니까 조폭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빠직!
태현의 다른 손에 들려 있던 연필이 박살이 났다. 그걸 본 김태산은 깜짝 놀랐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태현이 머리끝까지 열 받은 모습이었다.
‘저놈 뭔 전화를 받길래 저러는 거야?’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보고 있다가 일 심각해지면 들어가서 막으세요.”
-예? 지금 감시하는 건 저 혼자라서 저 인원들을 다 상대하는 건 무리……
“들어가서 다칠 경우 백지 수표 끊어드리겠습니다. 일 심각해지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막아요!”
-……알겠습니다!
태현은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
“어, 어?”
“차 좀 빌리겠습니다.”
“그, 그래라?”
태현의 기세가 워낙 흉흉해서 김태산은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했다.
부아아아앙!
태현이 타고 나간 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태산은 정 변호사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정 변호사는 받지 않았다.
* * *
“아저씨. 상황이 이렇게 됐습니다. 좀 도와주시죠.”
-그런 놈들은 상대하기 까다로워. 좀 일이 길어질 걸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연줄은 모두 동원해 주세요.”
-알겠다. 네 부탁이라면 그렇게 해줘야지. 잠깐, 태산이에게서 전화 오는데?
“그건 안 받으셔도 됩니다.”
태현은 끊고 다음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직접 나서기로 마음먹은 이상, 가능한 방법은 모조리 써서 상대를 짓밟아 버릴 생각이었다.
“어르신!”
-……무슨 일로 다 전화를 한 거냐?
유 회장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태현의 전화를 받았다.
태현이 이렇게 전화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무슨 일로 이놈이 전화를 한 거지?’
“도와주시죠. 회장님 힘이 필요합니다.”
-……??
유 회장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이 세상에 아쉬울 거 없는 놈이 도와달라고?
-무, 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냐? 크흐흠.
기쁨으로 떨리는 목소리!
그러나 그 기쁨은 태현의 설명을 듣고 나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착한 애를 괴롭히는 놈들이 있다고?!
유 회장은 벌컥 화를 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태현에게 뭘 뜯어낼 생각도 사라져 버렸다.
“회장님 정도면 아시는 해결사분들 있을 거 아닙니까. 유성그룹 회장님인데.”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 하지 마라.
유 회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부정은 하지 않았다.
흔히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조폭이 대단하고 강력하게 나왔지만,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 조폭은 별로 강한 집단이 아니었다.
괜히 만만한 약자만 노리는 게 아닌 것!
유성그룹 정도 되는 재벌이라면, 어지간한 조폭들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바람 불듯이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 간에 회장님 인맥 총동원해서 이놈들 박살 내주시죠. 어떤 놈들인지는 지금 자료 보내겠습니다.”
-이,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너무 급한 거 아니…….
“전 지금 가볼 곳이 있어서 이만 끊겠습니다!”
뚝-!
* * *
김창식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안 그래도 좁은 집 안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니, 빚을 지었으면 갚아야 할 거 아냐!”
“이번 달 이자는 분명 이체를 했는데요.”
“이자만 갚으면 다야? 원금은 언제 갚을 건데? 갚으라는 빚은 안 갚고, 이 캡슐 비싼 거 아냐? 빚은 안 갚고 이딴 캡슐로 게임이나 하고 있으니 우리가 열이 안 받게 생겼어? 어?”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번에 올라간 빚은 법적 최고 금리를 벗어난 빚…….”
깡!
덩치가 두둑한 조폭이 방망이를 휘둘러 가구를 부수자, 이다비 뒤에 있던 동생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다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는 지금 노골적으로 협박을 하고 있었다.
“법? 버어업? 법이면 다야? 빚 안 갚는 것도 법에 있냐? 법 이야기 하고 싶으면 빚을 제대로 갚으라고!”
말을 해봤자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상대가 노리는 건 협박하고 난리를 쳐서 빚을 늘리는 것.
이다비는 주먹을 쥐었다. 이제까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이라니.
지금 상황 자체가 참을 수 없이 분했다.
“이 캡슐이라도 가져가죠, 형님.”
“그, 그건 안…….”
“안 되긴 뭐가 안 돼! 빚을 지었으면 갚으라고! 이딴 게임이나 하지 말…….”
애애애애앵-
“……?”
“어떤 미친놈이…….”
밖에서 들리는 요란한 차량 도난방지 경고음. 조폭 중 한 명이 짜증 난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술 먹었으면 얌전히 집에 들어가서 잠이나 잘 것이지.”
“그러게 말이야.”
“형, 형님.”
“……?”
“이, 이거…… 우리 차 경고음 아닙니까?”
“……?”
“여기 왔을 때 이 근처에 다른 차는 없었잖습니까!”
“!!!!”
조폭들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생각해보니 여기 승합차를 세우고 내렸을 때, 다른 차는 없었던 것이다.
후다다닥!
“뭐해, 새끼들아! 밖으로 안 나가보고!”
김창식의 말에 조폭들은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다.
“…….”
“…….”
그리고 입을 떡 벌렸다.
웬 미친놈이 야구방망이로 그들이 타고 온 승합차를 박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 왔어?”
“뭐, 뭐, 뭐, 뭐…….”
사람은 예상 밖의 일을 당하면 당황해서 제대로 반응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조폭 중 한 명은 달랐다. 그가 아끼는 차가 박살이 난 꼴을 보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새끼가!!”
퍽!
주먹을 들고 달려드는 순간, 태현은 방망이를 내려놓고 그대로 카운터를 턱에 꽂아 넣었다.
그림 같은 일격이었다.
“이건 정당방위야. 이해 좀 해달라고.”
“…….”
“…….”
자리에 있던 조폭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태현이 한 명을 때려눕히자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조폭 중 한 명이 태현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너, 너…… 우리가 누군지 알아?”
“알아.”
“안다고?”
“그러면 모르고 이 짓을 했겠어? 뒤에 봐. 뭐가 보이지?”
조폭들은 고개를 돌렸다. 태현이 타고 온 페라리가 보였다.
“나 같은 사람이 설마 지나가다가 심심해서 이 차를 박살을 냈겠어? 당연히 니들이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지.”
“너, 너…….”
“할 수 있는 말이 ‘너’밖에 없어? 이 친구처럼 덤빌 생각은 없고?”
조폭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움찔댔다.
원래 성질대로라면 바로 덤벼들었겠지만, 태현에게서는 무언가 섬뜩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덤비면 박살 날 것 같은 그 무언가!
“겁은 나는데 들키면 안 되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 같은 말만 계속하는 거겠지. 니들이 누군지 안다니까. 약한 놈들 골라서 피 빨아먹는 사채업자잖아.”
“마빡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입을 더럽게 잘 놀리는구나.”
“형님!”
김창식은 침을 퉤 뱉으며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태현을 노려보았다.
‘뭐하는 놈이지?’
조폭이기에 그들은 상대를 더 가렸다. 약한 놈만을 노리는 게 그들이었다.
그런 면에서 페라리를 타고 와 저렇게 승합차를 닥치는 대로 박살 낸 태현은 정체불명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쉽게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는 놈!
‘그냥 박살을 내 버려? 저 멍청이야 방심했다 치면 이 인원이 전부 덤벼서 밟아버리면 될 것 같은데…….’
“네가 누군지는 몰라도 오늘 상대 잘못 만난 거다.”
“재밌네. 나도 그 소리 할 생각이었거든. 우리 아버지가 어렸을 때 영화 보면서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
“조폭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지. 돈다발로 뺨 때리면 깨갱거리면서 대가리 박을 놈들이라고 하셨거든.”
“이 새…….”
태현은 손을 들어서 조폭의 말을 막았다. 입을 다문 조폭은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다물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다음은 분노로 얼굴을 붉혔다.
“내가 여기 오면서 생각을 했어. 이 일을 어떻게 처리를 할까. 빚이 총 얼마였지? 27억?”
‘저놈, 저 여자하고 관련 있는 놈이었구나!’
태현이 이다비와 상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김창식의 눈빛에 교활함이 감돌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가 무서운 거지 알게 되면 무섭지 않았다.
“그래. 빚이 27억이지. 저 뒤에 있는 여자하고 아는 사이였나?”
“오면서 그냥 27억을 갚아줄까…… 생각을 했었지. 나한테는 충분히 낼 수 있는 돈이니까.”
“…….”
“…….”
아무리 들어도 허언 같았지만, 태현의 분위기에서는 허언같이 들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김창식은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니들이 여기서 난리를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어. 그런 놈들한테 그냥 돈 주기가 아깝더라고. 그럴 바에는 너희들 목에 27억씩 거는 게 낫지.”
“……??”
“1억만 줘도 사람 죽이겠다는 놈들 우글거리는데 27억을 걸면 몇 번을 죽이겠어?”
“이 자식이 진짜!”
“멈춰!”
태현의 말을 듣던 도중 참을성이 바닥난 조폭 한 명이 덤벼들었다.
김창식이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고 뛰어들었다. 그는 유난히 싸움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으지직!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조폭은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 모습에 다른 조폭들이 경악해서 중얼거렸다.
“동, 동석이가 아마 복싱 대회 우승도 한 놈인데…….”
김창식은 상황을 깨닫고 입맛을 다셨다. 괜히 힘으로 해봤자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을 바꾼다!
“저런, 우리 직원을 이렇게 두들겨 패다니. 이래도 되나?”
피식.
태현은 김창식의 말에 비웃음을 터뜨렸다.